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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慶尙北道) 영천군(永川郡) 신녕향교(新寧鄕校) 간행 『고왕록(考往錄)』 수록 「무신3월일 신녕창의사적(戊申三月日 新寧倡義事績)」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WZ.0000.4723-20140630.Y141050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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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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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왕록
작성주체 신녕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형태사항 크기: 28 X 19
판본: 필사본
수량: 1책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천 신녕향교 /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매양리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천군(永川郡) 신녕향교(新寧鄕校) 간행 『고왕록(考往錄)』 수록 「무신3월일 신녕창의사적(戊申三月日 新寧倡義事績)」
1728년 3월 발생한 이인좌(李麟佐)의 난(亂) 때, 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에서 창의한 의병들의 사적(事績)이다. 당쟁으로 위축되어 있던 소론(少論)과 남인(南人)계 일부 극렬 인사들에 의해 난이 발생하자, 여러 고을의 재지사족들이 의병을 일으켰다. 경상도 신녕현의 재지사족들도 이때 의병을 일으켰는데, 본 자료는 그런 창의(倡義)의 경위, 그때 작성된 격문(檄文), 편지, 창의 인사들의 이력 등을 수록한 것이다. 한편, 본 자료는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신녕영천군(永川郡)에 편입된 이후, 신녕향교의 역대 사적을 엮어 필사본으로 간행한 『고왕록(考往錄)』 가장 서두에 「무신3월일 신녕창의사적(戊申三月日 新寧倡義事績)」이라는 제목으로 엮여져 있다.
자료 가장 서두의 ‘향교고왕록(鄕校考往錄)’은 창의 경위를 요악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1728년 3월 이인좌청주(淸州)에서 난을 일으키자 고을 원로 권복형(權復衡)이 격문(檄文)을 돌렸고, 지역 인사들이 신녕향교(新寧鄕校)에서 논의한 끝에 창의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의병장은 권복형의 동생인 권익형(權益衡)이 맡아 격전지로 의병을 영솔했는데, 팔거(八莒)를 지날 무렵 청주의 적도가 토벌되어 신녕으로 되돌아왔다며 창의 경위와 과정을 밝혀 놓았다. 두 번째로 수록된 ‘격문(檄文)’은 권복형이 고을의 인사들에게 창의를 권유하는 내용이다. 세 번째 ‘저향회소서(抵鄕會所書)’는 권복형신녕현 사족들의 모여 창의를 논의하는 향회소(鄕會所)에 보낸 편지로, 역시 창의를 권유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네 번째 ‘여사제서(與舍弟書)’는 권복형이 동생 권익형에게 보낸 편지다. 신녕현에서 창의한 의병대의 의병장을 맡은 동생 권익형에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힘쓸 것을 당부해 놓았다. 다섯 번째 ‘여질자급가아서(與侄子及家兒書)’는 창의에 참여하는 자신의 조카와 집안 자제들에게 보내는 권복형의 편지다. 역시 현조(顯祖)의 뜻을 계승하여 창의에 힘쓸 것을 당부하였다. 권복형권익형 등은 신녕현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활약한 권응수(權應銖) 장군의 후손으로, 선조의 뜻을 계승하여 창의 때 힘쓸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에 수록된 것은 신녕현 창의에 참여한 주요 인사들의 성명과 맡은 직책, 본관과 출생 간지, 그리고 창의 때 행적과 공로를 소개한 일종의 창의동고록(倡義同苦錄)이다. 여기에는 사인(士人) 권복형, 의병장 권익형, 공사원(公事員) 김진기(金震基), 찬획(贊畫) 조성징(曺聖徵)양진후(楊震後), 종사관(從事官) 정남석(丁南晳)정만재(丁萬齋), 운량관(運糧官) 권달징(權達徵)권사룡(權士龍), 수량관(守糧官) 김이기(金履基), 조방장(助防將) 권성일(權聖一), 그리고 우방영중군(右防營中軍) 정재흥(丁載興)이 소개되어 있다. 이중 정재흥은 관군인데다가 신녕현 출신이 아님에도, 그의 후손이 신녕현으로 이주해 정착한 까닭에 함께 수록하였음도 밝혀 놓았다.
한편, 본 자료에 수록된 주요 창의 인사들의 성관(姓貫)을 살펴보면 안동권씨(安東權氏), 영양김씨(英陽金氏), 나주정씨(羅州丁氏), 창녕조씨(昌寧趙氏), 청주양씨(淸州楊氏)로 나타난다. 이들은 조선후기 신녕현 지역의 여론을 주도하던 대표적인 재지사족 가문들이다. 즉 조선후기 신녕현의 유력한 재지사족들에 의해 1728년 창의(倡義)가 주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창의 경력은 이들 가문이 조선후기 지역 내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新寧鄕案』, 1939
『慶北義兵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일제강점기 新寧鄕校에서 간행한 『考往錄』 수록 자료로 1728李麟佐의 난 당시의 慶尙道 新寧縣 倡義 인사 事績
考往錄
자료의 내용
1728년 3월 발생한 李麟佐의 난 당시 慶尙道 新寧縣에서 倡義한 인사들의 事績이다. 新寧鄕校에서 작성하였으나 작성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본 자료는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신녕永川郡에 편입된 이후, 신녕향교의 역대 사적을 엮어 놓은 뒤 필사해서 간행한 『考往錄』 가장 서두에 수록되어 있다. 「戊申三月日 新寧倡義事績」이라는 제목으로 엮여져 있으며, 본문의 목차는 ‘鄕校考往錄’, ‘檄文’, ‘抵鄕會所書’, ‘與舍弟書’, ‘與侄子及家兒書’, 그리고 일종의 倡義同苦錄 순이다.
‘鄕校考往錄’은 이인좌의 난이 진행되는 과정과 신녕현 지역 재지사족들이 창의한 사실을 간략히 요약해 놓은 것이다. 이에 따르면 戊申 3월, 賊將 이인좌 등이 淸州의 兵營을 공격하여 兵使 李鳳祥營將 南延年을 죽였으며, 鄭希亮曺聖佐 등은 同聲으로 상응하여 곳곳에서 봉기하였다고 한다. 이에 나라에서는 巡討使 吳命恒을 보내어 이를 토벌케 하였으며, 召募使 趙德鄰은 여러 고을을 돌며 의병 창의를 권유하였다. 같은 달 신녕현의 鄕老 權復衡은 鄕中 인사들에게 發文하였고, 本校, 즉 신녕향교에 향중 인사들이 모여 토벌군의 陣에 합류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으게 되었다. 이에 권복형의 동생 權益衡이 義兵將이 되었고, 曺聖徵楊震後는 贊畫, 丁南晳, 丁萬齋, 曺龍翰은 從事官, 權達徵權士龍은 運糧官, 金震基는 公事員, 金履基는 守糧官, 束伍把摠 權聖一은 助防將을 맡았다며 창의 경위를 밝혀 놓았다. 그러나 합류하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가는 도중 八莒에서 청주의 적들에게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고, 싸움에는 응하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檄文’은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신녕현의 지역 인사들에게 창의를 권유하기 위해 권복형이 작성한 것이다. 격문에서는 먼저 적도들이 창궐하는 나라의 불행이 닥쳤으니, 忠臣志士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싸울 것을 권하면서, 비록 자신이 나이는 많으나 성난 백발을 휘날리며 향중 인사들에게 창의를 권하는 격문을 쓴다고 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때 활약하며 宣武功臣에 책봉된 자신의 顯祖 權應銖의 정신을 이어받아, 향중의 인사 모두가 뜻을 함께하여 君父의 원수에게 설욕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抵鄕會所書’는 창의를 의논하는 鄕會所에 권복형이 보낸 편지다. 이에 따르면 권복형은 먼저 적도의 소식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나, 자신은 나이가 많아 창의를 권유하는데 그치고 있음을 아쉬워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러 인사들이 한 목소리로 상응해 가지런히 軍容을 갖춘 것을 기리면서, 자신이 늙고 병들어 합석해 상의는 하지 못하나, 나라에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기 위해 家兒들에게 창의를 명하였고, 또한 家僮 10여 명을 보내니, 조금이라도 적들을 소탕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고 하였다.
‘與舍弟書’는 권복형이 자신의 동생 권익형에게 보낸 편지로, 권익형신녕현 창의 때 의병장으로 추대된 인물이다. 이에 따르면 향중에서 너를 대장으로 삼았는데, 들은 바에 따르면 지난 번 宣傳官이 우리 고을에 왔을 때 우리 가문의 사람이 이를 맡은 것을 매우 뜻있게 봤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에 剛柔한 도리로 큰 공을 세우고, 절대 가볍게 행동하지 말 것이며, 무엇보다 선조의 공적을 계승해 힘낼 것을 당부해 놓았다.
‘與侄子及家兒書’도 권복형이 작성한 편지로, 창의에 참여하는 조카와 家兒들에게 보낸 것이다. 앞의 편지와 마찬가지로 조카와 집안 자제들에게 전장에서 忠義를 다하여, 나라와 선조에게 보답하는 마음으로 힘써 싸울 것을 당부해 놓았다.
마지막에 수록된 것은 별다른 제목은 없으나, 내용으로 보아 이인좌의 난 때 창의한 인사들의 개별 기록인 일종의 倡義同苦錄에 해당된다. 향중 인사로서 창의할 때 맡은 자리와 성명을 기재한 후, 그 아래에 字, 출생 간지, 본관, 가족 관계 또는 顯祖와의 代數, 그리고 해당 인물의 성향과 창의 때의 공적을 기록해 놓았다. 이에 따르면 권복형은 임진왜란 당시 활동했던 권응수의 玄孫으로 이인좌의 난 때 고령으로 창의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士人으로 창의를 권유했다며, 가장 서두에 수록해 놓았다. 의병장 권익형권복형의 동생으로 의병을 영솔했는데, 선전관이 그의 군중을 보고 열읍 의병 가운데 가장 위용을 갖추었다는 평가를 내렸음도 함께 언급하였다. 그리고 八莒까지 진격하였으나, 적도가 토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환했음도 소개해 놓았다. 이어 공사원 김진기, 찬획 조성징양진후, 종사관 정남석정만재, 운량관 권달징권사룡, 수량관 김이기, 조방장 권성일, 그리고 마자막에는 右防營中軍 丁載興의 공적을 거론하였다. 그런데 마지막에 언급된 정재흥신녕현에서 창의한 인사는 아니었다. 그의 공적 말미에는 원래 大邱에 거주했던 인물인데다가 의병이 아니라 관군이었음에도 수록한 까닭을 밝혀 놓았다. 후대에 정재흥의 자손이 신녕으로 이주해 와서 同錄해 주기를 간청한 까닭에 특별히 수록한다고 하였다. 한편, 단을 낮추어 曺龍翰의 공적도 수록해 놓았다. 다른 사람들은 상단부에 큰 이름으로 쓰여 져 있으나, 조용한정만재 옆에 작은 글씨로 이름과 공적이 소개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조용한의 공적은 여러 考往錄과 권복형의 『義川謾錄』 등을 통해 알 수 있으며, 그가 의병의 贊畫이었음은 명백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조용한의 本孫은 지금 永川으로 거주지를 옮기 상태이며, 후손들이 다른 의병들과 함께 기록되기를 원하지 않는 관계로 이름을 나란히 수록하지 않았음을 밝혀 놓았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경상도 신녕현 재지사족들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1728이인좌정희량 등이 난을 일으키자 영남 여러 지역의 사족들이 倡義하였다. 경상도 신녕현의 재지사족들도 창의하였는데, 주목할 것은 신녕현의 유력한 사족 가문이 창의를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安東權氏 일문이 주목되는데, 창의 檄文을 돌리고 지역 인사들에게 창의를 권유한 권복형, 그의 동생으로 의병장을 맡은 권익형, 그 외 권달징, 권사룡, 권성일이 이 가문 출신으로 확인된다. 그 외 김진기김이기는 형제는 英陽金氏이며, 양진후는 淸州楊氏, 정남석, 정만재, 정재흥은 羅州丁氏, 조성징은 昌寧趙氏 가문 출신이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1939년 간행 『新寧鄕案』에도 안동권씨, 영양김씨, 청주양씨, 나주정씨, 창녕조씨 가문 출신 인사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즉, 조선후기 이후 신녕현 지역의 鄕論을 주도했던 재지사족 가문에 의해 1728년의 창의가 주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이때 창의한 의병들이 토벌전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1728년의 창의 경력은 이후 이들 가문이 신녕현에서의 지위를 유지하는데 큰 영향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新寧鄕案』, 1939
『慶北義兵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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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천군(永川郡) 신녕향교(新寧鄕校) 간행 『고왕록(考往錄)』 수록 「무신3월일 신녕창의사적(戊申三月日 新寧倡義事績)」

戊申三月日
新寧倡義事蹟

新寧戊申倡義事蹟
鄕校考往錄
戊申三月日賊將李麟佐等猝入淸州兵營兵使李鳳祥
南延年敢爲射天之計鄭希亮曺聖佐等同聲相應處處蜂
起國家遣巡討使吳命恒討之又遣召募使趙德鄰星夜巡
行各邑倡起義兵同月日鄕老權復衡發文勸諭鄕中聚會于
本校以爲赴陣之計推權復衡之弟益衡爲義兵將以曺聖徵
楊震後爲贊畫以丁南晳丁萬齋曺龍翰爲從事權達徵權士
爲運糧官金震基爲公事員金履基爲守糧官束伍把摠
聖一
爲助防將領兵到八莒淸州報捷凶魁次第就俘故不

戰而還
檄文【權復衡所製】
嗚呼邦國不幸賊徒猖獗此正忠臣志士效死之秋乎復衡
雖犬馬齒已高不覺怒髮而裂眦也在昔龍蛇之變吾先祖首
倡義旅鄕賢響應掃蕩凶鋒全城克捷基國家再造之業則惟
我鄕中僉君子豈可歛手茫夜蕩之時乎玆以泣血勸諭望須
僉賢同聲相應以雪君父之讎千萬倖甚
抵鄕會所書【上同】
賊徒聲息去益驚怖痛哭痛哭僉賢不以我昏老之諭而棄之
同聲相應整齊軍容云忭賀復衡老而且病不能合席相

議以死於國事玆命家兒率家僮十餘名送之伏望僉賢勿
以爲少添以編伍掃蕩凶徒鳴凱而還則死亦何憾哉
與舍弟書
鄕中旣推汝爲大將聞昨日宣傳入縣之語汝眞吾家之人窃
爲汝賀之夫爲將之法兼能剛柔之道可以成大功愼勿輕易
以繼先祖之豐功盛績而報殿下生成涵育之德則豈不大
哉豈不快哉惟余之願惟此而已勉之勉之
與侄子及家兒書上同
汝兄弟俱是獨子其於爲國之道何哉汝之兄弟叔侄不幸
而死於戰場不失爲忠義鬼幸而成大功鳴凱而還則非但有

報國家於先祖尤有光焉毋以老親懷二心也

士人權復衡字子休戊戌生號義川安東壬辰宣武元
花山君忠毅公應銖曾孫文學行誼爲一
鄕矜式當戊申之變時年七十一慷慨雪辱
通諭鄕中倡起義兵其激勵奮發皆公之力

義兵將權益衡字子謙申丑復衡弟膽畧過人有古家風
至是鄕人推以爲義兵將部署諸將聚兵客
舍門外軍容整肅時宣傳官奉命過本邑
公令助防將權聖一傳言曰軍中聞將軍令
拒而不納宣傳再三往復言其奉命之由

出示票信始開陣門宣傳入見主倅嘖嘖石
己曰經來列邑始見此邑有此事遂領軍到
漆谷八莒淸州勝捷之報振旅而還
公事員金震基【倡義錄則運糧官下】字天開甲戌英陽司直有庸十三世孫
監司處利八世孫見識通敏言議英發臨陣
論事不失機務
贊畫曺聖徵字汝休壬戌昌寧壬辰守墓死節孝子
林溪景溫五世孫宣武原從功臣奉事
孫服襲先訓文行兼備及是受任助畫方略

楊震後字子胤生淸州參判孝智六世孫才
器潁拔素善規畫同心協贊多所桿益○赴
陣之日家人執柚慟哭而永訣曰王國之
事不敢不赴兵死地豈圖生還也公慰之曰
人誰無死死於忠義者死得其所也因吟一
絶詩以遺之曰平生欲試紆籌策得死方稱
大丈夫麟佐遵儒如狗輩不容天地活須曳
從事丁南晳字聖興辛酉生號立齋羅州參判夢吉
世孫參奉順敦六世孫素有才藝長益力學
軍中記事司察無遺

丁萬齋字德餘己巳生號三槐羅州壬辰宣武原
從功臣都摠都事應琚玄孫文學瞻敏累捷
鄕鮮衆望所歸擢受是任
曺公龍翰事蹟考諸考往錄及義川謾錄
邑報中昭然載錄且有義將公要來之書
明是新寧贊畫而其本孫以爲入於永川
疏中不肯同錄故刊之耳
運糧官權達徵字通彦己巳復衡侄器度宏深智慮綜密
給餉士卒料量均平

權士龍字雲瑞壬午復衡子服襲庭訓淬礪琢磨
鞠躬盡瘁圖報幹事
守糧官金履基泰容己丑生號野巖震基弟移孝爲忠典
雅自持時及餱糧以備轉輸
助防將權聖一字惟執生安東壬辰殉節贈兵曹
參判
應心玄孫慷慨有大節是時爲助防將
宣傳官往復宣傳復命時時擧公名奏
達拒路之事上命道臣賞賜木三疋米二

右防營中軍丁載興字大而乙卯羅州人贈領議政錦溪君

忠靖公應斗七世孫武宣傳至是營門聞公
名差右防營中軍予官軍鎭居昌安陰
賊錄奮武勳一等官至惠山僉使○公居
大邱又領官軍與新寧義陣不相關屬則
不當合錄而其子孫方寓居新寧懇請同錄
其志可嘉且念其時則同其義則一同錄亦
無害於義故尾附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