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2년 玉山書院 儒生들이 巡相이 移屬한 公奴婢를 다시금 확인하여 내려주길 청하는 한편, 永川郡에서의 院屬 寺奴의 分防兵 차출은 부당하니 이를 시정해줄 것을 요청하는 上書.
내용 및 특징
이 上書는 1612년 玉山書院 儒生들이 巡相이 移屬한 公奴婢를 다시금 확인하여 내려주길 청하는 한편, 永川郡에서의 院屬 寺奴의 分防兵 차출은 부당하니 이를 시정해줄 것을 요청하는 글이다.
본문을 보면 서원이 전쟁을 겪은 이후로 典僕이 죽거나 모두 公奴婢에 속하여 소속을 옮긴 일은 전에 이미 巡相에게 呈書하여 그들을 서원에 머물도록 한 문서와 그렇게 하도록 조치한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에 아무런 조처가 취해지지 않아서 서원측은 매우 궁금해 하였다. 그러면서 지금의 순상이 모처에 소속된 공노비를 서원에 소속시키도록 명령하는 문서를 보지 못하였는지 아니면 마음에 새기셨으나 그 마땅함을 얻지 못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무에 바빠서 겨를이 없기 때문인지 궁금해 하였다. 이어서 순상께서 지금 慶州府를 순시하셔서 혹시라도 서원을 찾아오신다면 先賢의 자취가 아직 그대로인 것을 기뻐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피어올라 유생들이 구구한 말을 하지 않더라도 먼저 행동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하니 또한 서원 곁에 거주하는 공노비 약간 명을 잠시 서원에 소속시켜 그들로 하여금 서원을 수호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사정을 순상과 수령에게 나누어서 전할 때에는 혹 순상에게 보고한 후 전하거나, 혹은 노비를 보호하는 고을의 수령이 典例에 따라 모두 완전히 감면해 주었는데 그 유래가 아직까지 이어져오고 있다고 하였다.
그 사례로서 몇 해 전에 備邊司에서 공노비 수를 檢閱하여 水軍에서 완전히 면제될 노비의 수를 헤아릴 때 비변사 郎廳과 전임 巡察使가 서원에 소속된 공노비들을 골라내어 貢案에 남겨두고 수군에 등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成冊을 할 때 친히 그렇게 하고 또한 연계된 官衙에 옮기라는 문서를 만드니 연계된 관아의 色吏가 멋대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永川의 관리만 유독 備邊司와 巡營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는 서원에 소속된 모든 노비를 멋대로 分防兵으로 기록하여 뜻하지 않게 찾아와서는 재촉한다고 한다. 그래서 서원에 있는 유생들이 永川郡에 글을 올려 그 연유를 전달하였는데 당연히 살펴보고 선처할 틈도 없이 도리어 서원의 사람을 결박하여 杖刑 50대를 집행하고 또한 감옥에 가두었다고 한다.
이 사태에 대하여 옥산서원 유생들은 永川의 수령이 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공노비는 이전부터 비록 上道 즉 監營의 명령이 아니라 하더라도 각 읍이 편리에 따라 처리해 왔는데, 이번에는 비변사와 巡營으로부터 이미 서원 소속 공노비들을 水軍에 등재되지 않고 성책할 때 貢案에 남겨두었으며, 그때의 공안이 감영과 고을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니 이것은 수령이 멋대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下吏가 감히 농간을 부릴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이러한 행태를 하게 되니 서원측은 참으로 애통하지만 어떻게 결단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영천의 수령이 斯文의 집안사람이기 때문에 이처럼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생각건대 下吏들이 자기에게 아첨하지 않는 것을 미워하여 문서를 감추고 눈속임으로 죄줄 것을 청한 것에 지나지 않으나 영천의 수령이 이를 살피지 못했던 것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이러한 폐단을 막지 못하면 학궁은 보호되기 어려우며 국가에서 賢人을 존중하여 받드는 법도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윗사람의 명령이 이 때문에 행해지지 않을 것이니 그 해로움이 얕다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어서 유생들은 순상에게 올린 글을 잘 살펴보고 이전에 진술한 바를 특별히 시행하여 서원을 수호할 계책을 완전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또한 영천 고을의 관리를 불러 하나하나 묻고 엄히 다스려서 간사하고 외람된 무리들로 하여금 모든 고을에서 몸을 붙이지 못하게 하신다면 서원 측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진실로 밝은 정사에 화합하는 초석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자료적 가치
이 상서는 옥산서원 『呈書登錄』에 수록된 것이다. 이 책은 監營과 兵營, 그리고 慶州府와 列邑에서 呈書한 것들이 쌓여 책을 이루고 두루마리가 뒤섞여 간직할 수 없게 되자, 呈書와 題音을 별도의 한 책으로 엮어서 추후에 참고할 典據로 삼고자 庚戌年 5월 4일에 만든 것이라고 序文에서 소개하고 있다. 庚戌년은 1730년(영조 6)으로 추정된다. 즉, 呈書가 너무 많아서 보관이 어려워지자 이를 정리하여 엮은 것이다. 수록된 자료들은 1589년부터 1683년까지 약 100년 동안 작성된 상서 46건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들 자료는 대부분 서원 경제와 관련된 것들로서 免稅, 分給, 免役 등을 청원하는 내용이다. 이 자료는 연도를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 일부 있지만 대체로 옥산서원 초창기의 경제적 규모와 재산 형성 과정과 운영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영남지방 서원의 경제적 기반 –소수,옥산,도산서원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2·3,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조선후기의 서원-옥산서원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32,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1992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조선시대 서원과 양반, 윤희면, 집문당, 2004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노비경영」, 『태동고전연구』17, 손병규,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00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원속 파악과 운영」, 『조선시대사학보』35, 손병규, 조선시대사학회, 2005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