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8년 8월 20일에 慶州 定慧寺 소속 승려들에 대한 免役 및 관리와 양반들의 침해를 금지한다는 경상도관찰사의 完文
내용 및 특징
1808년 8월 20일에 경상도관찰사가 옥산서원 속사인 정혜사에 소속된 승려들의 잡역을 면제하고, 大小人들의 침탈을 금지하는 완문이다. 본문을 보면 정혜사는 晦齋 李彦迪의 강학처로서 梧里 李元翼이 체찰사로 부임 시에 정혜사를 옥산서원의 속사로 삼고는 勿侵토록 하였다. 朝令으로 監營과 慶州府에서 승역을 오랫동안 蠲減시켜 주었는데, 근래에 승려들이 寺役으로 인해 사찰이 丘墟해질 기미가 보이는 까닭에, 옥산서원에서 재물을 모아 房屋 수 칸을 중수하고 10여 인의 승도를 募入하여 典守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을 돌보아 보호함은 매우 당연한 것이므로, 전에 監營과 本府에서 각 항목의 雜役을 면제받은 것에 의거하여 勿侵토록 하고 大小의 使臣과 遊觀人은 往來시에 무릇 이러한 뜻을 어기지 말 것이며, 또한 별도로 이러한 뜻을 널리 알리고 새겨서 실제로 完護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관찰사가 완문을 발급한 것은 옥산서원 유생들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呈書謄錄』을 보면 정혜사는 17세기 이후부터 지방관이 교체될 때마다 끊임없이 侵役을 받고 있었으며, 그때마다 서원 유생들이 呈訴하여 환속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1834년 11월 화재로 廢寺되기 전까지 계속 반복되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유생들은 옥산서원과 정혜사와의 불가분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회재의 권위를 빌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실제 배향인인 이언적은 1568년(선조 1) 영의정에 추증되고 이듬해에 명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퇴계에 의해 東方四賢의 한 분으로 숭앙되었다. 그리하여 朝野에서 명망이 높은 상태였는데 1610년(광해군 2)에는 文廟에 종사됨으로써 신하이자, 학자로서의 그의 위상은 더욱 현양되었다.
그 결과 1572년(선조 5) 이언적을 제향하는 옥산서원이 건립되자 경주부윤 李齊閔은 인근의 定惠寺·斗德寺 및 沙器·水鐵·冶鐵店 등을 옥산서원에 소속시켜 그 경제적 기초를 마련하였고, 1597년(선조 30)에는 체찰사였던 이원익 역시 정혜사를 속사로 삼아 물침토록 하였던 것이다. 또한 정혜사를 속사로 지정하는 대는 이언적과의 개인적 관계도 크게 작용하였다. 이언적은 생전에 별업인 獨樂堂에 거주하면서 정혜사로 자주 왕래하며 독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곳의 승려들과도 친분이 깊었다. 그래서 독락당 내에 養進菴을 지어서 승려들을 머물게 하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그 자신도 정혜사에 왕래하며 手筆文字를 남기기도 하였다. 이 완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언적의 강학처라는 이유로 일찍이 이원익에 의해 속사로 지정되어 물침되어왔다는 내용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이후 정혜사에서는 회재의 문집과『求仁錄』·『九經衍義』등의 저서들을 편찬하면서 만들어진 목판을 보관하는 한편 옥산서원에 필요한 일정량의 생산품과 노동을 제공하였으며, 그 대가로 소속 승려들은 감영과 본부의 비호를 받아 승군의 역 등 제 잡역에서 제외되었다. 완문이 발급된 무진년의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지만 하루 전인 8월 19일 경주부윤이 발급한 완문에서 1794년에 蠲恤綸音을 반포하고 이를 판각한 御書板本을 정혜사에 보관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를 보아서 1834년 화재로 소실되기 이전의 戊辰年은 1808년이 된다.
자료적 가치
이 완문은 옥산서원이 속사인 정혜사의 면역을 통해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구체적 모습을 알려준다. 특히 18세기 후반 정혜사 중건이후 사안에서의 삭제와 면역의 조치가 있었음에도 여전히 官侵이 발생하고 있었던 상황을 알려주며, 이로 인해 1834년 화재이후 많은 자금이 드는 사찰 중건을 하지 않은 한 요인이 되었음을 알려주는 자료로서 사료적 가치가 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영남지방 서원의 경제적 기반 –소수,옥산,도산서원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2·3,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조선후기의 서원-옥산서원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32,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1992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17~18세기 경주 옥산서원의 토지재원과 그 운영」, 『태동고전연구』16, 손병규,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1999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