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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간행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현풍향교(玄風鄕校) 『사적록(事績錄)』 수록 1931년 채우석(蔡禹錫) 「향교중수기(鄕校重修記)」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WZ.1931.2771-20140630.Y1411007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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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경제-토목/건축-중수기
작성주체 채우석
작성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작성시기 1931
형태사항 크기: 38 X 27
판본: 필사본
수량: 1책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현풍향교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상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1990년 간행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현풍향교(玄風鄕校) 『사적록(事績錄)』 수록 1931년 채우석(蔡禹錫) 「향교중수기(鄕校重修記)」
1931년 8월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소재 현풍향교(玄風鄕校)를 중수 한 후, 이를 기리기 위해 작성한 현풍향교 직원(直員) 채우석(蔡禹錫)의 기문(記文)이다. 본 자료는 「향교중수기(鄕校重修記)」라는 제목으로 1990현풍향교에서 필사본으로 간행한 『사적록(事績錄)』에 수록되어 있다.
채우석의 중수기에서는 1931년 진행된 현풍향교 중수 공사의 경위와 의의를 간략히 언급해 놓았다. 이에 따르면 현풍향교는 예전부터 건물이 퇴락하면 중수 공사를 거행하였는데, 이는 현풍향교에 남아 있는 각종 사적(事績)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1914년 원래 현풍향교를 관할하던 현풍군(玄風郡)달성군에 통합되면서, 달성군이 관할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재정의 부족으로 석전례(釋奠禮)의 거행에 어려움이 있으며, 퇴락한 건물은 전혀 손대지 못하고 있는 상황임을 호소하고 있다. 특히 신학교(新學校) 건립에 따른 향교 재정의 위축을 지적하였다. 한말(韓末) 이후 정부는 근대식 공립 교육기관의 운영 자금을 향교 재정에서 전용하였기에, 향교가 크게 위축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지역 유림들은 의견을 모아 1931년 중수 공사를 시작하여 3개월 만에 완료하였는데, 이때 많은 유림들이 각자 자금을 기부하여 공사비용에 보태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달성군수(達城郡守)였던 신현구(申鉉求)와 여러 유림들의 노고를 칭송해 놓았다. 이와 일제강점기 향교 재정이 크게 위축되어 운영에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현재까지 향교의 전통과 외형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지역 유림들의 각별한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931慶尙北道 達城郡 소재 玄風鄕校를 중수한 후, 중수 경위와 의의를 기록한 현풍향교 直員 蔡禹錫의 重修記
事績錄 玄風鄕校
자료의 내용
1931년 8월 慶尙北道 達城郡 소재 玄風鄕校를 중수하고 작성된 重修記로, 작성자는 당시 현풍향교의 直員이었던 蔡禹錫이다. 본 자료는 1990현풍향교에서 필사본으로 간행한 『事績錄』에 수록되어 있다. 『事績錄』은 1758년부터 1990년까지 현풍향교 운영과 관련해서 작성된 각종 글들과 문서 등을 엮어 놓은 자료로, 1931년의 「鄕校重修記」는 그 중에서도 스무 번째로 수록되어 있다. 한편, 본 자료 앞에는 당시 達城郡守로 있던 申鉉求가 작성한 「鄕校重修記」가 수록되어 있어, 현풍향교 중수 경위에 대한 비교 검토가 가능하다.
1931년에 작성된 채우석의 「鄕校重修記」에는 현풍향교의 중수 경위와 의의가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중수기에서는 먼저 世敎는 공자를 尊衛해야 지켜지고, 尊衛는 先廟의 모양을 修完하는데 있음을 전제해 놓았다. 그러면서 우리 현풍향교1914년 고을이 폐지되어 달성군에 합쳐진 후, 달성군 관할이 되었다고 하였다. 1914년에 전국적인 행정 구역 개편으로 현풍향교를 관할하던 현풍군달성군에 통합되어, 달성군이 그것을 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현풍향교는 처음 건립된 이래 건물 수리를 끊임없이 지속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지난 事績을 살펴보면 상세하게 낱낱이 알 수 있기에 여기서는 별도로 언급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실제 『事績錄』에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여러 차례 이루어졌던 현풍향교 중수 기록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어 비가 새고, 바람에 파괴되었으며, 나무는 썩은 곳이 여러 군데라고 하였다. 大聖殿은 비가 새고 있었고, 東廡와 西廡의 대들보는 꺾여 있었으며, 明倫堂의 東齋와 西齋는 파손되어 손보지 않아도 되는 곳이 전혀 없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우리 고을의 여러 章甫들이 중수를 논의하였고, 향교의 재물이 新學校에 옮겨져 어찌할 도리를 찾지 못했으나, 점점 중수를 해야 된다는 것으로 여론이 비등해졌기에, 올해 봄 鄕議가 駿發하여 남아 있는 자금으로 중수 공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유림들이 각자 자금을 기부해 3개월 만에 공사를 마무리 하였다며, 현풍향교 중수의 경위를 밝혀 놓았다. 이어 자신이 재주가 없음에도 당시 현풍향교의 직원을 맡아, 이러한 盛事를 이루게 되어 매우 기쁘다는 소감을 밝히면서, 중수의 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당시 달성군수에 있었던 신현구와 여러 유림들의 노고임을 칭송하였다. 중수기 말미에는 중국 袁州에서 지방관과 유림들의 노력으로 지방 교육이 크게 융성하게 된 고사를 인용하며, 1931년 중수 공사의 의의를 기리고 있다.
자료적 가치
일제강점기 향교의 운영 실태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현풍향교1931년 이전부터 중수 공사를 실시하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했는데, 新學校로 현풍향교 재정이 전용되었기 때문임을 지적하고 있다. 韓末 이후 정부는 지방에 근대식 공립 교육기관을 설치하였는데, 이때 근대식 공립 교육기관의 재정은 향교 재정에서 전용하였다. 이에 우선적으로 향교의 재정 상황을 파악한 뒤, 지방관이 직접 관리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향교는 약간의 재산을 보유한 채, 釋奠祭와 같이 중요한 의례가 있을 경우, 겨우 의례를 거행할 정도의 자금만 지원 받을 수가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적지 않은 비용이 필요한 중수 공사는 쉽게 이루어질 수 없어, 건물이 퇴락된 채 방치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31현풍향교 중수 공사가 거행 될 수 있었던 것은 지역 유림들의 자발적인 기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부터 향교는 수령의 협조 하에 지방 유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운영되며 교화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었다. 그래서 지역 유림들은 향교에 큰 일이 있거나 재정적으로 곤궁해지면, 자발적으로 자금을 출자하여 향교 운영에 보충하였는데, 이를 이른바 儒錢이라 불렀었다. 1931현풍향교의 중수는 이러한 전통을 계승한 지역 유림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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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간행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현풍향교(玄風鄕校) 『사적록(事績錄)』 수록 1931년 채우석(蔡禹錫) 「향교중수기(鄕校重修記)」

鄕校重修記
世敎奚賴尊衛吾夫子也尊衛奚先廟貌之修完也
惟我苞山之校自甲寅縣廢而合稱達城校亦遂爲達之
管焉蓋其刱始以來嗣而葺者世不乏人考諸往蹟歷歷
可詳今不必枚擧而又此歲月之久上雨傍風互破材朽
殿宇而滲漏兩廡而樑推明倫之堂東西之齋破損非一若
不及時施功莫保朝夕寔吾鄕僉章甫之齋咨興喟愈久
愈淺而其於資財之盡入新學校披取手東無計何哉
雖然在人不在物苟彈誠勇圓齋聲幷肩天下元無不可辨
之事也是歲春鄕議峻發以留資若于始役而秉彛攸同願助
者多終三閱月而工匠告訖昔之滲漏毁損者於是乎巍然
煥然度吾夫子之悅豫而降陟矣顧玆不佞猥參直員之任
獲觀盛事窃不勝欣抃而自始至終皆郡守申侯鉉求氏及
僉章甫之賢勞也不佞何絲毫之力與有焉然區區素懷
不能無一露昔旴江李氏之記袁州學也眷眷以禮樂陶

民仗大節殉忠孝有望於袁之人而彼弄筆墨徼利達深
用爲羞則不俧窃自以李之望於者望於吾鄕云是爲記
夫子誕降後二千四百八十二年辛未仲秋
直員平康蔡禹錫謹記
西紀一九三一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