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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년 옥산서원(玉山書院) 유생(儒生) 류상지(柳尙志) 등 상서(上書)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XB.1634.4713-20140630.Y145012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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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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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작성주체 옥산서원, 경상감영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작성시기 1634
형태사항 크기: 28 X 22.4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24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안내정보

1634년 옥산서원 유생 류상지 등 상서
이 상서는 1634년 유생 유상지 등이 전례에 따라 옥산서원에 필요한 소금을 내려주길 순찰사에게 요청하는 글이다. 본문을 보면 옥산서원이 창립된 지가 비록 오래되어 모든 일에 형편이 없어서, 봄과 가을의 양 제사에는 많은 선비들에게 음식을 준비하여 접대하는 것을 계획할 수 없었다. 서원을 지키는 유생들에 이르러서는 매번 변변찮은 음식을 걱정하는 근심이 이어졌는데 경술(1610)년 가을에 순찰사 이정신이 학정을 부흥하고 문교를 먼저 숭상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경주부에서 특별히 소금 7석을 제급해 주었다. 그리하여 원생들이 조석으로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몇 년의 세월이 흘러 항상 영구히 바뀌지 않으리라 여긴지가 이제 20여 년이 되었다. 이것은 전임 관찰사들도 정무가 몹시 바쁜데도 불구하고 계산하여 따지지 않고 전해 내려오는 데로 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옛 규칙이 거의 무너질 지경에 이르러 옥산서원도 형편이 어려워짐도 이로부터 극심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순찰사가 특별히 선비를 아끼시는 정을 베풀어서 선배들의 뜻을 잃지 않고, 전과 같이 셈해 주신다면 황폐해진 서원이 순찰사한테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니 또한 좋은 일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기도하는 간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삼가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아뢴다고 하였다. 이에 순찰사는 제음을 통해 소금 7석을 경주부에서 셈하여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영남지방 서원의 경제적 기반 –소수,옥산,도산서원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2·3,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조선후기의 서원-옥산서원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32,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1992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조선시대 서원과 양반, 윤희면, 집문당, 2004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노비경영」, 『태동고전연구』17, 손병규,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00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원속 파악과 운영」, 『조선시대사학보』35, 손병규, 조선시대사학회, 2005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634년 儒生 柳尙志 등이 前例에 따라 玉山書院에 필요한 소금을 내려주길 巡察使에게 요청하는 上書
내용 및 특징
이 上書는 1634년 儒生 柳尙志 등이 前例에 따라 玉山書院에 필요한 소금을 내려주길 巡察使에게 요청하는 글이다. 본문을 보면 옥산서원이 창립된 지가 비록 오래되어 모든 일에 형편이 없어서, 봄과 가을의 양 제사에는 많은 선비들에게 음식을 준비하여 접대하는 것을 계획할 수 없었다. 서원을 지키는 유생들에 이르러서는 매번 변변찮은 음식을 걱정하는 근심이 이어졌는데 庚戌(1610)年 가을에 巡察使 李廷臣이 學政을 부흥하고 文敎를 먼저 숭상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경주부에서 특별히 소금 7석을 題給해 주었다. 그리하여 院生들이 조석으로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몇 년의 세월이 흘러 항상 영구히 바뀌지 않으리라 여긴지가 이제 20여 년이 되었다. 이것은 前任 觀察使들도 政務가 몹시 바쁜데도 불구하고 계산하여 따지지 않고 전해 내려오는 데로 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옛 규칙이 거의 무너질 지경에 이르러 옥산서원도 형편이 어려워짐도 이로부터 극심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순찰사가 특별히 선비를 아끼시는 情을 베풀어서 선배들의 뜻을 잃지 않고, 전과 같이 셈해 주신다면 황폐해진 서원이 순찰사한테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니 또한 좋은 일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기도하는 간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삼가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아뢴다고 하였다. 이에 순찰사는 제음을 통해 소금 7석을 경주부에서 셈하여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전통사회에 있어서 소금은 화폐와 동일하게 인식되었는데 특히 상서가 작성되었던 17세기 초반은 전란의 후유증과 청나라의 도발로 사회가 불안해 지면서 소금이 더욱 귀하던 시기였다. 그러한 시기에 경주부에서 소금을 제급 받은 옥산서원으로서는 상당한 경제적 이익을 보았던 것이다. 다른 상서에 나타나듯이 옥산서원은 전란이후 경제적 기반을 회복하는데 전력하고 있었지만 유생들이 조석을 해결하기에도 쉽지 않았음을 이 상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이 상서는 옥산서원 『呈書登錄』에 수록된 것이다. 이 책은 監營兵營, 그리고 慶州府와 列邑에서 呈書한 것들이 쌓여 책을 이루고 두루마리가 뒤섞여 간직할 수 없게 되자, 呈書와 題音을 별도의 한 책으로 엮어서 추후에 참고할 典據로 삼고자 庚戌年 5월 4일에 만든 것이라고 序文에서 소개하고 있다. 庚戌년은 1730년(영조 6)으로 추정된다. 즉, 呈書가 너무 많아서 보관이 어려워지자 이를 정리하여 엮은 것이다. 수록된 자료들은 1589년부터 1683년까지 약 100년 동안 작성된 상서 46건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들 자료는 대부분 서원 경제와 관련된 것들로서 免稅, 分給, 免役 등을 청원하는 내용이다. 이 자료는 연도를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 일부 있지만 대체로 옥산서원 초창기의 경제적 규모와 재산 형성 과정과 운영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영남지방 서원의 경제적 기반 –소수,옥산,도산서원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2·3,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조선후기의 서원-옥산서원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32,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1992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조선시대 서원과 양반, 윤희면, 집문당, 2004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노비경영」, 『태동고전연구』17, 손병규,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00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원속 파악과 운영」, 『조선시대사학보』35, 손병규, 조선시대사학회, 2005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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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崇禎七年五月日儒生柳尙志等上書于 巡相國閤下伏以弊院創立雖舊百事
無形春秋兩祀多士供億無以爲計至於守院之儒每患虀鹽之難繼頃在
年秋李巡相廷臣念切興學政先右文本府別煮鹽七石題給以爲院生朝夕之
周自是厥後歲以爲常永久不替今將卄餘年矣前使相政務倥傯未及會減使
流來古規幾至廢墜弊院之無形自此極矣伏願 閤下特垂愛士之情不失先輩之意
使之仍前會減則弊院之受賜於閤下不亦韙乎生等不勝祈懇之至謹冒昧以達
題音內七石會減施行慶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