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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간행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현풍향교(玄風鄕校) 『사적록(事績錄)』 수록 1914년 김은식(金殷埴) 「향교중수기(鄕校重修記)」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WZ.1914.2771-20140630.Y1411007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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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경제-토목/건축-중수기
작성주체 이범익
작성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작성시기 1914
형태사항 크기: 38 X 27
판본: 필사본
수량: 1책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현풍향교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상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1990년 간행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현풍향교(玄風鄕校) 『사적록(事績錄)』 수록 1914년 김은식(金殷埴) 「향교중수기(鄕校重修記)」
1914년 윤5월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소재 현풍향교(玄風鄕校)를 중수한 후 작성한 기문(記文)이다. 작성자는 1914현풍향교의 교임(校任)을 맡고 있던 김은식(金殷埴)인데, 1914년은 독립된 고을이었던 현풍군(玄風郡)달성군에 편입된 해이다. 한편, 본 자료는 「향교중수기(鄕校重修記)」라는 제목으로 1990현풍향교에서 필사본으로 간행한 『사적록(事績錄)』에 수록되어 있다.
1914김은식이 작성한 「향교중수기」에는 현풍향교의 중수 경위와 의의를 간략히 언급해 놓았다. 1914년 봄 자신이 현풍향교의 교임을 맡았는데, 이때는 이미 향교의 여러 건물이 무너지고, 담장은 온전한 것이 없으며, 각종 제기(祭器)와 궤석(几席)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사정이라 하였다. 이는 19세기 후반부터 근대 교육정책이 시행됨에 따라 향교의 기능이 위축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에 김은식은 당시 달성군수(達城郡守)였던 이범익(李範益)과 함께 향교 건물의 중수를 의논하였는데, 이때 지역의 많은 유림이 자금을 모아 기부했다고 한다. 현풍향교 중수는 수십일 만에 완료되었고, 유림들의 건의에 따라 공사의 경위를 밝힌 본 기문을 자신이 작성하게 되었음을 언급해 놓았다. 이러한 현풍향교의 중수 경위는 일제강점기 근대식 교육의 확산으로 인해, 점차 위축되어 가던 향교의 운영 실태를 보여준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914慶尙北道 達城郡 소재 玄風鄕校 건물을 重修한 후, 중수 의의를 언급해 놓은 현풍향교 교임 金殷埴의 重修記
事績錄 玄風鄕校
자료의 내용
1914년 閏5월 慶尙北道 達城郡 소재 玄風鄕校를 중수 한 후, 당시 현풍향교의 校任이었던 金殷埴이 작성한 重修記다. 본 자료는 1990현풍향교에서 필사본으로 간행한 『事績錄』에 수록되어 있다. 『事績錄』은 1758년부터 1990년까지 현풍향교 운영과 관련해서 작성된 각종 글들과 문서 등을 엮어 놓은 자료로, 1914년의 「鄕校重修記」는 그 중에서도 열여섯 번째로 수록되어 있다. 한편, 본 자료에 앞서 1914년 당시 達城郡守였던 李範益의 「鄕校重修記」가 수록되어 있어, 비교 검토가 가능하다.
1914년의 「鄕校重修記」에는 현풍향교를 중수하게 된 경위와 의의가 언급되어 있다. 김은식의 중수기에서는 먼저 庠序學校의 전통은 三代시절부터 시작해 우리나라에 전해져, 500년 동안 右文의 가르침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라가 크게 한 번 변하여 학교가 차음 쇠약해지니 지금이 가장 극심하다고 개탄하고 있다. 갑오개혁과 일제강점 이후 근대식 교육기관의 설립으로 전통 교육기관이었던 향교가 위축되고 있음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달성군의 文廟, 즉 현풍향교는 세워진 지 오래되어, 전후에 혹 移建을 하기도 했으며, 혹 수리를 한 적이 있었지만, 수리한 시간이 또 오래되어 향교가 퇴락하니, 향교 건물은 무너진 곳이 많고, 祭器와 几席은 볼품이 없으며, 향교의 담장은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어, 오래된 옛 사찰에 들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실정이라고 하였다. 이에 지난 1914년 봄, 김은식 본인이 외람되게 學職, 즉 향교의 교임을 맡게 되어 향교 건물을 중수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당시 달성군수였던 이범익, 그리고 고을의 여러 유림들과 의논을 했다고 한다. 1914년은 독립된 고을이었던 玄風郡달성군으로 통합된 해로, 이 때문에 현풍향교 관리 소관이 달성군수가 되었던 것이다. 이때 의논한 결과 여러 유림들이 각자 힘써서 자금을 내어 중수 공사비용으로 보태게 되었는데, 모인 자금의 절반은 우선적으로 공사에 필요한 재목 구입과 장인을 고용하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현풍향교 중수 공사는 數朔만에 마무리 되었다. 공사가 끝난 후 여러 인사들이 새롭게 단장된 현풍향교에 모여 서로 기뻐하면서 이러한 노력은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야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교임이었던 김은식 본인이 그것을 맡게 되었다며, 중수기의 작성 경위를 밝혀 놓았다. 중수기 말미에는 여러 사람들이 도움을 주었지만, 그 중에서도 尹海均曺奉澤이 若干金의 자금을 더 내었음을 특별히 거론하며, 그 공로를 칭송하고 있다.
자료적 가치
일제강점기 향교 운영의 일면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본문에서는 세상이 크게 바뀌어 향교가 쇠락하였다고 했는데, 이는 근대화 과정에서 향교를 대신해서 세워진 근대식 교육기관의 설립을 뜻한다. 당시 정부는 향교의 재정을 근대식 교육기관의 재정으로 전용하였고, 이는 곧 향교의 재정 위축으로 이어졌다. 당시 현풍향교의 건물들이 퇴락하고 제기가 볼품없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한편, 1914현풍향교가 중수 될 때 지역 유림들이 뜻을 모아 자금을 기부한 것이 확인된다. 향교 운영의 활성화를 위해 지역 유림들이 자금을 기부하던 것은 조선시대 때부터 자주 확인되는 행위이다. 향교 중수와 같이 큰 공사가 있거나, 재정이 크게 위축되었을 때 지역 유림들이 이른바 儒錢을 모아 향교에 기부하였는데, 이는 조선시대 향교의 중요한 재정적 기반 중 하나였다. 본 자료에서 확인되는 유림의 기부 행위는 이러한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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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990년 간행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현풍향교(玄風鄕校) 『사적록(事績錄)』 수록 1914년 김은식(金殷埴) 「향교중수기(鄕校重修記)」

鄕校重修記
庠序學校自三代有之泊我東五百年右文之敎休明於
天下噫邦政一變學校校陵夷至於今日而極矣本郡
文廟之設己久前後或移建或修治及年歲之遠漸就
廢壞籩鼎几席欀桶墻壁無一完全卽文者如入古院廢
寺使人有要膂絶之歲甲寅殷埴猥參學職思耶
以重葺乃謀於李侯範益氏收議於鄕之諸父老皆曰善
人名隨其力出金有差凡得幾千餘繦以其半購材用雇
匠杇以暯春經始閱若于朔而洗手觀者見其整治鮮明

一復諸舊可以得神人之悅豫也咸曰是宜有記窍惟起廢
修壞有職之常不足爲勞而今是役也力不出於民而居
然以就傳耶謂如羕而華有終者乎其不可不書以
爲來者効其損助若于員別自有錄而尹君海均曺君
奉澤
又有別補若于金以爲殿廡籍子改飾資
是亦可書也
是歲閏五月日金殷埴
西紀一九一四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