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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慶尙北道) 영천군(永川郡) 신녕향교(新寧鄕校) 간행 『고왕록(考往錄)』 수록 1679년 남몽뢰(南夢賚) 「상량문(上樑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WZ.1679.4723-20140630.Y141050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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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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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경제-토목/건축-상량문
작성주체 남몽뢰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작성시기 1679
형태사항 크기: 28 X 19
판본: 필사본
수량: 1책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천 신녕향교 /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매양리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천군(永川郡) 신녕향교(新寧鄕校) 간행 『고왕록(考往錄)』 수록 1679년 남몽뢰(南夢賚) 「상량문(上樑文)」
1679년경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소재 신녕향교(新寧鄕校)의 상량문(上樑文)이다. 작성자는 1679년 당시 선산부사(善山府使)로 재임하고 있던 남몽뢰(南夢賚)로, 본 자료는 신녕향교고왕록(考往錄)』에 수록되어 있다. 『고왕록』의 본 자료 앞에는 선산부사 남몽뢰가 작성한 신녕향교 이건(移建) 공사 「개기제문(開基祭文)」이 확인되기에, 「상량문(上樑文)」이 이건 공사의 연장선상에서 1679년경 작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신녕향교고왕록』은 조선후기부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신녕경상북도(慶尙北道) 영천군(永川郡)에 편입될 무렵까지, 신녕향교의 운영 상황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남몽뢰의 「상량문」에서는 향교 이건 공사의 의의와 경위를 언급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현재 신녕향교는 건물이 퇴락해 기둥이 무너지고 비바람이 새고 있으며, 더구나 위치가 하천 근처라서 범람으로 인한 담장 붕괴가 끊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지역 유림들이 의견을 모아 새로운 장소에 옮겨 짓기로 하였는데, 이때의 공사비용에는 지역 유림들이 기부한 재물과 지방관이 기부한 녹봉이 보충되었음을 밝혀 놓았다. 이에 뜻을 모아 힘껏 공사를 시작하였고 상량식(上梁式)을 거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본 자료에서 확인되는 지역 유림들과 지방관의 기부행위는 조선후기 향교 운영의 일면과 재정적 기반을 살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伊溪集』, 南夢賚,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679년경 慶尙道 新寧縣 소재 新寧鄕校 移建 공사의 의의를 기리기 위해 작성한 南夢賚의 上樑文
考往錄
자료의 내용
1679년경 慶尙道 新寧縣 소재 新寧鄕校 移建 공사 때 작성된 上樑文으로, 작성자는 1679년 당시 善山府使를 역임했던 南夢賚다. 본 자료는 신녕향교考往錄』에 「上樑文」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신녕향교考往錄』은 1744년경부터 쓰여 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전에 작성되었다가 남겨진 신녕향교의 각종 유문과 사적을 수록한 후,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신녕慶尙北道 永川郡에 편입될 무렵까지, 신녕향교의 운영 상황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본 자료는 그 중에서도 다섯 번째로 수록되어 있는데, 남몽뢰의 문집인 『伊溪集』에도 「新寧鄕校聖殿上樑文」이라는 제목의 거의 동일한 글이 확인된다. 『考往錄』과 문집의 상량문에 언급된 내용은 몇몇 구절의 字句를 제외하고는 거의 동일하다. 한편, 『考往錄』의 본 자료 앞에는 ‘南善山夢賚’가 작성한 「開基祭文」이 수록되어 있다. 남몽뢰선산부사로 재임했던 연도가 1679년임을 감안할 때, 본 상량문도 이 해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考往錄』의 1678년 「遺文」은 신녕현 재지사족들이 신녕향교 이건을 청원하는 문서로, 해당 청원이 수락되어 1679년경의 이건 공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남몽뢰의 「상량문」에는 향교 이건의 의의와 경위가 간략히 언급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道는 일찍이 없어진 적이 없기에 廟의 제도가 유지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우리나라에서는 祖宗朝부터 학교가 크게 흥하게 되어, 貴賤賢愚를 가지지 않고 그곳에 모셔진 성현을 숭배하고 있음을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신녕향교는 세월이 오래되어 기둥이 무너지고 비바람을 막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며, 더구나 하천이 범람해 향교 담장이 붕괴되니, 지역 유림들이 이건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으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함께 점지한 곳에서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勝景이 매우 뛰어남을 칭송해 놓았다. 이때 공사비용은 기존의 향교 재물에, 각자 鳩財한 재물과 官凜이 활용되었다고 한다. 신녕향교 이건 때, 신녕현 재지사족들과 지방관의 기부행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에 공사를 시작하니 남녀노소 모두가 함께 즐거워하며 힘껏 노력했음을 칭송하였다. 그리하여 신녕향교 聖廟와 건물의 대략이 완성되니, 鄕人과 邑의 자제들이 吉日을 선택해 들보를 올리는 상량식이 치르게 되었다며, 상량문의 작성 경위를 밝혀 놓았다. 그리고 상량문 말미에서는 신녕향교 이건을 계기로 모두가 학문에 힘쓸 것을 당부하고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향교의 재정적 기반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본 자료에는 신녕향교 이건 공사비용을 각자 鳩財한 재물과 官凜에서 보충하였음을 밝혀 놓았다. 鳩財한 재물은 곧 신녕현 재지사족들의 기부금으로 생각되는데, 이를 儒錢이라 한다. 이러한 儒錢은 보통 移建처럼 큰 공사가 있을 때, 고을 내 재지사족들에 의해 모금되었다. 조선시대 향교가 공립교육기관이면서, 재지사족들의 자치기구로 운영된 만큼, 재지사족들이 자체적으로 儒錢과 같은 재물을 모아 향교 운영에 보충하였던 것이다. 한편, 官凜은 지방관의 기부행위다. 자신의 녹봉을 덜어 향교 재정에 보충하는 기부행위는 지방 교육과 향교 활성화에 뜻있는 지방관에 의해 이루어지던 행위였다. 더구나 향교의 활성화는 지방관의 考課 대상인 興學과 관련된 부분이었기에, 특별한 관심 하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伊溪集』, 南夢賚,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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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慶尙北道) 영천군(永川郡) 신녕향교(新寧鄕校) 간행 『고왕록(考往錄)』 수록 1679년 남몽뢰(南夢賚) 「상량문(上樑文)」

上梁文
道未嘗亡也允協革舊之人心杏亶生色窃念東方學校之
文不在玆乎聿睹鼎新之廟貌槐市增輝蓋自我祖朝宗尤
興州有三百六十孰非夫子之言不可一日無者今玆丁火之▣▣
成人無貴賤賢愚盡是尊親之士所以三代共之古者酉
廢爲殿戶曾百世之偃偃悠悠學忠孝儘效象魏之▣…
徙居花山而吉士之蕩蕩家家誦詩書一度▣▣之▣▣

非索生之化維思式禮之罔愆我將我享左右群聖之
忘崇尙之方於樂閟宮之有侐來燕來寧前後元哲之▣…
橫經問難之士比若同時流誦揮於璧水夫何歲久而年▣
盛服齋明之風復見今日煽文化於瓌林乃至柱廢而居者
鳥鼠攸去之無望猶有憾於吾心況此川潦之衝齧匪人議之
風雨不蔽之可憂豈其安於神道恐或宮墻之崩頹寔天意之
不臧道不墜於地豈容消鑠而使之無睠玆艮岳之勝境二水
有在天未喪斯文亦宜移刱之不可緩實是坤軸之名區孤峯
環流自成泮璧之樣幾年地秘而天慳奚獨一邦之慶幸遇泰
屹立秀出文筆之姿一朝龜食而筮葉必待百年而興正儔文
階之治爰作事而謀始老少齊聲或捐官廩而補役陳留瓦徂徠
昌之會乃鳩材而僝功公私陳力或爲敷事而釋經魯般繩公輸

松若鬼輸而神運今勿亟於經營茂如松苞如竹質之斯干承
墨如父事而子來功已成於突兀內其庙外其堂取諸大壯倣
漢帝壁雍之制唯其不華而不奢鄕人邑子窺室壁而喟然玆
魯侯泮宮之規可以悠遠而悠久白叟黃童望門牆而嗟若將
涓吉日請賡呼邪許之歌抛梁東光射黌堂通處
擧脩梁敢唱兒卽偉之頌瑞日朝朝出海紅畵甍高棟半天
西必自邇卑登峻極南鍾聲
萬仞高山天半齊勉講吾倘可擧濟小菴仙侶禮禪龕怳若
半夜驚殘夢北爲君臣者定於斯上
同安等裡參衆星錯落環宸極聖訓昭昭在之冊昭昭一理▣
從來函嘿何言哉下亞聖一言豈欺我
玄衆生物行時無暫妄混混洹泉流不舍盈科後進如斯也

伏願上梁之後家絃戶誦私淑諸人當爲孟氏之聖食於羹▣…
秋禮冬詩求見長者不願曹亥之師言爲法行爲則
道不遠而在邇俗尙入孝出悌之風人皆忠信邪說息而朱墨而行
求有餘而無他士齊希賢希聖之志學則孔顔王道尊而黃老屛跡
坐見文物之益煥天地氤氳降休祥於泰運是爲重我之光明
立致受命之維新山川孕毓多俊彦於明時亦是臨汝之上帝
終古今行
於千萬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