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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간행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현풍향교(玄風鄕校) 『사적록(事績錄)』 수록 1982년 이헌주(李憲柱) 「향교중수사실기(鄕校重修事實記)」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WZ.1982.2771-20140630.Y1411007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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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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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경제-토목/건축-중수기
작성주체 이헌주
작성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작성시기 1982
형태사항 크기: 38 X 27
판본: 필사본
수량: 1책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현풍향교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상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1990년 간행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현풍향교(玄風鄕校) 『사적록(事績錄)』 수록 1982년 이헌주(李憲柱) 「향교중수사실기(鄕校重修事實記)」
1982년 6월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소재 현풍향교(玄風鄕校)를 중수한 후 작성된 기문(記文)이다. 본 자료는 「향교중수사실기(鄕校重修事實記)」라는 제목으로 1990현풍향교에서 필사본으로 간행한 『사적록(事績錄)』에 수록되어 있다. 「향교중수사실기」는 당시 달성군의 유림이었던 이헌주(李憲柱)가 기(記)하였고, 곽병수(郭炳銖)가 서(書)하였다.
본문에는 1982년에 현풍향교가 중수되는 경위와 의의를 언급해 놓았는데, 특히 중수 공사에 공이 있었던 여러 인사들을 칭송해 놓았다. 본문에서는 먼저 근래 현풍향교 건물이 퇴락하고 제향(祭享) 때 제수 비용이 부족한 상황이었는데, 전교(典校)였던 김희원(金熙源)의 노력으로 현풍향교 중수 공사가 주도되었다며, 그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그 외 달성군수(達城郡守) 석진후(石鎭厚)와 장의(掌議) 채수목(蔡洙穆)의 노고도 함께 칭송하였고, 전교 곽인섭(郭仁燮)의 청으로 본인이 부득이 이 글을 쓰게 되었다며, 기문(記文)의 작성 경위도 함께 밝혀 놓았다. 지역 유림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현풍향교의 전통이 현재까지 계승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는 자료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982慶尙北道 達城郡 소재 玄風鄕校를 중수한 후, 중수 경위를 기록한 달성군의 유림 李憲柱의 記文
事績錄 玄風鄕校
자료의 내용
1982년 6월 慶尙北道 達城郡 소재 玄風鄕校를 중수한 후 작성된 記文이다. 「鄕校重修事實記」라는 제목으로 엮여져 있으며, 달성군의 유림 李憲柱가 記하였고, 郭炳銖가 書하였다. 본 자료는 1990현풍향교에서 필사본으로 간행한 『事績錄』에 스물두 번째로 수록되어 있다. 『事績錄』은 1758년부터 1990년까지 현풍향교 운영과 관련해서 작성된 각종 글들과 문서 등을 엮어 놓은 자료다.
1982년의 「鄕校重修事實記」에는 현풍향교 중수 경위와 의의가 언급되어 있다. 특히 중수에 공로가 있는 인사들을 높게 칭송해 놓았다. 이에 따르면 먼저 현풍은 작은 고을이었으나, 예로부터 聲明의 고장이라 불렸고, 이로 말미암아 金宏弼郭再祐 같은 先生이 배출되었음을 자부하고 있다. 그러면서 지금은 두 선생의 세상에서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오히려 聲光의 遺澤은 있어 이 고을에 거주하는 선비들은 聖道가 없어지고 文物이 쇠퇴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옛 법과 옛 도를 지키고 있으니, 우리 고을은 鄒魯의 풍속이 있는 고을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고을에 있는 향교는 그 유래가 오래되었으나, 세상이 변한 후 재정이 궁핍해져 殿과 堂은 퇴락하고 쓰러진 상태이며, 심지어 春秋祭享 때 쓰일 비용조차 부족함을 호소하고 있다. 원래 현풍향교는 독립된 고을이었던 玄風郡에 소재하였지만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달성군 관할이 된 상황, 그리고 근대식 교육기관의 설립에 따라 향교 본의가 크게 위축되고 재정적으로도 곤궁해진 상황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현풍향교의 典校 金熙源김굉필의 후손으로 자신이 향교의 교임을 맡아 힘을 쓰지 않을 수 없다며, 이제 재물을 크게 내어 殿과 堂을 수리하고 이를 새롭게 할 것임을 말했다고 한다. 이미 지난 4년 동안 私財를 털어 현풍향교의 祭享 비용으로 충당하였기에, 成均館長이 이를 듣고 크게 포창한 사실도 있다며, 김희원의 공로를 우선적으로 거론하였다. 이어 達城郡守 石鎭厚는 이 고을을 맡아 內外 三門의 개축, 明倫堂의 보수, 階庭의 釐整에 힘썼고, 掌議 蔡洙穆도 좌우로 두루 노고가 있었음을 칭송하고 있다. 그리고 전교 郭仁燮은 고을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 자신에게 이상의 공로를 글로 작성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며, 기문 작성의 경위를 밝혀 놓았다. 자료 말미에는 자신이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기문 작성을 받아들이게 된 연유와 향후 고을 인사들이 힘을 다해 吾道를 전수해 나가기를 당부하고 있다.
자료적 가치
해방 이후 향교 운영의 일면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향교는 조선시대부터 지방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하는 곳임과 동시에 지역 유림들의 자치 기구였다. 따라서 향교에 큰 일이 있거나 재정적으로 궁핍해질 때마다, 유림들이 자발적인 기부를 통해 향교를 운영해 나갔었다. 근대 이후 정부의 교육 정책 변화로 향교 운영이 크게 위축되었음에도 본 자료에서처럼 현대까지 향교의 전통을 계승되고 외형이 유지된 것은 이와 같은 지역 유림들의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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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990년 간행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현풍향교(玄風鄕校) 『사적록(事績錄)』 수록 1982년 이헌주(李憲柱) 「향교중수사실기(鄕校重修事實記)」

鄕校重修事實記
玄風爲郡蕞爾而自古稱聲明之鄕者寔由金文敬郭忠翼
兩先生今去兩先生之世已遠而聲光耶被遺澤尙存士之居
是鄕者當聖道淪喪文物衰衰之日而猶能保守舊法維
持古道彬彬有鄒魯之風爲鄕之有校厥惟久矣自世變以
來財政窘乏不惟殿與堂傾圯莫至於春秋祭享亦無以備
儀典校金熙源文敬公先生裔也慨然嘆曰吾旣在任敢不
力歟遂大出已貲修葺殿與堂而一新之旣又以私財供四

年祭享費於是成均館長聞而嘉之爲文以褒彰之時
鎭厚
適宰玆郡爲之奮然曰吾且助之凡於內外三門之改
築明倫堂之補修階庭之釐整盡力經紀岡不底積而
掌儀蔡洙穆在任數年爲之左右周旋勞積亦多云役
旣完典校郭仁燮以鄕中僉意請余記其事余惟校者
非止於祭祀先聖而耶以講明倫理養成人材者也今世
衰敎弛雖不能如往時之爲而惟謹護校宮保存舊觀亦
足爲存羊之義也顧世之人於此一切恬視雖頹敗荒廢
鞠爲荗草而不思耶以修復夫旣不能明倫理養人材如
往時又幷與此校宮而荒廢不修則未如一昹吾道之傳
將何耶㝢乎此余之耶尋常慨恨者今觀諸君子之用心
如此自不覺起敬于心輒不辞而樂書之以箸其功且使
世之人相興聞風而効法爲
壬戌六月立秋節星山李憲柱
西紀一九八二年苞山郭柄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