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慶尙道 玄風縣 소재 玄風鄕校에서 역대 명현들이 啓議를 통해 거론한 庶孼許通 관련 발언들을 엮어 놓은 자료
事績錄 玄風鄕校
자료의 내용
慶尙道 玄風縣 소재 玄風鄕校에서 庶孼許通과 관련하여, 역대 名賢들의 발언을 엮어 놓은 자료다. 중반부 이후 1823년에 있었던 서얼 通淸 정책인 癸未節目을 이끌어 내었던 인사들의 발언을 수록해 놓은 것으로 보아, 1823년 이후 어떠한 목적 하에 현풍향교에서 해당 발언들만 엮은 자료로 생각된다. 한편, 본 자료는 1914년 慶尙北道 達城郡으로 편입된 현풍향교에서, 1990년 필사본으로 간행한 『事績錄』에 수록되어 있다. 『事績錄』은 1758년부터 1990년까지 현풍향교 운영과 관련해서 작성된 각종 글들과 문서 등을 엮어 놓은 것이다. 19세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列聖朝諸明碩啓議」는 그 중에서도 스물다섯 번째로 수록되어 있다.
본문에는 역대 명현들이 서얼 허통과 관련하여 啓議에서 언급한 발언 중, 대표적인 것을 소개해 놓았다. 이 내용을 간추리면 趙光祖(1482~1591)는 願忠하는 마음은 貴賤에 차이가 없으니 嫡庶를 분별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다. 李彦迪(1491~1553)은 우리나라에 두 가지 밝지 못한 법이 있는데, 하나는 再嫁를 금지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서얼의 禁錮이다. 사람을 쓰는데 재주를 봐야지 서얼이라고 막는 것은 萬古에 없는 법이라고 하였다. 成渾(1535~1598)은 서얼의 금고는 천하에 없는 법이라고 하였다. 宋時烈(1607~1689)은 서얼을 막고 한정 지우는 것은 본래 祖宗의 법이 아니라면서, 지금 서얼을 막고 있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라고 하였다. 朴世采(1631~1695)는 우리나라에 사람을 쓰는 것이 매우 편협하니, 크게 변통을 해서 재주에 따라 인재를 널리 뽑아야 한다고 하였다. 金尙憲(1570~1652)은 하늘에서 재주를 내려주는데 嫡庶의 구분은 없으나 서얼을 禁錮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弊法으로 古今에 없던 것이라고 하였다. 崔鳴吉(1586~1647)은 인재를 뽑는데 있어 아버지의 성을 보는 것은 있으나 어머니의 族은 묻지 아니하는데, 지금 서얼의 법은 영원히 禁錮시키는 것이기에 매우 부당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외에도 李珥(1536~1584), 趙憲(1544~1592), 李元翼(1547~1634), 柳成龍(1542~1607), 金長生(1548~1631), 李恒福(1556~1618), 吳允謙(1559~1636), 張維(1587~1638), 金昌集(1648~1722)과 같은 명현들이 서얼의 차별에 대한 부당함을 이야기했음을 소개하고 있다.
자료 중반부 이후에는 金祖淳(1765~1832)과 趙萬永(1776~1846)의 啓를 발췌해 놓았다. 이 둘은 당대 세도가로 서얼 허통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실현시켰던 인물이다. 자료에는 이들이 주장했던 서얼 차별의 부당함을 소개하였는데, 실제 이들의 노력은 결실을 봐서 「癸未節目」을 반포케 하였다. 이 절목은 성균관 유생들의 극렬한 반대에도 끝내 관철되었는데, 서얼에게 淸職의 길을 다시 열어주고, 종래 정3품까지의 제한을 종2품까지 격상 시키는 조치가 포함되어 있다. 자료 말미에는 이때 獻議한 文武 鄕宰가 50여 인이 넘으나, 이들의 발언은 모두 싣지 못함을 세주로 기재해 놓았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서얼의 통청 과정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국초에 법으로 정해진 서얼금고법은 조선후기 사회적 변동에 따라 통청 요구로 이어졌다. 이는 인재를 등용하는데 있어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이기에 본 자료에 소개된 것처럼, 여러 명현들이 통청을 주장했던 것이다. 또한 16세기부터는 서얼에 대한 通淸 운동이 전개되어 갔다. 1777년의 丁酉節目과 1823년의 癸未節目, 그리고 1851년의 통청은 이러한 노력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아직 사회적인 관념으로는 서얼들에 대한 차별은 잔존하고 있었다. 특히 향촌에서는 書院이나 鄕校에서 차별이 여전하였고, 서얼들은 관권의 협조를 받아 서원이나 향교에서의 통청도 이루어내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지역 마다 차이가 있으나 19세기 이후 대체로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는 분위기였다. 본 자료가 현풍향교에서 작성된 것도 19세기 이후 어느 시점, 향교에서의 서얼 통청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