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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간행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현풍향교(玄風鄕校) 『사적록(事績錄)』 수록 1865년 이정두(李廷斗) 「향교소학강식기(鄕校小學講式記)」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WZ.1865.2771-20140630.Y1411007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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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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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교육/문화-문학/저술-기
작성주체 이정두
작성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작성시기 1865
형태사항 크기: 38 X 27
판본: 필사본
수량: 1책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현풍향교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상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1990년 간행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현풍향교(玄風鄕校) 『사적록(事績錄)』 수록 1865년 이정두(李廷斗) 「향교소학강식기(鄕校小學講式記)」
1865년 1월 경상도(慶尙道) 현풍현(玄風縣)의 수령인 이정두(李廷斗)가 작성한 기문(記文)으로, 본 자료는 1914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으로 편입된 현풍향교(玄風鄕校)에서, 1990년 필사본으로 간행한 『사적록(事績錄)』에 수록되어 있다. 「향교소학강식기(鄕校小學講式記)」는 당시 현풍현감(玄風縣監)이었던 이정두가 우리나라 유학의 오랜 연원과 『소학(小學)』 강학(講學)의 전통을 거론하며, 현풍향교에서 오랫동안 중지되었던 『소학』 고강(考講)을 다시 실시하는 당위성과 의의를 언급해 놓았다. 특히 이정두김굉필(金宏弼)을 비롯해 『소학』을 강학했던 여러 유현(儒賢)을 거론하며, 자신의 현조(顯祖)인 이관(李琯)이유수(李幼洙)의 학문적 업적도 함께 칭송하였다. 이관은 일명 종실(宗室)의 공맹(孔孟)으로 불리며 서울에서 후학들에게 『소학』을 가르쳤고, 이유수창평현령(昌平縣令) 재임 시절 학교 융성과 인재 육성에 전념하여 백성들에게 칭송 받은 행적을 소개하고 있다. 즉 현풍이라는 고을은 『소학』의 강학을 누구보다 강조했던 김굉필이 학문 활동을 한 고을이며, 자신은 또한 수령으로 향교 육성에 힘을 기울였던 이유수의 후손이기 때문에, 자신이 부임한 현풍현의 향교에서 『소학』 고강을 실시함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65慶尙道 玄風縣玄風縣監으로 있던 李廷斗玄風鄕校에서 『小學』 考講을 실시하며 작성한 記文
事績錄 玄風鄕校
자료의 내용
1865년 1월 慶尙道 玄風縣의 수령으로 있던 李廷斗가 작성한 記文이다. 본 자료는 1914慶尙北道 達城郡으로 편입된 玄風鄕校에서, 1990년 필사본으로 간행한 『事績錄』에 수록되어 있다. 『事績錄』은 1758년부터 1990년까지 현풍향교 운영과 관련해서 작성된 각종 글들과 문서 등을 엮어 놓은 것이다. 1865년의 「鄕校小學講式記」는 그 중에서 아홉 번째로 수록되어 있다.
「鄕校小學講式記」를 작성한 이정두1864玄風縣監으로 부임한 인물로, 현풍향교에서 『小學』 考講을 실시하며, 본 記文을 작성하였다. 記文에서는 우리나라 여러 先賢들의 행적을 들며 『小學』을 공부해야 되는 이유와 그것을 考講하는 당위성을 언급해 놓았다. 특히 이정두 본인의 현조인 李琯(1518~1577)과 李幼洙(1591~1656)의 행적을 중점적으로 거론하며, 은연중에 家學의 淵源을 자부하고 있다. 기문에서는 먼저 지난 明宗宣祖 연간에 활동했던 유학자이자 자신의 현조인 李琯의 업적을 거론하였다. 李琯서울 鑄字洞에 학교를 설치하고 六經을 강의했는데, 그 중에서도 『小學』을 가장 우선으로 삼아, 從遊하던 300여 인에 달하던 선비들이 李琯를 宗室의 孔孟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또한 李琯는 어려서부터 李深源의 堂姪인 李仲虎와 執友하며 만년에는 李滉을 私淑했다고 한다. 또한 자손들에게 명을 내려 金誠一, 柳成龍과 ‘道義之交’를 맺게 했다며, 家學의 淵源을 거론한 뒤, 李琯가 今世의 師道를 지킨 인물이라고 평가한 李瀷의 말을 인용해 놓았다. 이어 金宏弼이 『小學』을 법도로 삼으니, 이어 趙光祖, 李彦迪, 李滉, 柳成龍, 그리고 李仲虎도 여기서 자신들의 학문이 비롯되었다며, 『小學』 강학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李琯가 평소 처신을 함에 『小學』와 『家禮』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許曄의 칭송을 인용하며, 李琯의 학문적 업적과 연원을 기리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 지금 현풍향교에서 春場을 실시함에 오랫동안 『小學』의 試講이 폐지된 것을 개탄하였다. 현풍金宏弼이 倡學했던 고을임에도 불구하고 『小學』의 考講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장차 엄정하게 『小學』을 考講하여 句讀文義에 透徹하지 못한 자는 赴擧를 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어 자신의 현조인 李幼洙昌平縣令을 역임할 때에 興學과 인재 양성을 급선무로 하니, 儒化가 大成하여 士民이 서로 稱賀한 사실을 거론하면서, 그의 儒化가 一國이 아닌 一邑에 미친 것이 아쉽다는 權大載의 말을 인용해 놓았다. 자신이 興學에 힘썼던 李儒洙의 자손이기 때문에 수령이 된 지금, 그 전통을 계승하여 『小學』을 考講함이 마땅하다는 당위성을 강조하며, 기문을 마무리 하고 있다. 한편, 『事績錄』의 본 자료 앞에는 1864년 「鄕校倡學記」가 수록되어 있는데, 역시 이정두가 작성한 기문이다. 해당 기문에는 1865년 봄 『小學』 考講 실시를 예고하고 있어, 考講의 경위를 살펴보는데 참고가 된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향교 강학 활동의 사례를 확인 할 수 있는 자료다. 향교는 지방의 공립교육기관으로 향교 활성화는 수령 考課 중 興學과 관련된 것이기에, 뜻있는 수령들은 향교 운영 개선과 강학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본 자료에서 현풍현감 이정두가 제시한 현풍향교에서의 『小學』 考講도 그러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자료 본문에서 이정두현풍향교에서의 考講이 오랫동안 중지되었음을 개탄하고 있다. 이는 조선후기 향교에서의 강학 활동이 제대로 실시되지 않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避役이나 신분상승을 도모하는 부류들이 향교에 投託하여, 강학 활동이 무색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또는 지방관의 노력으로 投託한 校生을 軍役에 충당시켜 강학 장소로서의 본질을 회복시키려 했는데, 현풍현감 이정두가 『小學』 考講에서 透徹하지 못한 자를 赴擧하지 못하게 한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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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990년 간행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현풍향교(玄風鄕校) 『사적록(事績錄)』 수록 1865년 이정두(李廷斗) 「향교소학강식기(鄕校小學講式記)」

鄕校小學講式記
昔在際先祖順川君渾溪先生設塾鑄字
興起斯文講明吾道傳六經之學其學以小學爲先一
爲準樞衣從遊者三百餘人士稱宗室
少時與朱溪君堂姪履素齋先生爲執友及見道之益
高乃事之以師禮晩年私淑退溪李子命子姪從遊使與
西崖鶴峯先生爲道義之交星湖李先生順川君
折輩行就弟子之列可表以出之今世師道湮滅敎耶徃
而不明苟使志學之士用此爲心將無耶徃而不得也旨哉
言乎昔寒暄堂先生小學爲繩墨後如靜菴晦齋退溪
寒岡眉叟許子出於此學也如柳西峯履素齋
出於此學也草堂許先生順川君平居律身治家一
小學家禮行之無少遺餘世俗笑侮一毫不入於念也

先祖順川君亦出於此學也今當春場慨然有小學
試講之久廢將嚴正考講句讀文義之不能透徹者使不
得赴擧其意有耶咸發興起者然也况寒暄堂夫子
學之鄕小學試講豈敢廢乎昔先祖梧洲先生當仁
孝間莅昌平縣以興學校作人材爲先務於是儒化
大成於內士民相賀稱爲召杜權艮隱大載曰惜乎
公之惠未得施於一邦而專於一邑也先祖梧洲公
治化斯可謂爲守令當學者也況爲子孫者其可不奉
遵先訓乎於是記與後來居官者永爲小學講定
式焉
上之二年乙丑正月日
後學縣監完山李廷斗謹記
高宗二年西紀一八六五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