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1년 옥산서원 유생 류상지 등 상서
이 상서는 1631년 옥산서원 유생 유상지 등이 청도의 위전을 감고하는 문동의 신역을 면제하는 완문을 순찰사에게 요청하는 내용이다. 상서의 본문을 보면 옥산서원이 건립 초기에는 경주를 지나는 관리들 가운데 사당에 예를 올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이후 서원을 배회하다 감개하여 존중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깃들어 혹 서원지기와 묘지기를 배치해두기도 하고 혹은 부엌과 창고를 마련해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과 천재지변을 당하여 아주 많던 제기는 돌볼 겨를이 없었고, 그렇기에 사신의 행로에 있는 서원을 경영하는 것을 유생들이 부끄러워한다고 한다. 좋은 시절 서원을 숭상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지금은 서원지기와 묘지기는 달아나고 바닷가의 권리는 날로 깎이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현재의 순찰사가 남쪽으로 와서 옛 자취를 추종하여 斯文을 불러일으키려 하고 있으니 이것은 한 지역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다행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옥산서원에는 전곡이 있지 않고 단지 청도 땅에만 있는데 그곳에 학전 약간을 두고 선비에게 공급하는 자원을 오로지 그곳에 의존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지금 감고를 정하고 그 땅에서 일을 수습하여 스스로 경영하도록 조처한 후 완문을 주었던 사례가 있으니 지금의 순찰사도 다시금 완문을 내려주어서 그로 하여금 여러 가지 일의 신역을 면하게 해주시고, 만약 공문으로 내릴 거면 문동이라는 이름으로 해주길 바랬다. 이에 순찰사는 판결문에서 많은 선비가 아뢰는 것과 사문이 관계되는 것은 함께 시행할 것이라고 하면서 서원측이 원하는 대로 감고의 신역을 면제해주고 그로 하여금 서원의 재원 보용토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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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