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9년 慶尙道 玄風縣 소재 玄風鄕校 건물을 重修한 후, 중수 경위와 의의를 기록한 玄風縣 출신의 유학자 成大魯의 重修記
事績錄 玄風鄕校
자료의 내용
1819년 慶尙道 玄風縣 소재 玄風鄕校를 重修 한 후, 현풍현 출신의 유학자 成大魯가 記하고, 郭壽翼이 書한 重修記다. 본 자료는 1914년 慶尙北道 達城郡으로 편입된 현풍향교에서, 1990년 필사본으로 간행한 『事績錄』에 수록되어 있다. 『事績錄』는 1758년부터 1990년까지 현풍향교 운영과 관련해서 작성된 각종 글들과 문서 등을 엮어 놓은 것이다. 1819년의 「鄕校重修記」는 그 중에서 세 번째로 수록되어 있다.
성대로가 記한 「鄕校重修記」는 1819년 현풍향교가 重修되는 경위와 의의를 언급해 놓았다. 우선 「鄕校重修記」에서는 지난 1758년 玄風縣監 金光泰에 의해 향교 移建이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당시 향교 건물이 퇴락하자, 김광태와 지역 유림들은 그 원인으로 입지 조건이 좋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현재의 위치로 향교를 이건했던 것이다. 이때의 이건 과정에 대해서는 『事績錄』에 수록된 「大成殿重修上樑文」과 「聖廟移建記」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는데, 두 편 모두 김광태가 작성하였다. 향교 이건 후 오랫동안 비바람으로 입는 손상이 과연 적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李鐸遠이 현풍현감으로 재임하고 있는데, 백성을 너그럽게 위무하고 선비들을 예로 대하며, 소송이 줄어들고 오랜 폐단이 없어지고 있다며 그 업적을 칭송하고 있다. 이탁원은 1816년부터 1820년까지 현풍현감을 역임했던 인물로 1819년의 향교 중수를 지시했던 인물이다. 이 무렵 학생들이 향교를 奉審하였는데, 東廡의 기둥과 神門의 서까래가 썩었으며, 明倫堂의 기와는 기울어지고, 東齋와 西齋의 처마가 무너져 있는데다, 바람에 향교의 齋寮 수 칸이 전복되어 여기저기 흩날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이에 지역 유림들이 重修를 모의하여 공사 자금을 모금하였고, 현풍현감 이탁원이 자신에게 공사의 관장을 맡겼다며, 중수 경위를 밝혀 놓았다. 그리고 중수 공사를 진행하는데 있어 移安祭는 2월 6일에 거행했다고 한다. 이안제 이후 공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썩은 기둥은 새롭게 세우고 서까래의 꺾임은 바로 잡았으며, 기와는 보수하고 庖와 庫는 예전처럼 띠 집으로 만들었다. 공사가 끝나고 3월 20일 還安祭가 거행되었는데, 많은 유생들이 서로 기뻐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성대로는 여러 유생들에게 옛날에도 改修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자금이 없어 이루지 못하였으나, 다행히 지금 이루어 내었으니 자제들로 하여금 향교에서 열심히 학문을 닦도록 이끌 것을 당부하였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향교 운영의 일면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현풍향교에서 성대로를 비롯한 지역 유림들은 향교 중수를 위한 자금을 모았지만, 현풍현감이었던 이탁원의 지시를 받은 이후에 향교 건물을 중수하였다. 이는 실질적으로 향교가 지방 유림들 주도로 운영되고 있었지만, 지방 공립교육기관이었기 때문에 관권의 결정과 협조 하에 통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