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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慶尙北道) 영천군(永川郡) 신녕향교(新寧鄕校) 간행 『고왕록(考往錄)』 수록 1744년 서문(序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WZ.1744.4723-20140630.Y141050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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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교육/문화-문학/저술-서
작성주체 신녕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작성시기 1744
형태사항 크기: 28 X 19
판본: 필사본
수량: 1책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천 신녕향교 /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매양리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천군(永川郡) 신녕향교(新寧鄕校) 간행 『고왕록(考往錄)』 수록 1744년 서문(序文)
1744년 12월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의 『고왕록(考往錄)』 서문(序文) 격이 되는 글로 작성자는 미상이다. 서문에는 신녕향교에서 『고왕록』을 작성하게 된 의의와 향교 이건에 대한 논의가 언급되어 있다. 한편, 본 『고왕록』은 조선후기부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신녕경상북도(慶尙北道) 영천군(永川郡)에 편입될 무렵까지, 신녕향교의 운영 상황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서문에서는 먼저 기록의 중요함을 전제하면서 지금 신녕향교의 자료는 몇 차례의 이건과 병화를 겪으며 예전 자료가 많이 유실되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에 본 『고왕록』에 현재 남아 있는 각종 유문(遺文)들을 모아 놓고, 향후 중요한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사정을 기록해, 후예들이 상고할 수 있는 자료로 삼을 것을 당부해 놓았다. 서문 후반부에는 그동안 향교 이건이 세 차례 있었지만, 마지막으로부터 60여 년이 지나 건물이 많이 퇴락했다며, 향교 이건 논의를 거론하고 있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744慶尙道 新寧縣 소재 新寧鄕校에서 작성하기 시작한 『考往錄』의 서문
考往錄
자료의 내용
1744년 12월 작성한 慶尙道 新寧縣 소재 新寧鄕校考往錄』의 序文 격이 되는 글로, 작성자는 미상이다. 신녕향교考往錄』은 1744년 이전 신녕향교에서 작성한 각종 遺文과 사적을 간략히 엮어 놓은 후, 1744년 이후부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신녕永川郡에 편입될 무렵까지, 신녕향교의 운영 상황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본 자료는 그 중에서도 두 번째로 수록되어 있다. 자료 말미 작성 연도를 甲子年이라고 하였는데, 본문에서 세 번 신녕향교의 터를 옮겼고, 경신년으로부터 60여 년이 흘렀다는 기록으로 보아 작성 연도가 1744년의 갑자년으로 생각된다.
考往錄』의 서문 격이 되는 1744년 12월의 글에는 『考往錄』 작성의 의의와 신녕향교 이건 문제를 언급해 놓았다. 먼저 『考往錄』 작성의 의의가 언급되어 있는데, 지나간 일을 듣는 대로만 전하게 되면 세월이 흘러 의심나는 것이 생기니, 오로지 문자로 남겨야 옛 것을 보고 후예를 깨우칠 수 있다며, 기록의 중요성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신녕향교의 기록은 많지 않아 옛 일을 살펴보는 것이 쉽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신녕향교는 모두 세 차례 터를 옮겼는데, 그 해가 경신년이라고 하면서, 그 동안 兵燹을 겪으며 향교의 많은 문적이 소실되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근래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여 『考往錄』을 만들고, 지금부터 향후 일어날 일을 기록해 앞으로 상고하는 자료로 삼을 것이라고 하였다. 다만 향교를 설립하는 것은 인재 양성을 바탕으로 삼고 있는데, 경신년 이후 60여 년이 흐르는 동안 鄕運이 쇠퇴하고 文氣가 바뀌니, 우리 고을에서의 학문이 융성하지 못해, 특히 科路가 심히 막혀 있는 상황임을 아쉬워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경신년은 세 차례 터를 옮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1680년 경신년으로 생각된다. 본 서문 다음에 수록된 「遺文」은 1678신녕향교 이건 청원과 관련된 글로 1680년에 이건이 실현되었으며, 이로부터 60여 년이 흘러 본 『考往錄』 작성과 함께, 향교 이건이 재차 논의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考往錄』 중간 중간에는 신녕현 출신 인사로 과거를 본 기록이 간헐적으로 확인된다. 본 서문에서 科路가 막혀 있음을 아쉬워하고 있는데, 그런 이유로 여러 인사들의 과거 경력을 기록해 놓은 듯하다. 이어 향교가 쇠락하여 고을의 학문이 융성하지 못한 것을 이야기 하면서, 이번에 재기되는 이건 논의가 堪輿說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地勢의 雄麗함과 泉石의 淸勝도 중요하지만, 실제 지금의 향교는 左右前後로 障衛하는 것도 없어서 비바람에 파손될 우려와 기와가 날라 갈 근심이 많아, 온당히 修葺하는 의례와 조치가 있어야 된다고 하면서 서문을 마무리하고 있다. 당시 堪輿說에 따라 향교의 터를 옮기는 예가 많아, 정부에서 堪輿說에 따른 이건을 금지하고 신중을 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堪輿說로 이건을 논의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향교 운영의 추이와 신녕향교의 연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특히 본 자료에서 주목되는 점은 堪輿說에 근거한 향교의 이건이다. 이는 국가에서 금지하는 사안이었기에 신녕향교 측에서는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향교 이건의 논의가 堪輿說과 무관함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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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천군(永川郡) 신녕향교(新寧鄕校) 간행 『고왕록(考往錄)』 수록 1744년 서문(序文)

考往錄
事往而可疑者蓋緣於傳聞之襲訛歲遠而可澄者
亶在於文字之不朽然則鑑前古而牖來裔排衆論
而遵遺軌匪文曷究本校凡三遷占基於玆其年卽
庚申可想鄕父老用意之勤而移刱以前不但屢經兵
燹所藏遺文幾盡殘缺中間事蹟亦頗放失靡所
凭據搜閱遺文中最緊底說且拾邇來見聞作爲
一帙名之曰考往錄繼今以往隨事輒錄以便考覽則孛
矣但學校之設所以培養人材之地而自迄今六十▣
餘載鄕運益衰文氣愈替窮經篤志者壽▣▣
揣章繪句者科路甚塞至於泯沒而無稱焉說者具
不以前日遷徙爲咎焉堪輿不經之論▣非▣▣▣

聽信者而設令山水風氣之難聚果爲人材盛衰▣▣
顧此城中將何所占得一別界以俟運氣之旺耶大抵學
宮之址或取氣勢之雄麗或取泉石之淸勝而此地▣
無雄麗之可稱又乏泉石之可觀而左右前後無所障
衛且當北風雨要衝之路瓦飛雨淋之患無時不絶穩
安修葺之儀式年斯擧豈非士林之所憂懼而其可
爲永久守護之地耶移建之議雖屈於邦禁而規畫
之事實有望於後之諸君子云爾
甲子臘月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