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慶尙北道 達城郡 소재 玄風鄕校의 東廡와 西廡를 重修한 후, 중수 경위와 의의를 기록한 달성군의 유림 金觀埴의 重修記
事績錄 玄風鄕校
자료의 내용
1918년 6월 慶尙北道 達城郡 소재 玄風鄕校를 중수 한 후, 달성군에 거주하던 유림 金觀埴이 작성한 重修記다. 본 자료는 1990년 현풍향교에서 필사본으로 간행한 『事績錄』에 수록되어 있다. 『事績錄』은 1758년부터 1990년까지 현풍향교 운영과 관련해서 작성된 각종 글들과 문서 등을 엮어 놓은 자료로, 1918년의 「鄕校東西廡重修記」는 그 중에서도 열일곱 번째로 수록되어 있다.
1918년에 작성된 김관식의 「鄕校東西廡重修記」에는 현풍향교 東廡와 西廡를 중수하게 된 경위와 의의가 언급되어 있는데, 특히 당시 현풍향교의 祠官이었던 郭炳坤의 공로를 높게 평가해 놓았다. 본문에서는 먼저 世級이 점점 변해, 지금의 학교는 煙祀하는 것을 대수롭게 여지기 않고 있으며, 絃誦은 禮에 맞지 않은데다가, 여러 가지 일을 때에 맞지 않게 실시하고 있어, 그 쇠퇴함이 심해져 지금 그것이 극에 달하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근래 향교의 퇴락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本郡의 향교는 과거 여러 차례 수리를 한 적이 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지금은 훼손된 상태여서 고을의 여러 인사들이 향교를 출입할 때마다 탄식을 금하지 못하고 있는 사정이라고 하였다. 예전에 重修를 한 적이 있으나, 그때는 財力이 부족해 완전히 마무리하지 못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東廡와 西廡는 비뚤어진 것이 심해 지탱하기 어려운 모습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수한 사실은 1914년에 있었던 현풍향교 중수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事績錄』에는 본 자료에 앞서 1914년의 「鄕校重修記」가 수록되어 있어, 그 전후 사정을 추정 할 수 있다. 이런 와중에 마침 현풍향교의 祀官, 즉 校任인 곽병곤이 이를 우려하여, 東廡와 西廡를 중수하였는데, 이때 곽병곤은 공사비용을 스스로 내어 놓았다고 한다. 이에 중수기에서는 지금 사람들이 一金의 돈도 아깝게 생각하는데, 그 수효를 고려하지 않고 鉅百金을 내어 놓으면서도 난색을 표명하지 않으니, 성현을 받들고 正道를 보존함이 매우 훌륭하다며 그의 공로가 높음을 칭송해 놓았다. 또 앞으로 하늘과 땅이 일어나 수리를 해야 될 때, 그 임무를 맡은 자가 곽병곤과 같으면 앞으로 향교는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곽병곤의 공로를 한 번 더 칭송하며, 중수기를 마무리하고 있다.
자료적 가치
일제강점기 향교 운영의 일면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일제강점기 향교는 재정적인 측면에서 많이 위축된 상태였다. 이미 韓末 지방에 설립되는 근대식 교육기관의 재정을 향교 재정에서 전용케 한 訓令이 있었으며, 이후부터는 재정 운영도 官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부터 향교 운영을 주도해 오던 지역 유림들의 의지가 없으면, 향교가 퇴락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현풍향교도 지역 유림들의 관심에 의해 1914년 중수된 적이 있으나, 재력이 부족해 동무와 서무의 중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런 와중에 1918년 교임이었던 지역 유림 곽병곤이 재산을 내어 공사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지역 유림의 관심은 재정적으로 크게 위축되던 일제강점기 지방의 향교가 그 전통을 고수하며 현재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