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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간행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현풍향교(玄風鄕校) 『사적록(事績錄)』 수록 1942년 최항묵(崔恒默) 「대성전중수기(大成殿重修記)」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WZ.1942.2771-20140630.Y1411007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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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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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경제-토목/건축-중수기
작성주체 최항묵
작성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작성시기 1942
형태사항 크기: 38 X 27
판본: 필사본
수량: 1책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현풍향교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상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1990년 간행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현풍향교(玄風鄕校) 『사적록(事績錄)』 수록 1942년 최항묵(崔恒默) 「대성전중수기(大成殿重修記)」
1942년 7월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소재 현풍향교(玄風鄕校) 대성전(大成殿)을 비롯한 향교 건물을 중수 한 후, 이를 기리기 위해 작성한 달성군수(達城郡守) 최항묵(崔恒默)의 중수기(重修記)다. 본 자료는 「대성전중수기(大成殿重修記)」라는 제목으로 1990현풍향교에서 필사본으로 간행한 『사적록(事績錄)』에 수록되어 있다.
최항묵의 중수기에는 1942년에 있었던 중수 공사의 경위와 의의를 언급해 놓았다. 이에 따르면 예전부터 현풍향교는 건물이 퇴락할 때마다 지방관 주도로 중수 공사가 있었다고 하였다. 자신이 달성군수로 부임한 지금의 현풍향교도 건물이 퇴락하였지만, 재력의 부족으로 중수 공사를 실시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지난 1941년 지역 유림들이 중수를 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들의 책임이라며, 관청에 보고한 뒤 공사비용을 기부하여 1942년 2월부터 7월까지 공사를 시작해 완료하였음을 밝혀 놓았다. 이때 기부된 금액도 소개하였는데, 군청에서 2,000금(金)을 지원하였고, 나머지 7,000금(金)에 달하는 돈은 지역의 문중과 유림이 기부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유림들의 기부 행위는 일제강점기 향교 운영이 크게 위축되었음에도, 현재까지 향교의 전통이 계승되고 외형이 유지되어 온 중요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942慶尙北道 達城郡 소재 玄風鄕校의 大成殿을 비롯한 향교 건물을 중수한 후, 중수 경위와 의의를 기록한 達城郡守 崔恒默의 重修記
事績錄 玄風鄕校
자료의 내용
1942년 7월 慶尙北道 達城郡 소재 玄風鄕校의 大成殿을 비롯한 향교 건물을 중수하고 작성된 重修記로, 작성자는 당시 達城郡守였던 崔恒默이다. 본 자료는 1990현풍향교에서 필사본으로 간행한 『事績錄』에 수록되어 있다. 『事績錄』은 1758년부터 1990년까지 현풍향교 운영과 관련해서 작성된 각종 글들과 문서 등을 엮어 놓은 자료로, 1942년의 「大成殿重修記」는 그 중에서도 스무 한 번째로 수록되어 있다.
1942최항묵의 「大成殿重修記」에는 현풍향교 중수 공사의 경위와 의의를 간략히 언급해 놓았다. 중수기에서는 먼저 우리나라가 儒化된 나라인 까닭은 나라에 庠이 있고, 郡에는 校를 갖추고 있으며, 그곳에서 先聖과 先師에 대한 祭享을 드리고 있기 때문임을 전제하고 있다. 이어 최항묵은 우리 고을에서는 현풍향교가 바로 그것이라며, 현풍향교의 중수 이력을 소개하였다. 지난 임진왜란 직후에는 玄風縣監 李詠道가 소실된 현풍향교를 중수하였고, 1901년에는 玄風郡守 許佶이 중수하였으니, 이는 실로 성인을 보호하는 뜻임을 칭송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1939년 자신이 달성군수로 부임하였는데, 예전의 玄風郡달성군에 통합되었지만 오히려 향교는 남아 있는 상황이라 하였다. 1914년에 있었던 행정 구역 개편으로 현풍군달성군에 통합되어, 현풍향교달성군 관할이 된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廟殿과 齋宇는 오래되어 썩고 퇴락함이 심해 아침저녁으로 중수할 생각을 하였으나, 흉년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러다 1941년 鄕會에서 지역의 여러 인사들이 이제껏 聖廟를 중수하지 못한 것은 모두 고을 사람들의 책임임을 개탄하였고, 이에 관청에 보고한 후, 현풍향교의 直員 金兌國의 주도로 중수 공사가 실시되었다고 하였다. 공사는 1942년 2월에 시작하여, 그해 7월 완료하여 落成式을 올리니, 殿宇, 東齋, 西齋, 담장이 아울러 새롭게 되었다며, 1942년의 현풍향교의 중수 경위를 밝혀 놓았다. 이어 이때 출자된 공사비용을 거론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군청에서는 겨우 2,000金만 지원하였고, 고을의 여러 문중이 기부한 것이 6,000金, 그리고 고을 인사 金基鍾車斗鉉이 각각 500金을 기부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에 최항묵은 이들의 공로를 칭송하면서, 이들의 노력으로 인해 현풍 지역에서 성인의 도가 실현될 것이며, 三綱五倫이 밝아질 것이니, 향후 현풍의 사림들이 이를 바탕으로 힘쓸 것을 당부하며, 중수기를 마무리 하였다.
자료적 가치
일제강점기 향교 운영의 실태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1942년에 작성된 본 중수기에는 중수 공사 때 사용된 자금의 출처를 대략적으로 소개해 놓았다. 이에 따르면 절대 다수의 비용이 지역 유림들의 기부금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지역 유림들의 기부금 비중이 높은 것은 韓末부터 진행된 향교 재정의 위축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말 정부는 근대식 공립 교육기관을 설립하면서, 향교의 재정을 전용하였고, 향교 재정을 지방관이 직접 관리케 하였다. 이로 인해 향교 재정은 크게 위축되어 향교 중수와 같이 많은 자금이 소요되는 대규모 공사를 자체적으로 시행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중수기를 비롯해 『事績錄』에는 현풍향교의 중수 공사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이때마다 어김없이 공사비용의 상당수는 지역 유림들의 기부금에서 충당되었다. 이러한 유림들의 기부 행위는 조선시대부터 있어 왔던 儒錢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현재까지 향교가 전통을 계승하고 외형을 유지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라 할 수 있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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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간행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현풍향교(玄風鄕校) 『사적록(事績錄)』 수록 1942년 최항묵(崔恒默) 「대성전중수기(大成殿重修記)」

大成殿重修記
東華以儒化爲國國有庠郡有校以享至聖先師玄風之
大成殿蓋是也災於縣監李公詠道重建之後辛丑
縣監許公信〖佶〗重葺之物之廢興固數也而實係於衛聖之
聖與不誠也歲己卬余菲才莅達城之竝于已有年而校宮
尙存然廟殿齋宇歲久朽敗傾覆在朝夕惕爲欲重修而
値年荒未課粤二年辛巳會鄕人士致慨然曰聖廟不修豈
守土云乎哉僉曰此鄕人之責而自明府發之於心有戚戚者
敢不惟命玆是屬金直員兌國掌其事役始於壬午
春孟秋而落之殿宇東西齋竝時軍兼而墻亦隨而
新矣是役也支費殆萬金而已郡辨者僅二千鄕之門排至
六千千金則十人金基鍾車斗鉉捐五百金也噫此鄕人

之誠守土何力爲然徒誠於衛聖而不學聖人之道則非誠
之至也耶謂聖人之道何明五倫而正三綱節財用而興事
功八而治其家出而政于國者是也局能行之先聖之靈
必悅懌而妥安矣遠近必觀戚而興起矣夫如是東華儒
敎之復興将權與於玄風不亦美乎余於殿宇之新可以
卜儒運之回而耶以受其運則在乎人僉君子其勉之咸
願書于楣爲後來勸遂志其事如右云爾
壬午七月日
知郡慶州崔恒黙謹書
西紀一九四二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