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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慶尙北道) 영천군(永川郡) 신녕향교(新寧鄕校) 간행 『고왕록(考往錄)』 중 1704년 이전 기록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WZ.0000.4723-20140630.Y141050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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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왕록
작성주체 신녕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형태사항 크기: 28 X 19
판본: 필사본
수량: 1책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천 신녕향교 /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매양리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천군(永川郡) 신녕향교(新寧鄕校) 간행 『고왕록(考往錄)』 중 1704년 이전 기록
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소재 신녕향교(新寧鄕校)고왕록(考往錄)』의 1704년 이전 기록이다. 신녕향교고왕록』은 1744년경부터 작성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먼저 1744년 이전의 기록을 간략하게 엮어 놓은 다음에,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신녕경상북도(慶尙北道) 영천군(永川郡)에 편입될 무렵까지, 신녕향교의 운영 상황을 기록해 놓았다.
1704년 이전의 『고왕록』 기록은 모두 네 부분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 기록은 신녕현에 소재한 원사(院祠)의 창건 기록이다. 이에 따르면 1678백학서원(白鶴書院), 1685구천서원(龜川書院), 1710명계사(鳴溪祠)가 창건된 것으로 나타난다. 두 번째 기록은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이이(李珥)성혼(成渾)의 위패가 문묘(文廟)에 복향(復享)되었다는 내용이다. 세 번째 기록은 1662년부터 1689년까지 신녕현 출신 인사 7명의 과거 응시 기록인데, 모두 소과에 응시한 것으로 나타난다. 네 번째는 작성 연도 불명의 완의(完議)를 요약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김이주(金爾柱), 김하진(金夏鎭), 하재명(河載溟) 3인이 신녕향교에 전답을 기부하였기에, 그 전답에서 추수한 곡식으로 이자를 놓는다고 하였다. 이어 그렇게 얻어진 이자로 매년 봄과 가을, 신녕향교에서 열리는 강학 활동인 거접(居接)비용으로 쓸 것임을 명시해 놓았다. 이러한 기부 활동은 조선후기 향교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 중 하나였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慶尙道 新寧縣 新寧鄕校 간행 『考往錄』에 수록된 1704년 이전의 신녕향교 운영 기록, 신녕현 소재 院祠 창건 기록 및 신녕현 출신 인사의 과거 응시 기록
考往錄
자료의 내용
慶尙道 新寧縣 소재 新寧鄕校考往錄』 중 1704년 이전의 기록이다. 신녕향교考往錄』은 1744년 이전에 작성된 각종 遺文을 엮어 놓은 후, 이후의 신녕향교 운영 양상을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신녕慶尙北道 永川郡에 편입될 무렵까지 기록한 자료다. 『고왕록』의 본 자료 다음에는 1704년의 신녕향교 운영 기록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자료 서두에 ‘甲申以前無考據文字’라고 명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본 기록은 1704년 이전 신녕향교 운영과 관련된 내용을 엮어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본문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가장 먼저 수록된 것은 신녕현 소재 院祠의 창건 기록이다. 이에 따르면 白鶴書院1678년, 龜川書院1685년, 鳴溪祠1710년에 창건된 것으로 나타난다. 백학서원李滉黃俊良을 배향한 곳이며, 구천서원신녕현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활약한 權應銖權應心을 배향한 곳이다. 명계사의 이력은 명확하지 않으나, 부기된 내용에 따르면 옛 향교 터에 지은 것이라 하였다. 1680년경 신녕향교 移建이 완료된 후, 그 터에 세워진 듯하다.
두 번째는 1694년의 李珥成渾 위패 復享 기록이다. 이이성혼은 西人계 인사로 1689년 南人이 집권한 己巳換局이 일어나자 文廟에서 黜享되었다가, 1694년 서인에서 분리된 老論이 甲戌換局으로 재집권하자 문묘에 復享 되었었다. 이에 신녕향교의 東廡와 西廡에도 두 인사의 위패가 復享되었는데, 이때 東廡의 題版은 權復衡, 西廡의 題版은 韓慶大가 맡았다고 한다.
세 번째 기록은 신녕현 출신 인사의 과거 응시 기록이다. 1662년 蓮榜, 즉 生員試에 급제한 權應道의 합격을 시작으로 1689丁彦輔의 監試, 즉 進士試 初場 응시까지, 모두 7명의 과거 시험 응시 기록을 수록해 놓았다. 이들은 모두 소과에 응시한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신녕향교고왕록』에는 중간 중간 신녕현 출신 인사의 과거 응시 기록이 간헐적으로 확인된다.
마지막 네 번째 기록은 작성연도 불명인 完議를 요약해 놓은 것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金爾柱, 金夏鎭, 河載溟 3인이 水田 14斗落을 신녕향교에 願納했다고 한다. 즉 전답을 기부한 것인데, 그 전답의 가을 소출이 1년에 적어도 15石 밑으로는 내려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부 행위를 칭송하며, 향후 소출을 殖利해서, 그 이자로 매년 봄과 가을에 居接하는 비용으로 사용할 것임을 규정해 놓았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향교의 운영 실태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자료 말미의 완의로 향교의 재정적 기반과 관련된 것이다. 완의에 따르면 3인이 水田 願納, 즉 전답을 기부했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물론 이러한 願納은 성현 추모와 학문 진흥이 주요 명분이었고, 본 완의에서도 그러한 이유인 것으로 나타나지만, 그 이면에는 사회적 또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반영되어 있었다. 원납하는 자가 일반인을 경우 당시 큰 부담이 되던 雜役의 침탈을 면할 수 있었고, 避役이 가능하였으며, 또한 신분 상승의 수단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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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천군(永川郡) 신녕향교(新寧鄕校) 간행 『고왕록(考往錄)』 중 1704년 이전 기록

白鶴書院戊午刱建
龜川書院乙丑刱建
鳴溪祠庚寅年移建於舊鄕校基址而從公文代土
栗谷牛溪兩先生甲戌年復享【東廡題版權復衡西廡題版韓慶大

幼學權應道以終場得參蓮榜一等三人壬寅榜【康熙】
丁彦衡參東堂
朴自韓參監試終場
金玭參監試初場
金復柱參監試初場
權復衡
丁彦輔參監試初場己巳年
一祭土沒▣立完議【校長權▣▣】
其文曰祭成人材學校之本也而本校▣石弊▣獎道▣▣
吾鄕之所生旣▣此也通於今年有校生願納者金爾柱
夏鎭
河載溟三人其而納者十四斗所種之水田也每年秋收

少不下十五石此乃科外▣備世也屬之上齋而爲上齋之員
無升斗之費本以雖式實定爲本所之任亦如是無▣賴貸▣
之弊存其本殖其未以爲年年春夏居接之資如或未居接之
年則特爲成就之人讀書於秋冬交修竝進終無爰圖則無
有浦▣▣成人材之萬一各字揚念允宿斯議幸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