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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간행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현풍향교(玄風鄕校) 『사적록(事績錄)』 수록 1872년 김용제(金用濟) 「향교중수기(鄕校重修記)」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WZ.1872.2771-20140630.Y1411007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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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경제-토목/건축-중수기
작성주체 김용제
작성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작성시기 1872
형태사항 크기: 38 X 27
판본: 필사본
수량: 1책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현풍향교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상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1990년 간행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현풍향교(玄風鄕校) 『사적록(事績錄)』 수록 1872년 김용제(金用濟) 「향교중수기(鄕校重修記)」
1872년 2월 경상도(慶尙道) 현풍현(玄風縣) 소재 현풍향교(玄風鄕校) 건물을 중수(重修)한 후, 지역 유림이었던 김용제(金用濟)가 지(識)하고, 엄종우(嚴鐘祐)가 서(書)한 중수기(重修記)다. 본 자료는 1914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으로 편입된 현풍향교에서, 1990년 필사본으로 간행한 『사적록(事績錄)』에 수록되어 있다.
김용제가 지(識)한 「향교중수기(鄕校重修記)」에는 1872년 향교 건물 중수가 진행된 경위와 그 의의가 간략히 언급되어 있다. 중수기에 따르면 삼대(三代) 때부터 상서학교(庠序學校)를 세워 지방 교화에 힘썼으니, 지금의 향교는 그 전통을 계승한 것이기에 매우 중요한 것임을 전제해 놓았다. 이에 나라에서 각 고을에 위치한 향교 건물을 중수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현풍현의 경우 작은 고을이어서 향교 재력의 부족으로 제대로 중수 공사를 할 수 없는 실정임을 한탄하고 있다. 특히 성전(聖殿)의 동무(東廡), 명륜당(明倫堂),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건물이 노후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역 유림들이 의견을 모으고 재물을 내어서, 1871년 8월부터 향교 중수 공사를 시작해 1872년 2월 마무리 하게 되었으니, 향후 우리 고을 유림들이 뜻을 모아 삼대(三代)의 풍속을 회복하자며, 중수 공사의 경위와 의의를 언급해 놓았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72慶尙道 玄風縣 소재 玄風鄕校 건물을 重修한 후, 중수 의의를 언급해 놓은 현풍현 출신의 유학자 金用濟의 重修記
事績錄 玄風鄕校
자료의 내용
1872년 2월 慶尙道 玄風縣 소재 玄風鄕校를 重修 한 후, 현풍현 출신의 유학자 金用濟가 識하고, 嚴鐘祐가 書한 重修記다. 본 자료는 1914慶尙北道 達城郡으로 편입된 현풍향교에서, 1990년 필사본으로 간행한 『事績錄』에 수록되어 있다. 『事績錄』는 1758년부터 1990년까지 현풍향교 운영과 관련해서 작성된 각종 글들과 문서 등을 엮어 놓은 것이다. 1872년의 「鄕校重修記」는 그 중에서 열 번째로 수록되어 있다.
김용제가 識한 「鄕校重修記」에는 간략한 공사 경위와 중수 의의를 언급하고 있는데, 우선 『孟子』 「滕文公」 章句上에 수록된 "設爲庠序學校 以敎之 庠者 養也 校者 敎也 序者 射也 夏曰校 殷曰序 周曰庠(庠序學校를 설치하여 가르쳤으니 庠은 봉양한다는 것이요, 校는 가르친다는 것이요, 序는 활쏘기를 익힌다는 것이다. 夏나라에서는 校라고 하였고, 殷나라에서는 序라 하였으며, 周나라에서는 庠이라 하였다.)"라는 구절을 요약 인용해 놓았다. 지방에 건립된 향교도 三代 때부터 내려져 온 학교 설립의 전통이기 때문에, 그만큼 사체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더구나 근래에 聖殿과 黌堂을 重修하고, 또 지방 列邑에 명하여 향교를 중수케 해서, 列邑이 각별히 봉행하고 있음을 밝혀 놓았다. 그러나 현풍현은 고을이 凋殘하고 物力이 적어, 향교 건물 가운데 聖殿의 東廡, 明倫堂, 東齋와 西齋가 노후하였음에도 중수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실로 우리 고을 章甫의 責任이며, 향교 有司의 일임을 통감하고 있다. 이에 功役을 위해 재력과 의견을 모아 공사를 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중수 공사는 1871년 8월에 시작되어 1872년 2월에 끝났다. 향교의 여러 건물이 새롭게 중수되었으니, 향후 고을의 유림들이 모두 三代의 풍속을 유지할 것을 다짐하며, 기문을 마무리 하고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향교 운영의 일면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조선후기 향교는 지방의 공립교육기관임과 동시에 재지사족들의 향촌사회활동 기구였다. 수령의 통제와 관리를 받았지만, 재지사족들의 영향력도 강하였다. 이에 향교 건물이 퇴락하여 중수가 필요할 때마다, 재지사족들이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특히 각 문중별로 기부, 이른바 儒錢을 통해 재력을 마련한 뒤, 중수 공사를 실시하였는데, 1872현풍향교 중수 공사 사례도 이와 같은 배경에서 진행된 것으로 여겨진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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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간행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현풍향교(玄風鄕校) 『사적록(事績錄)』 수록 1872년 김용제(金用濟) 「향교중수기(鄕校重修記)」

鄕校重修記
鄒孟氏有言設爲庠序學校以敎之曰序〖校〗曰校〖庠〗
庠序校皆鄕學也我東鄕學命之曰鄕校從之義
也庠以養老序以習射校以敎人而敎之爲言可以包養
老習射則三代之敎顧不盡在於校歟掎歟大東崇儒重

道郁郁乎文至於列邑學宮亦取校命名之義重煕累
洽式至于今上自大學首善之地重修聖殿黌堂又命
列邑幷修鄕校是誠日重光月重輪之鴻休也淮時列邑恪
謹奉行而惟我玄風則小如斗物力彫殘聖殿之東廡明倫堂
東西齋皆老屋支柱不可以時月維徵朝令固吾鄕章甫
之責也有司之事也夫廢興由時功役以財幹辨在任僉議
克協乃以辛未八月日始事至壬申二月日訖功自東廡以至
明倫堂東西齋皆除舊更新煥然改觀噫重修校宮者耶以重
修文敎也而重修之實又有功於此者身亦可以重修心亦可以重
修今日修明日修重之又重是謂重修身心之道而豈非校
之耶以敎人之義歟若爾則三代之風庶幾重回於吾鄕矣
上之九年壬申二月下澣鄕後學金用濟
高宗九年西紀一八七二年嚴鐘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