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1년 옥산서원 진사 권응생 등 상서
옥산서원은 전쟁이전 선현을 존중하는 도리로 인해 국가에서 제공하는 물건과 많은 수의 사환이 넉넉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이는 국가가 학문을 부흥함이 그러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서원의 설비가 사라져 남은 것이 얼마 없으며 영남으로 부임하는 관리들은 힘들여 오지 않고, 묘우에 배알하는 것도 보조하는 사람의 편에 맡기니 서원은 거의 모양만 남았다고 하였다. 또한 전란이후 국가가 현인을 존중하고 선비를 양성하는 정성이 소홀함을 한탄하였다. 옥산서원 유생들은 섭섭한 감정을 나타낸 후 자신들이 요구하는 사안을 뒤이어 적어 놓았다. 이것은 일전에 병마절도사가 경주부에 왔을 당시 서원 소속 선박을 운영할 인부 진동을 구하였으나, 그가 고용조건으로 자신의 아들 진금을 병영의 군적에서 빼주기로 한 사실을 보고하여 병영 소속 물선군 1인을 서원에 소속시켜 주기로 허락받았으나 아직 서신이 이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어서 병영의 군안에서 그를 제거하여 그로 하여금 서원에 소속하도록 특별히 명하신다면, 병영에는 한 사람의 선부가 없어질 뿐 조금도 손익에 변동이 없을 것이며, 서원은 은혜를 받음이 많아서 斯文의 일을 보호하여 지탱할 수 있으니 아주 큰 도움을 받는 것이라 하였다. 이에 한 사람을 보내어 감히 이름을 빼고자 하니 이를 들어주길 바란다고 하였다. 병마절도사는 제음에서 유생들이 요구한대로 진금을 병영에서 면제하여 서원에 사환토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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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지방 서원의 경제적 기반 –소수,옥산,도산서원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2·3,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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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