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2년 玉山書院 儒生들이 戰亂이후 定慧寺 승려들에 대한 勿侵과 구속된 서원 소속 木工의 석방 및 迎日과 長鬐에서 있는 魚鹽을 운반하는데 부과된 船稅의 減免 등을 巡相에게 요청하는 上書
내용 및 특징
이 上書는 1622년 玉山書院 儒生들이 戰亂이후 定慧寺 승려들에 대한 勿侵과 구속된 서원 소속 木工의 석방 및 迎日과 長鬐에서 있는 魚鹽을 운반하는데 부과된 船稅의 減免 등을 巡相에게 요청하는 글이다.
옥산서원은 건립이래로 지방관과 후손 및 지역 사림들의 후원으로 경주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성장하는 한편 그 운영을 위한 경제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임란이후 향촌사회가 황폐화되면서 서원측도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과거의 기반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 이전에 없었던 각종 침해로 인해 그러한 노력이 심각한 타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上書는 전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던 17세기 초반의 옥산서원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점을 항목별로 지적하고 있어서 참고가 된다. 상서에서는 園囿의 잘되고 못됨이 국가와 아무 상관이 없지만 옛사람들은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의 징후로 여겼고, 斯文의 얻음과 잃음이 하늘과 상관이 없지만 孔子는 儒道의 상실로 인한 슬픔을 탄식하였다고 비교하면서, 서원의 잘되고 못됨이 어찌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의 징후가 되지 않겠냐며 반문하였다. 그러면서 처음에 서원을 건립하고서부터 국가에서 현판과 서적을 내려주시고, 토지를 하사한 것은 先賢을 존중하고 후진을 양성하려는 매우 성대한 뜻이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이후 몹시 혼란하고 어지러워 서원을 경영하는 것이 심히 일그러진 듯하였으나, 보호하고 붙들어 매어 서원을 거의 일으켜 세울 수 있으리라는 바람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전란 중에 體察使로 왔던 李元翼이 정혜사로 하여금 옥산서원을 수호토록 한 것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근래에 들어 사람의 일이 자못 변하고, 때가 1592~1593년의 어지러움이 아니라도 매번 침노하여 깎여가는 근심을 당하여 유생들은 마음속으로 괴로워하였다고 한다. 또한 서원의 건물 또한 오래되었는데 일찍이 한 나라가 존중하던 곳이어서 전쟁 속에서도 다행히 피해를 면하게 되었고 어떤 사람들은 하늘이 그것을 잃지 않으려는 뜻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서원을 잃게 되었으니 여기에서 鄕里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 성함과 쇠함이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보았다. 즉 전쟁의 兵禍도 이겨내고 과거의 위상을 회복할 희망을 가졌던 옥산서원이었지만 당대에 이르러 이전에 호의적이던 자들마저 변하여 서원을 침해하는 상황에서는 장차 서원을 운영하기 어려워져서 끝내 잃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에 옥산서원 유생들은 당면 현안 3가지에 대하여 巡相에게 말함으로서 賢人을 존중하고 도리를 중시하는 정성을 혹 외면하였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하려 한다고 했다.
첫째는 옥산서원의 속사인 정혜사 소속 승려들에 대한 침탈을 막아달라는 것이다. 정혜사는 회재가 풍경을 감상하며 책을 읽던 곳으로 그 창문과 벽 사이에는 그가 직접 쓴 글자가 지금도 완연하기에 그것이 훼손되고 사라질 것을 염려하여 승려들에게 잘 지키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회재의 문집과 求仁錄, 그리고 九經衍義 등의 목판을 소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절은 身役을 면제받고, 그 절의 승려들로 하여금 목판을 잃지 않도록 하게 한 것이 오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거처하는 승려들을 침범하는 일이 많아서 그 형세가 필히 절을 텅 비게 만들 것으로 보았다. 이에 옥산서원 유생들은 회재의 손때가 묻은 자취가 사라져서 전하는 것이 없어질 것을 애석하게 여긴다고 하였다. 그런데 유생들이 일을 주간하는 승려를 만나 사정을 말하거나, 都監에게 일이 어긋나는 것을 말하거나 순찰사가 명령할 것을 부탁해보지만 수시로 드나들며 종이를 샅샅이 징발해 가고 있으며, 그 나머지 폐단은 다 기록할 수도 없을 정도라고 하였다. 이에 순상이 별도의 完文을 내리셔서 그 샅샅이 징발해 가는 것을 금하고, 폐단을 일으키는 것으로부터 승려들을 보호하여 둘 수 있게 한다면 참으로 다행이겠다고 하였다.
둘째는 서원 소속의 늙은 목공이 兵營에 잡혀가서 서원 건물을 수리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를 방면해 주길 요청하였다. 유생들은 나이가 70에 가까운 連守라는 이름의 목수가 장차 강당인 求仁堂과 동·서 齋室, 사당의 허물어진 곳을 수리하고 보수하려 하는데 근자에 兵馬節度使께서 직접 軍官과 使令 등을 보내시어 뜻하지 않게 붙잡아갔다고 했다. 이에 자신들은 군법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사태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지는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지역의 관청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군관과 전령을 멋대로 쳐들어가게 해서 폐를 끼치게 하는 것과 學宮의 일을 하려는데 병영에서 갑자기 붙잡아가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물었다. 그러면서 이것이 비록 자그마한 일이지만 또한 鄕里 행정의 잘됨과 잘못됨, 성함과 쇠함을 볼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유생들은 순상에게 關文을 보내어 兵使가 곧장 목공을 돌려보내 학궁의 일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길 요청하였다.
세 번째는 유생을 기르는 설비가 없을 수 없기에 배와 鹽釜를 구비했지만 관아에서의 침해가 심하니 이를 막아주길 요청하였다. 옥산서원에서는 迎日과 長鬐 등지에서 고기잡이의 선박으로 소속된 것이 없으면 간혹 경주부에서 주거나 또는 서원이 스스로 배를 준비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부에서 하는 일은 다행히 부윤의 도움을 받아 완전히 그 稅가 감해졌으나, 만약 각 관아의 사람들이라면 관청의 선박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官屯田의 別將을 붙잡아두었다. 그리고 영일과 장기의 地稅와 郡의 경계에 걸쳐 있는 하천을 통과하는 일, 그리고 물건을 운송하는 등의 일에는 벌떼처럼 모여들어 침해하니 그 기세를 버티어낼 수 없었다. 이외에도 서원이 스스로 준비한 鹽釜가 또한 장기 땅에 있었는데 그곳을 침범함이 매우 많아서 監考 鄭氏는 세력을 잃고 도망을 가버렸다고 한다. 서원 측은 순상에게 경주부와 각 관아, 그리고 영일과 장기 등의 고을에 關文을 내려 보내서 다른 別將과 色吏들로 하여금 서원 소속 어부 進金, 難石, 德山 등이 어로에 침해를 당하는 않도록 하여 선비를 기르는 자금을 마련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자료적 가치
이 상서는 옥산서원 『呈書登錄』에 수록된 것이다. 이 책은 監營과 兵營, 그리고 慶州府와 列邑에서 呈書한 것들이 쌓여 책을 이루고 두루마리가 뒤섞여 간직할 수 없게 되자, 呈書와 題音을 별도의 한 책으로 엮어서 추후에 참고할 典據로 삼고자 庚戌年 5월 4일에 만든 것이라고 序文에서 소개하고 있다. 경술년은 1730년(영조 6)으로 추정된다. 즉, 呈書가 너무 많아서 보관이 어려워지자 이를 정리하여 엮은 것이다. 수록된 자료들은 1589년부터 1683년까지 약 100년 동안 작성된 상서 46건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들 자료는 대부분 서원 경제와 관련된 것들로서 免稅, 分給, 免役 등을 청원하는 내용이다. 이 자료는 연도를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 일부 있지만 대체로 옥산서원 초창기의 경제적 규모와 재산 형성과정과 운영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영남지방 서원의 경제적 기반 –소수,옥산,도산서원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2·3,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조선후기의 서원-옥산서원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32,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1992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조선시대 서원과 양반, 윤희면, 집문당, 2004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노비경영」, 『태동고전연구』17, 손병규,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00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원속 파악과 운영」, 『조선시대사학보』35, 손병규, 조선시대사학회, 2005
「朝鮮後期의 赴役僧軍」,『인문논총』26, 윤용출,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1984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