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1919년 영천향교(榮川鄕校)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XF.1919.4721-20140630.Y1450101130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권상수, 김복연, 김동규, 김홍규, 영천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명륜길 76
작성시기 1919
형태사항 크기: 53.8 X 94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안내정보

1919년 영천향교(榮川鄕校) 통문(通文)
1919년 2월 5일 영천향교에서 옥산서원으로 보낸 통문으로 그 내용은 문수면(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에 사는 장문필의 처 안동김씨의 열행을 널리 알려 죽은 혼령을 위로하고 쇠퇴한 풍속을 격려하자는 것이다. 이 통문은 한 지어미가 남편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으로 인륜과 도리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징험할 수 있으며, 많은 선비들이 이를 의롭다고 칭송하는 것은 사회 일반의 여론이 같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문수면의 사림인 전명걸 등이 이 안동김씨의 사실을 통지해왔기 때문이다. 안동김씨는 삼당 김영의 17세손인 김시동의 딸로 과재 장석신의 17세손인 장복렴의 아들 문필의 처이다. 그녀는 18세에 시집을 와서 19세에 남편을 따라 목숨을 버렸다고 한다. 그녀는 시집을 온 이래로 시부모를 모시며 아녀자의 도리를 깊이 체득하여 시부모가 그녀를 마음으로 사랑했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 독기에 중독이 되어 시부모가 병이 들었다. 김씨는 정성을 다해 간호하여 마침내 회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어서 그 남편이 감염되어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이에 김씨는 남편을 따라 자결하려 하였으나, 시아버지가 임신한 몸으로 후사를 걱정해야 한다는 말에 더 이상 시부모에게 염려를 끼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다음 달에 해산을 하여 딸을 낳자 김씨는 밥과 국을 물리치고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김씨는 밤에 일어나 집안을 둘러보는 것처럼 하더니 뒤뜰 낭떠러지 아래에서 자결을 하였다. 그러나 팔 힘이 약하고 칼이 무디어 칼로 찌른 곳이 여러 곳이었으나 겨우 숨을 쉬며 아직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의원을 불러 치료하려 하였으나 사양하며 의원을 물리치고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러한 김씨의 행적에 대해 이 통문은 훌륭하고 곧은 정절로 천지의 뜻뜻한 법을 따른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행동은 궁벽한 시골의 한 어린 아녀자가 하늘의 높음과 땅의 넓음이 끝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낸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래서 사실을 갖추어 도내의 사림에서 가장 으뜸 되는 자리에 있는 옥산서원에 고하니, 엄격한 평가로 추모하는 일을 시행하여 한편으로는 원통하게 죽은 원혼을 위로하고, 다른 한편으로 쇠퇴한 풍속을 격려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김씨의 행적을 향교와 서원에서 널리 알리고자 하는 것은 유교적 풍속교화를 위해 충‧효‧열을 포상하는 것이 과거 조선의 정책이었으며, 그 추천권을 향교와 서원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이전과는 다르게 정열인에 대한 국가적 포상이나 추천의 제도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이 통문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당시는 서구에 빠져 강상의 윤리가 흔적도 없이 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림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이 바로 무너져가는 진리를 부지하는 성스러운 일로 여겨졌다는 것을 이 통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조선시대사학보』제17권 「조선 말기의 旌閭와 가문 숭상의 풍조」, 이희환, 조선시대사학회, 2001
『한국사상과 문화』제67권 「조선시대 昌寧지역의 효자, 효녀, 열녀」, 박주, 한국사상문화학회, 2013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세부내용을 기술합니다.

상세정보

1919년 2월 5일, 張文弼의 妻 安東金氏의 烈行을 널리 알릴 것을 요청하며 玉山書院에 보낸 榮川鄕校의 通文
[내용 및 특징]
1919년 2월 5일 榮川鄕校에서 玉山書院로 보낸 通文으로 그 내용은 文殊面(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에 사는 張文弼의 妻 安東金氏의 烈行을 널리 알려 죽은 魂靈을 위로하고 쇠퇴한 風俗을 격려하자는 것이다. 이 통문은 안동김씨의 열행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먼저 이 통문은 한 지어미가 남편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으로 人倫과 道理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징험할 수 있으며, 많은 선비들이 이를 의롭다고 칭송하는 것은 사회 일반의 여론이 같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문수면의 士林인 全命杰 등이 이 안동김씨의 사실을 통지해왔기 때문이다. 안동김씨三塘 金瑛의 17세손인 金時東의 딸로 果齋 張錫藎의 17세손인 張復濂의 아들 문필의 처이다. 그녀는 18세에 시집을 와서 19세에 남편을 따라 목숨을 버렸다고 한다. 그녀의 타고난 자질은 단정하고 현숙했으며, 성격과 도량은 유순하였다. 시집을 온 이래로 시부모를 모시며 아녀자의 도리를 깊이 체득하여 시부모가 그녀를 마음으로 사랑했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 독기에 중독이 되어 시부모가 병이 들었다. 김씨는 정성을 다해 간호하여 마침내 회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어서 그 남편이 감염되어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김씨는 숨이 끊어질 듯 슬피 울며 급히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하려 하였다. 그러자 시아버지가 "네 몸에 바라는 것이 있는데 어찌 급히도 이렇게 하느냐."며 달랬다. 이에 김씨도 마음으로 그렇다고 여겨 남편의 장례를 치르는 모든 준비를 직접 검속하여 후회가 없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후에는 슬퍼하거나 고통스런 모습을 보여 시부모를 안타깝게 하지 않았다. 그 다음 달에 解産을 하여 딸을 낳았다. 그러자 그녀는 밥과 국을 물리치고 가까이 하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달래면 억지로 조금 먹었다. 그러나 시아버지의 환갑날에는 음식을 풍성하게 차려 드렸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가 와서 봄이 되면 친정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니 온화한 낯빛으로 대답하여 그녀에 대한 집안사람들의 근심을 풀어지게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김씨는 밤에 일어나 집안을 둘러보는 것처럼 하였다. 그런데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의심하여 찾아보니 뒤뜰 낭떠러지 아래에서 자결을 하였다. 그러나 팔 힘이 약하고 칼이 무디어 칼로 찌른 곳이 여러 곳이었으나 겨우 숨을 쉬며 아직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의원을 불러 치료하려 하였으나 사양하며 의원을 물리쳤다. 그녀의 외삼촌이 이 세상에는 목숨보다 귀한 것이 없다는 등의 말로 달래자, 士大夫의 말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느냐며 준엄한 말로 대답하고는 숨이 끊어졌다.
이러한 김씨의 행적에 대해 이 통문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녀는 훌륭하고 곧은 貞節로 天地의 떳떳한 법을 따른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을 부정하는 자는 오랑캐이며 禽獸라고 했다. 김씨의 마음속에 가득 찬 貞烈은 조금이라도 되돌아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며 그 굳은 의지를 찬양했다. 그와 함께 남편의 후사를 이을 희망이 있으면 참고 후사를 기다리며, 또 희망이 끊어지면 마음속의 맹세를 결행하여 한 달을 끌지 않고 마침내 이루었다고 하였다. 이 말은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을 낳았기에 후사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자살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면서 "비바람이 몰아쳐 어둑한 때에도 닭 울음소리 그치지 않는도다. 이미 군자를 만났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리오."라는 『詩經』의 구절을 인용하여 미물도 혹독한 시련에 그 본성을 굴하지 않는데 지금의 현실은 서구에 빠져 綱常의 윤리가 흔적도 없이 되었다고 탄식했다. 하지만 궁벽한 시골의 한 어린 아녀자가 하늘의 높음과 땅의 넓음이 끝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낸 것이라고 평가했다. 宇宙를 흔들어놓을 만큼 그녀의 우뚝한 절개는 타고남이 보통을 넘어선 것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500년 동안 절개를 숭상하여 강상의 윤리를 심어놓은 교화의 여력이 다하지 않은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타고난 본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공경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를 기념하고 드러내는 것은 사림에서 그만둘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사실을 갖추어 道內의 사림에서 가장 으뜸 되는 자리에 있는 옥산서원에 고하니, 엄격한 평가로 추모하는 일을 시행하여 한편으로는 원통하게 죽은 원혼을 위로하고, 다른 한편으로 쇠퇴한 풍속을 격려하도록 하면 고맙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은 김씨가 남편을 따라 자살한 것이 인륜과 도리가 사라지지 않은 것을 징험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이 통문에서 말하고 있는 인륜과 도리가 과거와 같지 않음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씨의 행동을 찬양하며 널리 알리고자 하는 것은 유교적 풍속교화를 위해 忠‧孝‧烈을 포상하는 것이 과거 조선의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大典通編』에 따르면 孝行과 烈行이 旌閭와 復戶에 합치되는 자는 모든 道에서 뽑아서 보고하고, 式年의 연초 마다 禮曹의 세 堂上이 모여 상세히 살핀 후 議政府로 이송한 뒤에 별단으로 왕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들에 대한 혜택은 관직이나 물건을 상으로 주고, 더욱 뛰어난 자는 旌門을 내리고 세금이 면제되는 복호의 혜택을 주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효자나 열녀가 국가로부터 공인을 받기까지는 지역사회의 광범위한 지지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명확한 행적이 드러나는 忠臣는 달리 효자와 열녀의 행적은 국가에서 파악하기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효자와 열녀는 다른 사람에 의한 추천, 즉 지역 士林의 公論에 의한 추천으로 해당 고을 수령이 받아서 이를 각 도의 관찰사가 수합하여 예조에 올렸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으로 효자와 열녀가 결정되다 보니 孝烈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들을 배출하는 집안이 지역사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거나, 여타 士族들과 폭넓은 교유관계를 형성하고 있어야만 가능하였다. 이 통문에서 열녀 김씨가 안동김씨김영의 후손이고, 그 남편은 仁同張氏로 장석신의 자손이라는 것은 이러한 사실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이다. 또한 향촌사회에서 효자와 열녀를 찾아 널리 알리고 중앙에 보고하여 旌表하도록 하는 일은 대개 향교와 서원에서 하였다. 두 기관에서 사림의 공의를 모으거나 확인한 후 그러한 내용을 수령에게 넘기면, 수령이 이를 감사에게 천거하였던 것이다. 영천향교에서 김씨의 열행을 앞장서서 널리 알리는 것은 그녀가 명문가 집안의 며느리라는 이유도 있지만, 과거 이러한 것은 향교가 하는 일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이전과는 다르게 貞烈人에 대한 국가적 襃賞이나 추천의 제도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천향교에서 이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단순히 그 동안 해오던 일을 관행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해서 식민지 초기 일제의 문화통치정책에 의해 과거와는 다른 가치관과 윤리의식이 퍼지면서 전통에 대한 회의와 부정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향교와 서원이 이러한 일을 통해 그 동안 정신적 바탕이었던 유교의 가치관을 유지‧보존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 통문에서 지금의 현실은 서구에 빠져 綱常의 윤리가 흔적도 없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유림의 이러한 의식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적 가치관의 영향을 받은 지금에 있어서는 이러한 일들이 참으로 비인간적이며 어리석은 짓이라고 통박할지 모르지만, 그 당시의 사림에서는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이 바로 무너져가는 진리를 부지하는 성스러운 일로 여겨졌다는 것을 이 통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조선사회의 根幹이었던 儒敎의 家父長的 家族倫理가 일제강점기에도 서원과 향교를 통해 지속적으로 普及‧維持되어 오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자료이다. 또한 변화해가는 價値觀과 倫理意識에 대해 당시의 사림이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이 통문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사학보』제17권 「조선 말기의 旌閭와 가문 숭상의 풍조」, 이희환, 조선시대사학회, 2001
『한국사상과 문화』제67권 「조선시대 昌寧지역의 효자, 효녀, 열녀」, 박주, 한국사상문화학회, 2013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919년 영천향교(榮川鄕校) 통문(通文)

通文
右通諭事 伏以一婦殉烈 可驗彛常之不泯 多士誦義 足見輿情之所同 生等卽見本郡文殊面士林全命杰等通諭 以烈婦金氏殉節事也 金氏安東人三塘(金瑛)先生十七世孫
時東
之女 歸于張氏 卽果齋(張錫藎)先生十一世孫 張復濂文弼之妻也 十八而笄 十九而殉 於乎烈哉 金氏禀質端淑 性度柔婉 自于歸以來 侍舅姑側 甚得婦道 舅姑心愛之
旣數月爲毒沴所中 舅姑病 則金氏竭誠扶護 遂得良 已繼以其夫染沴 竟不起 金氏哀號隕絶 亟欲下從 舅諭之曰 汝有所望在身 何遽乃爾金氏心然之 殮殯之具親撿
無悔 更不作哀苦狀 以戚舅姑 翼月解娩而生女 却飱羹不近 其姑諭之 則强進小許 當舅氏晬日 則具盛饌以進 其爺來諭以待春歸覲 則溫顔色以對 庶一家之弛其慮矣 一
日夜起身 若便旋樣 家人疑其久不返 出而搜之 則園後斷崖下伏釼 而殊腕弱刃鈍 剚至數三處 而奄奄一息 尙有不絶 邀醫療治 則遜辭而却之 其叔舅諭以此世無貴等語 則
峻辭以對曰 士夫之言 何乃如是 臨絶之氣凜如秋霜 言訖而絶 偉乎烈哉 金氏之心 以爲夫死而從天之經地之義 如有否者 夷耳獸耳 撑中義烈 不容少回 而夫嗣
有望 則含忍以須嗣 又絶望 則決志矢心 延延一朔 畢竟成就 他一箇死字 而況其終始處義 雍容不迫 有非世所稱烈丈夫之所可能者也 詩云 風雨如晦鷄鳴不已 盖言微物之性 亦不以風雨之酷烈 變其
所受也 現今區字沉陸 倫綱掃地 而金氏以窮鄕一少婦 辦得此撑天地亘 宇宙轟轟 烈烈之卓節 不惟禀賦之超常 抑可見五百年崇節義 植倫綱之遺風餘化 尙有殄滅 他
不盡者也 凡有彛性 孰不欽 尙第伏念棹稧襃顯 有非今日之所可議到 而筆舌揄揚 亦惟士林之所不容已者 玆敢具事實仰告于道內首善之地 伏願 僉尊亟施
衮鉞之襃 一以慰化者冤鬱之情 一以爲頽俗激勵之地 千萬幸甚
右通通己未(1919)二月初五日榮川(榮州)鄕校直員 金輝稷
公事員幼學李壽甲
金澤鎭
製通柳駿榮
朴升九
寫通金建洛
金學相
宋寅五
朴璟陽
進士權相銖
會員前縣監丁大植
進士金福淵
金㙽
朴勝振
幼學李彦模
朴彭壽
金龍奎
李{王+述}
金世洛
李潤秀
李炳泰
金聲鐸
進士金東奎
金秉浩
幼學李壽春
鄭沂洛
琴博淵
吳應沇
全命杰
宋渭翼
權大鐸
朴馨九
進士金洪奎
幼學金建相
裵東鎭
宋海翼
金建錫
禹桂榮
權大鑽
金時濚
柳東榮
金汝稷
成漢翔
朴鎬九
金鑰
李羲鳳
崔炳寬
議官權相斗
幼學李啓韶
鄭奎淵
金台鎭
權泰鎔
朴濬陽
閔鼎鎬
權泰成
金奎龍
宋仁杰
李曇
金起淵
趙泰舜
宋煃
參奉權泰洵
幼學金達淵
金九鉉
李緩鎬
進士金緯奎
參奉朴齊灝
主事李聖熙
幼學宋冑煥
金基兌
李潤昌
金思翊
全秀璟
朴文緖
李永和
李尙頀
宋雲煥
宋世鎬
金益鎭
丁奎翊
朴善陽
全在銖
進士羅永七
幼學李炳喬
金斗鎭
丁泰鎭
全奎賢
全桂榮
南朝鳳
趙宅遠
金瀚鎭
金廷奎
權相奎
權應相
主事宋相甲
幼學鄭相玟
姜國元
金普榮
宋仁泰
吳潤根
柳復根
金汝德
金定相
朴樞陽
宋寅九
琴樂憲
宋在達
金烋相
黃相璣
參奉丁奎集
幼學朴九陽
金秉錫
宋周煥
李範鎭
李奎明
金相鎬
宋斗煥
金東烈
金宇烈
裵顯世
柳賜榮
朴勝彦
金源夏
張奎五
吳尙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