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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1년 옥산서원(玉山書院) 유생(儒生) 류상지(柳尙志) 등 상서(上書)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XB.1631.4713-20140630.Y1450126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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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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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작성주체 옥산서원, 경상감영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작성시기 1631
형태사항 크기: 28 X 22.4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24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안내정보

1631년 옥산서원 유생 류상지 등 상서
이 상서는 1631옥산서원 유생 유상지 등이 청도의 위전을 감고하는 문동의 신역을 면제하는 완문을 순찰사에게 요청하는 내용이다. 상서의 본문을 보면 옥산서원이 건립 초기에는 경주를 지나는 관리들 가운데 사당에 예를 올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이후 서원을 배회하다 감개하여 존중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깃들어 혹 서원지기와 묘지기를 배치해두기도 하고 혹은 부엌과 창고를 마련해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과 천재지변을 당하여 아주 많던 제기는 돌볼 겨를이 없었고, 그렇기에 사신의 행로에 있는 서원을 경영하는 것을 유생들이 부끄러워한다고 한다. 좋은 시절 서원을 숭상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지금은 서원지기와 묘지기는 달아나고 바닷가의 권리는 날로 깎이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현재의 순찰사가 남쪽으로 와서 옛 자취를 추종하여 斯文을 불러일으키려 하고 있으니 이것은 한 지역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다행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옥산서원에는 전곡이 있지 않고 단지 청도 땅에만 있는데 그곳에 학전 약간을 두고 선비에게 공급하는 자원을 오로지 그곳에 의존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지금 감고를 정하고 그 땅에서 일을 수습하여 스스로 경영하도록 조처한 후 완문을 주었던 사례가 있으니 지금의 순찰사도 다시금 완문을 내려주어서 그로 하여금 여러 가지 일의 신역을 면하게 해주시고, 만약 공문으로 내릴 거면 문동이라는 이름으로 해주길 바랬다. 이에 순찰사는 판결문에서 많은 선비가 아뢰는 것과 사문이 관계되는 것은 함께 시행할 것이라고 하면서 서원측이 원하는 대로 감고의 신역을 면제해주고 그로 하여금 서원의 재원 보용토록 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영남지방 서원의 경제적 기반 –소수,옥산,도산서원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2·3,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조선후기의 서원-옥산서원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32,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1992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조선시대 서원과 양반, 윤희면, 집문당, 2004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노비경영」, 『태동고전연구』17, 손병규,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00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원속 파악과 운영」, 『조선시대사학보』35, 손병규, 조선시대사학회, 2005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631玉山書院 儒生 柳尙志 등이 淸道의 位田을 監考하는 文同의 身役을 免除하는 完文을 巡察使에게 요청하는 上書
내용 및 특징
이 上書는 1631玉山書院 儒生 柳尙志 등이 淸道의 位田을 監考하는 文同의 身役을 免除하는 完文을 巡察使에게 요청하는 내용이다. 상서의 본문을 보면 斯文의 흥하고 망함과 나라의 쇠퇴하고 융성함은 수천 년간 그 득실을 상고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儒家의 道理가 흥성함은 先祖의 성대함과 같은 적이 없었으니 뒤늦은 세상에 태어난 것이 반드시 불행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다만 근일의 습속을 보면 옛사람의 모습과 사뭇 다른데, 서생은 책을 묶어두고 보지 않으며 學舍는 손질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다고 했다. 옥산서원에 대하여 말하자면 서원을 건립하는 초기에는 관리로서 이리저리 다니다 慶州를 지나는 사람은 서원의 사당에 예를 올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서원을 배회하다 감개하여 존중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깃들어 혹 서원지기와 묘지기를 배치해두기도 하고 혹은 부엌과 창고를 마련해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과 천재지변을 당하여 아주 많던 祭器는 돌볼 겨를이 없었고, 그렇기에 사신의 행로에 있는 서원을 경영하는 것을 유생들이 부끄러워한다고 한다. 좋은 시절 서원을 숭상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지금은 서원지기와 묘지기는 달아나고 바닷가의 권리는 날로 깎이고 있다고 했다. 이는 영일장기에 있는 소금가마와 船隻을 말하는 것인데 해당 고을의 관리들에 의해 침해당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유생들은 현재의 순찰사가 남쪽으로 와서 옛 자취를 추종하여 斯文을 불러일으키려 하고 있으니 이것은 한 지역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다행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서원을 흥성하게 일으키는 방법은 진실로 순찰사의 다스림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옥산서원에는 典穀이 있지 않고 단지 淸道 땅에만 있는데 그곳에 學田 약간을 두고 선비에게 공급하는 자원을 오로지 그곳에 의존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지금 監考를 정하고 그 땅에서 일을 수습하여 스스로 경영하도록 조처한 후 完文을 주었던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이에 순찰사도 다시 完文을 내려주어서 그 감고로 하여금 여러 가지 일의 身役을 면하게 해주시고, 만약 公文으로 내릴거면 文同이라는 이름으로 해주길 바랬다. 이에 순찰사는 판결문에서 많은 선비가 아뢰는 것과 斯文이 관계되는 것은 함께 시행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지금 보니 서원 지붕의 상하와 泉石, 그리고 松竹은 선생이 평소 여가에 머물던 것이 아님이 없고, 서원을 옛날과 같이 수호한다면 후학을 위하여 학문을 닦는 모범의 땅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즉 서원측이 원하는 대로 감고의 신역을 면제해주고 그로 하여금 서원의 재원 보용토록 했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이 상서는 옥산서원 『呈書登錄』에 수록된 것이다. 이 책은 監營兵營, 그리고 慶州府와 列邑에서 呈書한 것들이 쌓여 책을 이루고 두루마리가 뒤섞여 간직할 수 없게 되자, 呈書와 題音을 별도의 한 책으로 엮어서 추후에 참고할 典據로 삼고자 庚戌年 5월 4일에 만든 것이라고 序文에서 소개하고 있다. 庚戌년은 1730년(영조 6)으로 추정된다. 즉, 呈書가 너무 많아서 보관이 어려워지자 이를 정리하여 엮은 것이다. 수록된 자료들은 1589년부터 1683년까지 약 100년 동안 작성된 상서 46건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들 자료는 대부분 서원 경제와 관련된 것들로서 免稅, 分給, 免役 등을 청원하는 내용이다. 이 자료는 연도를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 일부 있지만 대체로 옥산서원 초창기의 경제적 규모와 재산 형성 과정과 운영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영남지방 서원의 경제적 기반 –소수,옥산,도산서원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2·3,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조선후기의 서원-옥산서원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32,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1992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조선시대 서원과 양반, 윤희면, 집문당, 2004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노비경영」, 『태동고전연구』17, 손병규,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00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원속 파악과 운영」, 『조선시대사학보』35, 손병규, 조선시대사학회, 2005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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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崇禎四年十二月日儒生柳尙志等上書于巡相國閤下斯文興喪與國汚隆數千年間得
失可考而吾東吾道之興未如有 國朝之盛則生乎晩世者未必爲不幸矣第看
近日之習殊非昔人之風書生束書而不觀學舍蕪穢而不治如生等貿貿已有愧席上之珍則
寧可言學舍中事乎然仔羊則禮可以復行安知來者之不如今也就以弊院之事言之其
在建院之初縉紳之東西行過是都者無不禮於 祠廟徘徊感慨以寓尊慕或爲置典守
焉或爲置庖廩而已迨乎喪亂弘多俎豆未遑原濕之行恥經書院時好所尙人多望風典
非但一路之幸抑亦一國之幸也興起之方固已在 閤下之政冗細之務不欲煩 閤下之聽而有不
得不言則亦不得不言矣院中未有典穀只於淸道地置學田若干供士之資專賴於是
故目前定監考於其地使之收拾而自營下亦給完文已成其例矣伏願 閤下更賜完文
俾免雜事之役何如若以公文則文同其名也生等無任悚仄之至謹冒昧以達 △題音多士
所控斯文所關可不爲之同施乎今見院宇上下泉石松竹無非 先生杖屨之餘守院如古以爲
後學藏修之矜式之地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