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5년 三道水軍統制使 李漢昌이 慶尙道 南海縣 소재 忠烈祠에 내린 帖錢을 南面이 分給 받아 取殖하게 되었다는 내용의 節目
南面 李統相帖錢留置節目
자료의 내용
1785년 慶尙道 南海縣 南面의 鄕約契에서 작성한 節目이다. 조선후기 결성된 남면의 향약계는 일명 南面鄕約契라 불리며, 현재까지 그 전통이 계승되어 오고 있다. 남면향약계가 실시되었던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군 남면 당항리에는 본 자료를 포함하여 18세기 후반 이후 작성된 남면향약계 관련 자료가 보존되어 있어, 그 운영 실태를 살펴 볼 수 있게 해준다.
본 자료의 표제는 ‘南面 李統相帖錢留置節目’으로 제138대 三道水軍統制使였던 李漢昌이 남해현에 지급한 帖錢을 留置하게 된 계기와 이를 取殖한다는 내용의 절목을 수록해 놓았다. 자료 서두에는 帖錢의 유치 계기가 설명되어 있다. 우선 절목 서두에는 李統相, 즉 삼도수군통제사 이한창은 忠武公의 후손으로 統制營에 있으며 邑民을 曲護해 준 은혜가 있음을 칭송해 놓았다. 그리고 관직에서 교체된 직후인 지난 1785년 1월 22일, 本邑 露梁의 忠烈祠를 방문하였는데, 이때 환영해주는 읍민들에게 饋酒하고 帖錢을 내려주었다고 하였다. 이한창은 1783년 1월부터 1784년 12월까지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했던 인물로 충무공 李舜臣의 후손이다. 이에 이한창은 1785년 1월 관직에서 교체되어 돌아갈 때, 통제영 인근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조인 충무공 이순신의 위패가 봉안된 남해현 露梁의 충렬사를 방문하여 첩전을 내놓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이한창은 10緡에 달하는 帖錢을 충렬사에 지급하였는데, 읍민들은 이한창의 은혜를 잊지 말고 영원히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帖錢을 유치하자고 결정하였다. 帖錢을 各面에 분급하여 每兩, 즉 1냥 당 매월 3分의 이자를 놓아 取殖하자는 것이다. 이어 取殖은 各面의 面任이 책임지는데 연말에 각 면임이 한 곳에 모여 그 利殖을 정산하여 차차 전수할 것이며, 만약 부실한 점이 있으면 면임을 추궁하는 것으로 결의하였음을 밝혀 놓았다.
남면에서 규정한 절목은 1785년인 乾隆 50년 2월에 執綱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말미에 기재된 절목의 내용은 ‘每面壹兩四戔參分式’이다. 남해현에는 당시 모두 7개의 면이 있었으며, 10緡을 各面에 분급하였는데, 이때 남면에는 1냥 4전 3푼이 지급되었던 것이다. 한편, 執綱에 의해 절목이 작성된 것으로 보아 남면의 面任 조직은 남면향약계의 향약 조직과 연계되어 운영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향약 조직과 지방행정 기구의 하부 구조인 면임 조직과의 연관 관계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남해현에 소재한 충렬사는 조선시대 남해현의 유일한 사액 祠宇였다. 현직에서 막 교체된 전임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한창은 현조인 충무공 이순신의 위패가 봉안되었다는 연고로 남해현 또는 충렬사에 일종의 부조인 帖錢을 지급하였던 것이다. 이에 첩전을 各面에 분급하여 이자를 놓아 증식하였으며, 그 주체로 지방행정의 하부 구조인 면임 조직을 활용하고 있다. 지방관의 부조 활동과 더불어 주목할 점은 남면 집강이 남면의 면임을 책임지고 있으며, 이것을 통해 면임 조직과 남면향약계가 연계되어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후기 향약 조직이 수령의 통치활동을 보좌하고 있는 사례를 확인 할 수 있다.
『輿地圖書』,
『嶺南鄕約資料集成』, 오세창 외, 嶺南大學校出版部, 1986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