을해년(1815), 병자년(1816), 신사년(1821), 임오년(1822)에 걸쳐 수정개수된 순흥향교 원임안
자료의 내용
최초의 작성연대는 명확하게 알 수 없는 順興鄕校 原任案으로 서문에 기록된 ‘乙亥十月日修整’, ‘丙子十月日改修整’, ‘辛巳八月初吉改修整’, ‘壬午八月日改正’으로 인해 적어도 1815년 이전에 작성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원임안에 입록된 인물들을 통해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경에 작성되었던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순흥지역을 크게 동북과 서남으로 구분하여 인명과 字號, 生年을 동북면과 서남면의 지역별로 구분하여 기록하였는데 여타의 향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명을 제외한 어떠한 다른 사항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 정확하게 몇 년간의 기록인지 알 수 없으나, 인원 수를 통해서 10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추록되어진 사항을 수정시에 합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에 등재된 인물의 성씨는 다름 아닌 순흥의 향촌사회를 실질적으로 주도한 성씨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순흥향교 소장 《任仕案》을 통해서도 향교의 교임을 주로 담당한 성씨이라는 것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총 577명이 입록되어 있는데 그 중 총 78명의 司馬試 합격자가 등재되어 있으며, 文科 10명, 府使 11명, 參奉 3명, 郡守 2명 護軍 1명, 副護軍 1명이 기록되어 있다. 金氏 90명, 朴氏 75명, 李氏 72명, 徐氏 58명, 黃氏 48명, 權氏 44명, 成氏 38명, 安氏 35명, 洪氏 18명, 柳氏 18명, 鄭氏 15명, 琴氏 12명, 申氏 10명, 宋氏 8명, 孫氏 7명, 許氏 7명, 趙氏 5명, 姜氏 3명, 裵氏 3명, 尹氏 3명, 吳氏 2명, 南氏, 睦氏, 嚴氏, 余氏, 任氏, 張氏 각 1명이다. 입록된 인물의 성관의 본관은 부기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순흥향교의 여타 인명부를 통해 19세기 초반의 향교 주도세력의 변화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순흥향교가 다시 건립된 17세기 후반부터 향촌사회의 인명부가 새롭게 작성되기 시작하였는데, 향교의 향사의 임원을 기록한 집사안과 약 200여 년이 흐른 뒤의 본 문서와 비교를 해 보면 변화양상이 나타난다고 하겠다. 순흥부가 복설되면서 향촌사회를 주도한 세력들이 재편되기 시작하였는데, 18세기 초중반까지는 李·金·權·黃·琴씨가 중심이었는데, 본 문서가 작성된 19세기 무렵에는 朴·徐·成씨가 주요 성관으로 급격히 성장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양상이 표면적으로 어떠한 현상을 보여주는 지에 대해서는 파악하기 힘들지만, 19세기로 접어들면서 향촌사회의 주도세력이 다시금 재편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자료적 가치
작성연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서문에 기록된 내용과 입록된 인물들을 통해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 경에 작성되었던 것을 알 수 있는 원임안이다. 총 577명이 입록되어 있어 순흥지역의 성관의 분포를 총망라한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당시 순흥지역을 주도했던 성관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 순흥향교 소장 여타의 문서와의 비교를 통해 시기별로 사족 및 향촌 지배세력의 변화양상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하겠다.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嶺南士林派의 形成』, 李樹健, 嶺南大學校 出版部, 1979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경성대학교 출판부, 1992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1차 작성자 : 윤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