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1990년 간행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현풍향교(玄風鄕校) 『사적록(事績錄)』 수록 1922년 김희근(金熙根) 「중수찬성기(重修贊成記)」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WZ.1922.2771-20140630.Y1411007018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경제-토목/건축-중수기
작성주체 김희근
작성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작성시기 1922
형태사항 크기: 38 X 27
판본: 필사본
수량: 1책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현풍향교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상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1990년 간행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현풍향교(玄風鄕校) 『사적록(事績錄)』 수록 1922년 김희근(金熙根) 「중수찬성기(重修贊成記)」
1922년 9월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소재 현풍향교(玄風鄕校)를 중수 한 후, 이를 기리기 위해 달성군 출신의 유학자 김희근(金熙根)이 작성한 기문(記文)이다. 본 자료는 「중수찬성기(重修贊成記)」라는 제목으로 1990현풍향교에서 필사본으로 간행한 『사적록(事績錄)』에 수록되어 있다.
1922김희근이 작성한 「중수찬성기」에는 주로 현풍향교 중수를 주도한 교임(校任) 곽종래(郭鍾來)의 공로를 기려 놓았다. 이에 따르면 자신이 현풍향교 향사(享祀) 때의 제관(祭官)을 맡아, 고을이 없어진 상황임에도 현풍향교가 그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까닭을 생각해 보았다고 한다. 원래 현풍향교가 소재했던 현풍군(玄風郡)이 지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달성군에 편입되어, 관할 관청의 지원과 관심을 받지 못함에도 외형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김희근은 근래 현풍향교의 대성전(大聖殿), 명륜당(明倫堂), 홍문(紅門), 동무(東廡), 서무(西廡)를 단장한 것, 단청(丹靑)을 새롭게 한 것, 무성한 잡초를 제거한 것, 또한 향사를 마친 후 남은 현풍향교 재정이 풍부한 것 등은 모두 교임인 곽종래의 공로라며, 그를 높게 칭송해 놓았다. 일제강점기 동안 향교의 전통이 지속되고, 외형을 유지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지역 유림들의 자발적인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922慶尙北道 達城郡 소재 玄風鄕校의 건물을 중수한 후, 중수 공사를 주도한 현풍향교 校任 郭鍾來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작성한 金熙根의 記文
事績錄 玄風鄕校
자료의 내용
1922년 9월 慶尙北道 達城郡 소재 玄風鄕校를 중수 한 후, 달성군에 거주하던 유림 金熙根이 작성한 記文이다. 본 자료는 1990현풍향교에서 필사본으로 간행한 『事績錄』에 수록되어 있다. 『事績錄』은 1758년부터 1990년까지 현풍향교 운영과 관련해서 작성된 각종 글들과 문서 등을 엮어 놓은 자료로, 1922년의 「重修贊成記」는 그 중에서도 열여덟 번째로 수록되어 있다.
김희근이 작성한 1922년의 「重修贊成記」에는 현풍향교 중수를 주도했던 郭鍾來의 공로를 칭송해 놓았다. 본문에서는 먼저 김희근 자신이 늙고 병들어 오랫동안 杜門하였는데, 현풍향교에서 자신을 享祀 때의 祭官으로 임명하는 帖을 받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때 김희근은 지금 고을이 없어진 상황에서 향교가 需用할 비용과 향사에 사용할 籩과 豆 같은 祭器는 어떻게 마련한 것이며, 大聖殿, 東廡와 西廡, 門과 담장은 또한 어떻게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고 한다. 원래 현풍향교는 독립된 고을이었던 玄風郡에 소재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달성군에 통합되어, 오랫동안 현풍향교를 관할해 주던 고을이 없어진 상태였다. 그런 상황임에도 대성전의 썩은 기둥, 동무와 서무에 무너진 부분, 明倫堂의 손실된 기와, 紅門의 쓰러진 기둥, 여러 곳에 색깔이 바래 있는 丹靑은 거듭 새롭게 되었고, 무성히 나있던 잡초는 뿌리 채 제거되었으며, 재물이 풍부하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곽종래의 공로임을 지목하고 있다. 당시 교임이었던 곽종래가 正道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로 정성껏 현풍향교를 운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향사를 마치고 나서 현풍향교에 남은 비용을 물었는데, 조목마다 잘 정리되어 있고 남은 것이 천금에 달함을 보았다고 한다. 이에 鄕中에서는 곽종래에게 굳이 청하여 그 義를 담당케 하였으나, 끝내 거절한 사실도 언급하였다. 이러한 곽종래의 모습은 狂瀾天地에 외부의 유혹을 물리치는 행위와 같고, 義를 중요시하고 道를 즐길 줄 아는 군자의 모습과 같기 때문에, 후대의 사람들이 이를 보고 배울 수 있도록 자신이 기문을 쓰게 되었다며, 본 자료의 작성 경위도 함께 밝혀 놓았다.
자료적 가치
일제강점기 향교 운영의 실태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조선시대 향교는 지방관과 지역 유림들의 각별한 관심 하에 운영되었었다. 그러나 韓末 이후 근대식 교육기관의 설립에 따라 향교 본래의 기능이 크게 약화되었고, 관청이 향교 재정을 직접 관리함으로써 향교가 재정 부족으로 퇴락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현풍향교의 경우 1914년에 있었던 행정 구역 개편으로 원래 향교를 관할하던 고을마저 사라진 상태였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현풍향교도 퇴락하였지만, 지역 유림들의 관심으로 어느 정도의 외형을 갖출 수가 있었다. 조선시대부터 향교가 교화의 장소로서, 그리고 지역 유림들의 향촌자치기구로서의 성격이 있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때도 유림들의 관심은 지속될 수 있었으며, 이들이 자금을 기부하거나 여러 방면의 노력을 기울여 그 외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일제강점기 향교의 본의가 크게 위축된 상황을 겪었음에도, 향교의 전통과 외형이 현재까지 지속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 된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990년 간행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현풍향교(玄風鄕校) 『사적록(事績錄)』 수록 1922년 김희근(金熙根) 「중수찬성기(重修贊成記)」

重修贊成記
余老且病杜門欽迹者久矣日自校宮有祭官之帖因念
無邑以未校中需用掃如籩豆之實其何以措備也
殿廡門墻又作如何樣也愷愷一念不以老病而小懈趁丁
駿發奔則殿柱之朽兩廡之圯倫堂敗瓦紅門頹柱隨
處迫補丹矆重新鞠草除斤宮墻煥秋且粢盛豊潔使參
祭者俾遂如神在之誠此莫非校任郭君鍾來衛道之
致也享畢問修理興享餘之費條條備錄洽滿千金自鄕
中欲引則君固請自當其義終不可逖嘻坐此狂瀾天地
不爲外誘耶奪而若心力思爲吾道致此誠非重義樂道
之君子其孰能之因諗于衆而記之俾來者有感爲
孔子誕降二千四百七十四年癸亥菊秋下浣
瑞興金熙根
西紀一九二二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