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1990년 간행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현풍향교(玄風鄕校) 『사적록(事績錄)』 수록 1759년 김광태(金光泰) 「성묘이건기(聖廟移建記)」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WZ.1759.2771-20140630.Y1411007001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경제-토목/건축-중수기
작성주체 김광태
작성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작성시기 1759
형태사항 크기: 38 X 27
판본: 필사본
수량: 1책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현풍향교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상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1990년 간행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현풍향교(玄風鄕校) 『사적록(事績錄)』 수록 1759년 김광태(金光泰) 「성묘이건기(聖廟移建記)」
1759경상도(慶尙道) 현풍현(玄風縣) 소재 현풍향교(玄風鄕校)의 이건 기록으로, 본 자료는 1914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으로 편입된 현풍향교에서, 1990년 필사본으로 간행한 『사적록(事績錄)』에 수록되어 있다. 「성묘이건기(聖廟移建記)」는 1759년 당시 현풍현감(玄風縣監)이었던 김광태(金光泰)가 작성하였는데, 본문에는 향교의 이건 경위와 의의를 언급해 놓았다. 이에 따르면 1755현풍현감으로 부임한 김광태현풍향교 건물을 보았는데, 이때의 향교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건물을 새로 복원한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위치가 잘못되어 비바람을 많이 맞아 퇴락하였기에 지역 유림들의 의견을 모아 다시 임진왜란 이전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고, 규모도 확장했다며 이건 경위를 밝혀 놓았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759慶尙道 玄風縣 소재 玄風鄕校를 이건 한 후, 이건 경위와 의의를 기록한 玄風縣監 金光泰의 移建記
事績錄 玄風鄕校
자료의 내용
1759慶尙道 玄風縣 소재 玄風鄕校를 移建 한 후, 玄風縣監 金光泰가 작성한 移建記다. 본 자료는 1914慶尙北道 達城郡으로 편입된 현풍향교에서, 1990년 필사본으로 간행한 『事績錄』에 수록되어 있다. 『事績錄』는 1758년부터 1990년까지 현풍향교 운영과 관련해서 작성된 각종 글들과 문서 등을 엮어 놓은 것이다. 1759년의 「聖廟移建記」는 그 중에서 첫 번째로 수록되어 있다.
「聖廟移建記」를 작성한 김광태1755년부터 1760년까지 현풍현감으로 있으면서 현풍향교의 이건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1759년 4월 下浣에 작성된 「聖廟移建記」에는 1759현풍향교를 이건한 경위가 대략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지금 옮겨진 향교의 위치가 원래 향교의 위치임이 나타난다. 원래는 지금의 위치에 향교가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되어 원래 위치에서 북쪽으로 1리 남짓한 곳에 새롭게 향교를 복원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事由는 명확하지 않다고 했다. 본인이 1755현풍현감으로 부임하여 향교를 살펴보았는데, 大聖殿의 대들보와 기둥이 썩어 퇴락한 것을 보았다고 한다. 김광태는 퇴락의 중요한 이유로 비바람을 쉽게 맞을 수 있는 잘못된 위치에 향교가 새로 세워졌기 때문이라 판단하였다. 이에 1758년 여러 유생들의 의견을 모아 옛 터에 향교를 重修하기로 결정했다며 이건 동기를 밝혀 놓았다. 중수 할 때 여러 선비들이 자금을 기부하였고, 백성들이 즐겁게 나무를 베고 돌을 옮겨온 것이 임금의 귀에 들어가 축하를 받들게 되었으며, 이에 告由한 뒤 그해 9월 공사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1758년 11월 먼저 大聖殿, 東廡, 西廡가 완성되어 奉安禮를 거행하였으며, 이듬해인 1759년 4월 공사가 마무리 되었다. 이때의 중건으로 향교의 규모도 커졌다. 옛날에 하나였던 대성전의 문을 三門으로 만들었고, 동무와 서무의 곁채도 새로 지었으며, 明倫堂 양쪽에 모두 방을 두었다고 한다. 또한 典祀廳을 확장했고, 각종 부속 건물인 齋, 寮, 庖, 庫도 갖추어 총 규모가 64칸이 되었음을 밝혀 놓았다. 落成式은 1759년 4월 24일에 있었는데, 이때 김광태는 여러 校生들에게 향교를 잘 보존하여 鄒魯之鄕의 풍습을 복구하고 각기 爲己之學의 학문에 정성을 쏟을 것을 당부하였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향교 운영의 일면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一邑一校’의 원칙으로 각 고을에 건립된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 공립교육기관을 대표하였다. 이러한 향교의 활성화는 考課와 관련된 부분이이기에 수령들의 관심 하에 운영되고 있었다. 1759현풍향교의 이건도 수령의 각별한 관심에서 성사된 것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990년 간행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현풍향교(玄風鄕校) 『사적록(事績錄)』 수록 1759년 김광태(金光泰) 「성묘이건기(聖廟移建記)」

聖廟移建記
令新建學卽之舊其也學舊在斯基基甚韞籍稱吉
地壬辰兵後改建於稍北一里許己事不可知也昔多儒
賢出以鄒魯名後遂寥焉邑之人士議移學舊基而志
末旣遺其子孫憂歲乙亥冬余莅玆邑祗詣學審視則聖
殿梁楝杇靠於檣壁是不惟歷年久蓋處地不穩受風雨是
緊越四季戊寅夏詣儒繼其先志相率請移學甚勤余額
重之旣又思學且朝暮危宜急修旣修則宜擇地移建舊基
塞多士望未害也乃許之於是士樂捐財民樂移事旣太運石
聞干朝欽奉御祝祗告先聖九月始命匠十一月殿廡先咸
行奉安禮翌年己卯四月工告訖殿門奮一而己今三之東西
奮無廡今刱焉明倫之堂兩其房典祀之廳增其制齋寮
庖庫種文藏用凡六十四間也結構緻丹韄鮮繚以同垣位

置其整以是月甲戌會諸生落之咸大權然相慶余乃
謂諸生曰方斯役之始也吾慮夫力綿事巨難乎有終
幸天時順而人事諧無毫髮求於意若有神助然是以
能亟旣此士林積誠之效也自諸生先相先父己此誠諸生
亦此誠世其一誠金石可透故終必移而後己今則學己
移矣荀能移移學之誠於自家工夫則誠之所到何事
不做蚤夜修業篤志力行常以不及前賢爲恥勉勉不己
則今之翏翏者持變爲昔之鄒魯而卽移風如移學殆反
掌易耳豈不美哉若但誠於移學而不誠於爲己則
依然是這般人學雖移猶不移也奮基之吉其能使
夫人者生知耶果在樹不摘不入口此常理也諸生
起而對曰謹聞命矣是爲記
己卯孟夏下流太守金光泰
乙〔己〕卯西紀一七五九年英祖三五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