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慶尙北道 達城郡 소재 玄風鄕校를 중수한 후, 중수 경위와 의의를 기록한 達城郡守 申鉉求의 重修記
事績錄 玄風鄕校
자료의 내용
1931년 8월 慶尙北道 達城郡 소재 玄風鄕校를 중수하고 작성된 重修記로, 작성자는 당시 達城郡守였던 申鉉求다. 본 자료는 1990년 현풍향교에서 필사본으로 간행한 『事績錄』에 수록되어 있다. 『事績錄』은 1758년부터 1990년까지 현풍향교 운영과 관련해서 작성된 각종 글들과 문서 등을 엮어 놓은 자료로, 1931년의 「鄕校重修記」는 그 중에서도 열아홉 번째로 수록되어 있다. 한편, 본 자료 다음에는 당시 현풍향교 直員이었던 蔡禹錫이 작성한 「鄕校重修記」가 수록되어 있어, 현풍향교 중수 경위에 대한 비교 검토가 가능하다.
1931년 신현구가 작성한 「鄕校重修記」에는 중수 공사의 간략한 경위와 의의를 언급해 놓았다. 본문에서는 먼저 현풍향교의 중수 이력을 소개하고 있다. 지난 임진왜란으로 현풍향교가 소실되었는데 전란이 끝난 후 玄風縣監 李詠道가 향교의 위치를 옮겨 세웠으며, 1758년에는 현풍현감 金光泰가 퇴락한 현풍향교를 원래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는 것이다. 임란 직후와 1758년에 현풍향교 이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때의 간략한 중수 경위도 『事績錄』에 수록된 김광태와 지역 유림들이 작성한 중수기 등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이어 1914년 고을이 폐지되어, 현풍향교는 달성군 관할이 되었다고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玄風郡이 달성군에 합쳐진 까닭에 현풍향교가 달성군수의 관리를 받게 된 것이다. 또 이로 인해 향교의 재산은 토지에서 발생하는 약간의 수입이 전부여서, 釋奠禮 때 쓰이는 각종 제수비용의 마련과 퇴락한 건물 수리비용이 항상 부족해졌음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건물이 퇴락하여 비가 새고 비바람을 막지 못하며, 東廡와 西廡는 대들보가 꺾여 있고 창은 썩었으며, 明倫堂의 東齋와 西齋 또한 많이 파손되어 여러 士林이 미안해하고 개탄하고 있다는 것이다. 韓末 이후 실시된 근대식 교육기관으로의 향교 재정 전용과 지방 재정의 향교 재정 관리로 대부분의 향교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에 자신이 지난 1926년 가을 달성군수로 부임하여, 현풍향교를 수리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으나, 水害와 旱害가 거듭되어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겨우 올해 봄, 현풍향교가 가지고 있는 기본금 210圓, 여기에다 많은 고을 유림들이 자발적으로 기부한 義捐金을 보태어 공사를 시작해, 비가 새는 것은 고치고, 퇴락한 것은 바로 잡았으며, 썩은 것은 바꾸니, 宮墻殿庭이 새롭게 되어 吾道가 새로 밝아졌다고 하였다. 이어 여러 유림들과 더불어 현풍향교 直員 蔡禹錫이 공사를 式日에 監董하니, 3朔만에 마치고 여름에는 落成式을 거행 할 수 있었다며, 중수 공사 경위를 밝혀 놓았다. 자료 말미에서는 낙성식에 행해진 연회에서 고을의 유림들이 이러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자신에게 記文 작성을 부탁하였고, 신현구 본인은 사양하였지만 끝내 거절하지 못해 이상과 같이 기문을 작성하게 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자료적 가치
일제강점기 향교 운영의 실태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韓末 이후 정부의 교육 정책 변화로 향교는 크게 퇴락하였다. 근대식 공립 교육기관이 설립되자, 정부는 訓令을 내려 향교 재정을 근대식 교육기관의 재정으로 전용케 하였던 것이다. 또한 자발적으로 운영되던 향교 재정을 지방관이 직접 관리케 하였다. 이로 인해 전국의 여러 향교는 가장 큰 행사인 釋奠禮를 겨우 행할 수 있는 정도의 재정만 보유하며, 재정적으로 곤궁함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현풍향교도 재정의 부족으로 퇴락된 건물을 중수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달성군수와 지역 유림들의 의지에 의해 현풍향교 중수 공사를 시행할 수 있었는데, 이는 향교에 대한 이들의 각별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부터 향교는 수령의 협조 하에 지역 유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향교에 큰 일이 있거나 재정이 부족해질 때마다, 지역 유림들이 자발적으로 재산을 기부하던 행위에서도 확인된다. 이렇게 기부된 자금은 이른바 儒錢이라 불렀는데, 조선시대 향교의 중요한 재정적 기반 중 하나였다.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향교의 외형이 현재까지 유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전통을 계승한 지역 유림들의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