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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년 옥산서원(玉山書院) 진사(進士) 권응생(權應生) 등 상서(上書)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XB.1611.4713-20140630.Y145012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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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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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작성주체 권응생, 옥산서원, 경상좌병영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작성시기 1611
형태사항 크기: 28 X 22.4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24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안내정보

1611년 옥산서원 진사 권응생 등 상서
옥산서원은 전쟁이전 선현을 존중하는 도리로 인해 국가에서 제공하는 물건과 많은 수의 사환이 넉넉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이는 국가가 학문을 부흥함이 그러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서원의 설비가 사라져 남은 것이 얼마 없으며 영남으로 부임하는 관리들은 힘들여 오지 않고, 묘우에 배알하는 것도 보조하는 사람의 편에 맡기니 서원은 거의 모양만 남았다고 하였다. 또한 전란이후 국가가 현인을 존중하고 선비를 양성하는 정성이 소홀함을 한탄하였다. 옥산서원 유생들은 섭섭한 감정을 나타낸 후 자신들이 요구하는 사안을 뒤이어 적어 놓았다. 이것은 일전에 병마절도사경주부에 왔을 당시 서원 소속 선박을 운영할 인부 진동을 구하였으나, 그가 고용조건으로 자신의 아들 진금병영의 군적에서 빼주기로 한 사실을 보고하여 병영 소속 물선군 1인을 서원에 소속시켜 주기로 허락받았으나 아직 서신이 이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어서 병영의 군안에서 그를 제거하여 그로 하여금 서원에 소속하도록 특별히 명하신다면, 병영에는 한 사람의 선부가 없어질 뿐 조금도 손익에 변동이 없을 것이며, 서원은 은혜를 받음이 많아서 斯文의 일을 보호하여 지탱할 수 있으니 아주 큰 도움을 받는 것이라 하였다. 이에 한 사람을 보내어 감히 이름을 빼고자 하니 이를 들어주길 바란다고 하였다. 병마절도사는 제음에서 유생들이 요구한대로 진금을 병영에서 면제하여 서원에 사환토록 하였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영남지방 서원의 경제적 기반 –소수,옥산,도산서원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2·3,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조선후기의 서원-옥산서원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32,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1992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조선시대 서원과 양반, 윤희면, 집문당, 2004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노비경영」, 『태동고전연구』17, 손병규,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00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원속 파악과 운영」, 『조선시대사학보』35, 손병규, 조선시대사학회, 2005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611玉山書院 儒生 權應生 등이 兵營 소속 物膳軍을 옥산서원 소속 格軍으로 보내주길 兵馬節度使에게 요청하는 上書
내용 및 특징
이 상서는 1611년 4월 22일 玉山書院 유생 權應生 등이 兵營 소속 物膳軍을 옥산서원 소속 格軍으로 보내주길 兵馬節度使에게 요청하는 글이다. 상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원은 賢人을 존중하고 선비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것으로서 옥산서원宣祖大王 초기에 晦齋 李先生을 위하여 건립되어 賜額된 곳이다. 모범이 되는 이곳에 갖추어야 할 것이 없다면 많은 선비를 맞이하여 접대하고 賢人을 존중하는 도리를 받들 수가 없다. 그렇기에 온갖 제공할 물건과 많은 수의 使喚이 넉넉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이는 국가가 文敎를 받듦이 그러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요사이 전쟁으로 인하여 서원의 여러 설비가 사라져 남은 것이 없었다. 이후로 영남으로 부임하는 관리들은 힘들여 오지 않고 廟庭에 배알하는 것도 보조하는 사람의 편에 맡기니 서원은 거의 모양만 남았다고 하였다. 또한 전란이후 국가가 현인을 존중하고 선비를 양성하는 정성이 소홀함을 한탄하였다. 이어서 서원을 설립할 때 선박을 마련하였으나 格軍이 없었다. 그래서 長鬐震同이라는 자가 있는데 이 자를 부릴려고 알리니 그 아들이 兵營에 소속된 것을 제외시켜준다면 보상이 없이 아들을 내어주겠다고 하고, 또 震金이란 이름의 아들이 하나있는데 兵使병영에 物膳軍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兵使께서 전에 慶州府를 찾으시던 날 잠시 그 연유를 전하여 허락을 받았으나 다만 서신이 이르지 않았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니 병영의 軍案에서 그를 제거하여 그로 하여금 서원에 소속하도록 특별히 명하신다면, 병영에는 한 사람의 膳夫가 없어질 뿐 조금도 손익에 변동이 없을 것이며, 서원은 은혜를 받음이 많아서 斯文의 일을 보호하여 지탱할 수 있으니 어찌 조금 돕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냐며 반문하였다. 이에 같은 무리 한 사람을 보내어 감히 이름을 빼고자 하니 이를 들어주길 바란다고 하였다. 병마절도사는 題音에서 유생들이 요구한대로 震金병영에서 면제하여 서원에 使喚토록 하였다.
자료적 가치
이 상서는 옥산서원 『呈書登錄』에 수록된 것이다. 이 책은 監營兵營, 그리고 慶州府와 列邑에서 呈書한 것들이 쌓여 책을 이루고 두루마리가 뒤섞여 간직할 수 없게 되자, 呈書와 題音을 별도의 한 책으로 엮어서 추후에 참고할 典據로 삼고자 庚戌年 5월 4일에 만든 것이라고 序文에서 소개하고 있다. 庚戌년은 1730년(영조 6)으로 추정된다. 즉, 呈書가 너무 많아서 보관이 어려워지자 이를 정리하여 엮은 것이다. 수록된 자료들은 1589년부터 1683년까지 약 100년 동안 작성된 상서 46건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들 자료는 대부분 서원 경제와 관련된 것들로서 免稅, 分給, 免役 등을 청원하는 내용이다. 이 자료는 연도를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 일부 있지만 대체로 옥산서원 초창기의 경제적 규모와 재산 형성 과정과 운영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영남지방 서원의 경제적 기반 –소수,옥산,도산서원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2·3,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조선후기의 서원-옥산서원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32,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1992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조선시대 서원과 양반, 윤희면, 집문당, 2004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노비경영」, 『태동고전연구』17, 손병규,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00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원속 파악과 운영」, 『조선시대사학보』35, 손병규, 조선시대사학회, 2005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萬曆三十九年四月二十二日玉山書院儒生權應生等謹上書于兵馬
節度使閤下伏以書院爲尊賢養士而設也惟我玉山書院往在 宣宗大王
年爲 晦齋李先生而 賜額創建者也爲憲其無所具則無以延接多士而崇石
尊賢之道故凡百供億使喚靡不有裕焉 國家右文之擧爲如何哉頃緣兵火之
亂院中諸具蕩然無遺矣自後縉紳之由嶺而南者苦不來謁 廟庭各以所管
輔助之便書院庶有所模樣其遵 國家尊養之誠者吁亦盛矣長鬐地有曰震
同者立院備之船隻而無俗軍故告於此使前則命除其子之爲營屬莫補者而
給之又有一子其名震金者則爲 貴營下物膳軍云故 閤下前臨本府之日暫達
其由已蒙頷許而第未及陳書耳伏乞 閤下特命除去營案使之屬於書院則營下
之無一膳夫小無損益而書院之受賜多矣扶護斯文之事豈曰少補之哉玆送
同輩一人敢控名懇生等不勝祈懇之至謹冒昧以達 △題音震金乙本營
頉下爲去乎院以使喚爲㫆訴則乃衆人之所擧是去等豈一人着者無乃一
人之所敢也未知其所實然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