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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간행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현풍향교(玄風鄕校) 『사적록(事績錄)』 수록 1857년 김우동(金祐東) 「향교중수기(鄕校重修記)」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WZ.1857.2771-20140630.Y1411007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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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경제-토목/건축-중수기
작성주체 김우동
작성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작성시기 1857
형태사항 크기: 38 X 27
판본: 필사본
수량: 1책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현풍향교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상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1990년 간행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현풍향교(玄風鄕校) 『사적록(事績錄)』 수록 1857년 김우동(金祐東) 「향교중수기(鄕校重修記)」
1857경상도(慶尙道) 현풍현(玄風縣) 소재 현풍향교(玄風鄕校)의 중수(重修) 기록으로, 본 자료는 1914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으로 편입된 현풍향교에서, 1990년 필사본으로 간행한 『사적록(事績錄)』에 수록되어 있다. 「향교중수기(鄕校重修記)」는 1857현풍향교 건물을 새롭게 중수한 후, 지역 유림이었던 김우동(金祐東)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글자는 곽수곤(郭壽坤)성한규(成漢奎)가 작성하였다.
「향교중수기(鄕校重修記)」에는 현풍향교가 중수되는 경위와 의의가 언급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근래에 향교 건물이 퇴락하여 대성전(大聖殿)의 기둥이 기울고, 명륜당(明倫堂)과 양무(兩廡)의 창과 벽은 무너지고 부서진 상태라 하였다. 또한 의례와 관련된 각종 제복(祭服)과 기물(器物)을 잃어버리고, 삼문(三門), 포(庖), 고(庫)는 비가 새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향교의 재정 상황이 넉넉하지 못해 보수하지 못하고 있음을 호소하고 있다. 이때 새로 부임한 현풍현감(玄風縣監) 김두흠(金斗欽)이 관의 여전(餘錢)과 자신의 녹봉을 기부하여 향교 중수에 사용하게 하였다. 이에 지역 유림들도 의논을 모아 각 문중에서, 이른바 유전(儒錢)이라는 기부금을 내어 중수 비용에 보충하니, 500여 금(金)이 모이게 되었다. 이 자금으로 중수 공사가 시작되어 수개월 만에 끝나자 다시 위패를 봉안하였고, 그날 유림들이 모여 향음례(鄕飮禮)를 행하였다고 한다. 이때 본 중수기를 작성한 金祐東이 술잔을 받들고 나아가 여러 유림들에게 향교 중수를 지시한 현풍현감 김두흠의 업적을 칭송하였고, 유림들이 의논하여 이상의 경위를 기문(記文)으로 남기기로 합의했다며, 향교 중수의 경위를 밝혀 놓았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57慶尙道 玄風縣 소재 玄風鄕校 건물을 重修한 후, 중수 경위와 의의를 기록한 玄風縣 출신의 유학자 金祐東의 重修記
事績錄 玄風鄕校
자료의 내용
1857慶尙道 玄風縣 소재 玄風鄕校를 重修 한 후, 현풍현 출신의 유학자 金祐東이 識하고, 金麟坤成漢奎가 書한 重修記다. 본 자료는 1914慶尙北道 達城郡으로 편입된 현풍향교에서, 1990년 필사본으로 간행한 『事績錄』에 수록되어 있다. 『事績錄』는 1758년부터 1990년까지 현풍향교 운영과 관련해서 작성된 각종 글들과 문서 등을 엮어 놓은 것이다. 1857년의 「鄕校重修記」는 그 중에서 여섯 번째로 수록되어 있다.
金祐東이 識한 「鄕校重修記」는 1857현풍향교가 重修되는 경위와 의의를 언급해 놓았다. 우선 「鄕校重修記」의 찬자인 金祐東東漢 鍾離意의 고사를 들고 있다. 종리의魯나라丞相이 되었을 때 돈 십만을 내어 闕里에 있는 孔子의 옛 집을 중수하였고, 廟廷을 보수하는 등 새롭게 정돈하니 魯나라의 儒風이 다시 회복되었다는 고사다. 이 전통은 우리나라에도 계승되어 저 멀리 箕子가 8조금법을 만들어 교화한 것을 시작으로 鄒魯의 고을처럼 아름다운 풍속이 이루어져, 위로는 나라의 庠에서부터 아래로는 시골의 鄕學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자의 廟廷이 세워졌으니, 비록 규모는 같지 않으나 威儀의 근엄함은 동일하다고 하였다. 향교에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전통이 매우 오래되었음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현풍 고을의 땅은 협소하여 향교에 나누어준 것이 적어 평소에도 凋殘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고 한다. 근래에 그것은 점점 심해져 大聖殿의 기둥은 썩어 벽에 기대어 있고, 兩廡와 明倫堂의 창과 벽은 퇴락하거나 부셔졌으며, 각종 籩豆, 祭服, 爵과 燭은 잃어버린 것이 적지 않은데다가, 三門과 庖, 庫는 비가 새어 온 고을의 유림들이 안타까워하고 있으나, 이것을 보수할 바탕이 아무 것도 없어 어떤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음을 호소하고 있다. 이때 다행히 縣監 金斗欽이 부임하여 聖殿에 배알하고 향교 건물을 두루 살펴 본 후, 諸生들과의 회의에서 탄식하며, 향교가 이 지경이 된 것은 전적으로 수령의 책임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에 김두흠은 官의 餘錢 250緡과 자신의 녹봉 20金을 내어 수리하는 비용으로 보충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자 고을 유림들도 각 문중에서 儒錢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내니 500餘金이 모이게 되었다. 모인 자금으로 공사를 시작하여 수개월 만에 중수를 마치고 위패를 다시 봉안하였으며, 그 날에 諸生들과 鄕飮禮를 행하였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金祐東 자신이 잔을 받들고 나아가 諸生들에게 지금의 태수인 김두흠은 예전 魯나라丞相과 같은 업적이 있음을 칭송하였다. 이어 우리 현풍공자의 학문을 계승하였고, 金宏弼의 儒風을 이어 받아 작은 고을임에도 仁義가 가득하게 되어, 洙泗와 閩洛의 학풍이 있게 되었음을 자부하며 이상의 경위를 記文으로 남기기로 결정하였음을 밝혀 놓았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향교 운영의 일면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향교의 중요한 재정적 기반으로는 전답과 노비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중에서도 기부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수령들은 興學을 명분으로 자신들의 녹봉을 기부하거나 관의 재정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는 뜻있는 수령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향교의 활성화가 考課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수령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갖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관권의 지원 이외에도 중요한 기부가 바로 지역 유림들에 의해 납부되는 이른바 儒錢이 있다. 향교가 지역 유림들의 교육기관일 뿐만 아니라, 이들의 신분 지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기구였기 때문에, 儒錢 납부를 통해 향교의 사회적 기능을 유지시켜 나가려 했었다. 1857현풍향교현풍현감의 관심에서 비롯된 지원과 지역 유림들의 합의에 의해 납부된 儒錢으로 중수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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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간행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현풍향교(玄風鄕校) 『사적록(事績錄)』 수록 1857년 김우동(金祐東) 「향교중수기(鄕校重修記)」

鄕校重修記
東漢鍾離意丞相出錢十萬入闕里夫子
舊宅重修廟庭補葺車書拭劍理舃鋤草藏壁使宮
墻潤色位置整頉自足之後之儒風復振若是乎
右君子尊聖之誠也不覺景慕於千載之下也粤惟我
東方雖僻在海外服箕師八條之敎被聖朝
百年之化禮樂文物不讓於中華幷美於上自
國庠下至鄕學皆立夫子之廟殿廡門墻雖有庠

校之差殊而尊奉禮貌一體威儀之謹嚴顧此玄都
之地壤偏以校宮之排鋪素殘挽近以來漸至凋弊
聖殿則朽棟依壁兩廡倫堂則頹窓破壁至於籩
豆祭服爵燭三門庖庫閪失滲漏其勢將至放莫可收
拾一鄕章甫相興恐惧憂歎思耶以抶傾補毁而白地
經紀將無異於寸之支履雙手之擎天則都付斯
文顯晦之時學舍廢與之數矣何幸金侯斗欽氏下車
之初拜謁聖廟周覽形止與諸生會議咨嗟咸慨
曰此庸非守宰責耶修理之役擔着爲己任先劃官
餘錢二百五十緡且損目俸二十金許爲修理補用資又以
官餘錢折半付之枝宮年年需用永爲定式於是一邑人
士莫不感義效誠各出門錢且排儒錢合而至五百餘金
鳩財幕工樂事勸功不數月匠役告訖古制重新祗奉
聖位安于故座是日設酌落之依鄕飮之儀行旅酬
之禮明侯端坐諸生環列揖讓周旋獻酬交錯寔斯文
之盛擧也士林之大慶也末學金祐東執爵而進曰今
之太守卽右之也出錢興學異也同符椅歟盛哉
吾侯之功也因又相揖告誠曰恭惟我文敬公老先生得

之學壁之室而餘韻遺化培養
薰陶道學忠孝之賢輩出於十室之鄕蕞爾苞山
蔚然爲仁義道德之林而直與洙泗閩洛匠美千古
夫子之道未墜於地而尢盛於吾鄕者也今幸以明府尊聖之
誠殿于肅淸溽儀利成吾黨浚生惟堂勉勉諄諄各
自策勵沐浴時耶之化薰襲春風之和人人而服詩
禮之行家家而間絃誦之聲講明吾夫子之道遵守
文敬公之敎成就英才有如之賢儒氏則豈非
是校之幸而無員吾侯之至意也耶諸生曰諾是爲
之記
上之七年丁巳七月日
哲宗八年西紀一八五七年金祐東
郭麟坤
成漢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