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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간행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현풍향교(玄風鄕校) 『사적록(事績錄)』 수록 1897년 현풍향교 「군유대소사성폐량성지자관비공실(郡有大小祀性弊粱盛之自官備供實)」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WZ.1897.2771-20140630.Y1411007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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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교육/문화-문학/저술-기
작성주체 현풍향교
작성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작성시기 1897
형태사항 크기: 38 X 27
판본: 필사본
수량: 1책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현풍향교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상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1990년 간행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현풍향교(玄風鄕校) 『사적록(事績錄)』 수록 1897년 현풍향교 「군유대소사성폐량성지자관비공실(郡有大小祀性弊粱盛之自官備供實)」
1897년 8월 경상북도(慶尙北道) 현풍군(玄風郡) 소재 현풍향교(玄風鄕校)의 교임(校任)들이 작성한 일종의 기문(記文)이다. 현풍군수(玄風郡守) 홍필주(洪弼周)의 공로를 기리는 내용인데, 현풍향교의 교임(校任)이었던 도유사(都有司) 전(前) 감역(監役) 김희연(金熙衍), 장의(掌議) 김희계(金熙㴤), 곽종현(郭鍾玄) 명의로 작성되었다. 본 자료는 1914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으로 편입된 현풍향교에서, 1990년 필사본으로 간행한 『사적록(事績錄)』에 수록되어 있다.
자료는 「군유대소사성폐량성지자관비공실(郡有大小祀性弊粱盛之自官備供實)」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제목 그대로 관의 향교 의례 지원 사실을 언급해 놓았다. 이에 따르면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정부의 향교 정책에 변화가 생겨, 각 고을의 크기를 나누어 향사 비용을 직접 교부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현풍군은 4등 군으로 분류되어 모두 80원(圓), 예전 화폐인 상평전(常平錢)으로는 400냥을 교부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봄과 가을 행해지는 향사(享祀) 때마다 각각 200냥을 군청에서 지급받았지만, 그 돈이 매우 부족하여 예전처럼 향사를 치르기가 쉽지 않음을 호소하고 있다. 갑오개혁 이후 근대식 교육기관을 설립하기 위해, 정부는 향교 재정을 통제하여 그것을 근대식 교육기관 재정으로 전용하였고, 이는 곧 향교 재정의 위축으로 이어져 향사 거행의 어려움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에 현풍군의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고 있었는데, 마침 홍필주현풍군수로 부임하여 향교의 어려움을 보고 자신의 봉급 가운데 50금(金)을 기부해, 향사 비용에 보충하게 되었다고 한다. 거기다 그친 것이 아니라 봄과 가을 향사 때마다 군청에서 40금을 추가로 교부해주니, 예전의 향사 의례를 조금 회복하는데 도움이 되었음을 칭송해 놓았다. 한말 근대화의 흐름 속에 변화된 향교 운영 실태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97慶尙北道 玄風郡 소재 玄風鄕校 校任들이 녹봉을 덜어 현풍향교에 기부한 玄風郡守 洪弼周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작성한 글
事績錄 玄風鄕校
자료의 내용
1897년 8월 慶尙北道 玄風郡 소재 玄風鄕校 校任들이 작성한 일종의 記文이다. 자료의 제목은 「郡有大小祀性弊粱盛之自官備供實」로 엮여져 있으며, 당시 교임이었던 都有司 前 監役 金熙衍, 掌議 金熙㴤, 郭鍾玄 명의로 작성되었다. 본 자료는 1914慶尙北道 達城郡으로 편입된 현풍향교에서, 1990년 필사본으로 간행한 『事績錄』에 수록되어 있다. 『事績錄』은 1758년부터 1990년까지 현풍향교 운영과 관련해서 작성된 각종 글들과 문서 등을 엮어 놓은 것이다. 1897년의 「郡有大小祀性弊粱盛之自官備供實」은 그 중에서 열세 번째로 수록되어 있다.
「郡有大小祀性弊粱盛之自官備供實」에는 官에서 향교 享祀를 지원한 사실이 요약되어 있다. 특히 玄風郡守였던 洪弼周의 공로를 높게 평가해 놓았다. 본문에서는 먼저 왕조가 세워진 지 500년 만에 更張이 있어, 節用하는 원칙에 따라 4등 군에 80圓, 常平錢으로 환산해 400냥을 享祀 비용으로 지급하고 있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향교 운영에 변화가 생겼으며, 군의 규모에 따라 향사 비용을 지방 관청이 직접 지급하였는데, 현풍군은 4등 군으로 분류되어 400냥을 지급 받았던 것이다. 이에 매년 봄과 가을에 각각 200金을 관청에서 받아 향사 의례를 준비하게 되었으나, 여러모로 부족해 예전처럼 의례를 행하기가 쉽지 않음을 호소하고 있다. 재력의 부족으로 향사 봉행이 쉽지 않아 고을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고 있었는데, 마침 현풍군수홍필주가 부임함에 성인을 존경하고 正道를 호위하는데 뜻을 두어, 향교 활성화를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먼저 聖殿을 중수하였으며, 봉급 가운데 50金을 내어 향사 비용의 부족한 것을 보태게 했고, 또 봄과 가을 향사 때마다 郡廳에서 40金을 더 보태어주어 보충하니, 예전의 의례를 조금 회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홍필주가 내어준 재물은 비록 많은 것은 아니나, 그 뜻은 매우 크다고 칭송하였다. 이에 향후 우리 고을 사람들이 서로 彛倫의 가르침을 勉勵하고, 제사의 의례를 밝게 하여, 후세에게 모범이 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자료 말미에는 홍필주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본 글을 쓰게 되었다며, 자료의 작성 경위를 밝혀 놓았다.
자료적 가치
韓末 향교 운영의 일면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향교의 가장 큰 의례 중 하나는 봄과 가을에 행해지는 享祀였다. 조선시대 향사는 향교의 자체적인 재산을 활용하기도 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官의 지원을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정부의 새로운 교육 정책에 따라 향교의 재정은 크게 위축된다. 특히 1896년에는 향교의 재정을 국가에서 통제하는 것으로 규정하였으며, 점차 근대식 교육기관에 향교 재정을 전용해 나갔다. 따라서 본 자료에서처럼 현풍향교의 향사 비용도 지방관의 통제를 받아, 원래보다 부족한 금액을 교부 받았던 것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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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간행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현풍향교(玄風鄕校) 『사적록(事績錄)』 수록 1897년 현풍향교 「군유대소사성폐량성지자관비공실(郡有大小祀性弊粱盛之自官備供實)」

郡有大小祀性弊粱盛之自官備供實
聖朝五百年瑊典也一自邦政更張務從節用四等郡以八十
圓銀錢【常平錢四百兩】定爲享祀費每春秋劃付二百金於郡枝
使備祀儀不官以而枝有欠典重而物又不足難倣舊儀郡
人之方深以爲憂者也時値洪侯弼周之來守是邦越明年
政通廢興凡係官一鮮莫不修葺放尊聖衛道之方尤有耶
惓惓聖殿之重修而捐俸五十金以助之享費之不足而又自郡廳
措劃每春秋定爲四十金補例庶使祀禮稍存舊儀則候之
物雖不多而侯之意豈淺淺乎哉鳴呼今天下懩襄矣凡我
郡人幸相勉勵講彛倫之敎明祭祀之義使吾苞山一區求有
辭於天下後世則於是乎侯之功誠有耶不忘云爾是爲識
丁酉八月日
都有司前監役金熙衍
掌儀金熙㴤
郭鍾玄
高宗三四年光武二年西紀一八九七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