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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년 봉화향교(奉化鄕校) 사마록(司馬錄)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5+KSM-XZ.1612.4792-20130630.Y131180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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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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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방목
내용분류: 정치/행정-과거-방목
작성주체 권극명, 예안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향교길 11-10
작성시기 1612
형태사항 크기: 36 X 25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봉화 봉화향교 /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향교길 11-10
현소장처: 봉화 봉화향교 /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향교길 11-10

안내정보

1612년 봉화향교(奉化鄕校) 사마록(司馬錄)
봉화지역에 거주하거나 본관이 봉화인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여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인물들의 명부를 기록한 사마록으로 그들의 응시 당시의 신분과 거주지 및 본관, 자, 생년을 기록한 귀중한 문서이다. 봉화 금씨와 안동 김씨에서 배출된 생원, 진사는 모두 20명으로 전체 30명의 66.67%를 차지하고 있으며 입격자를 다수 배출한 주요 성관이 봉화안동, 예안봉화와 그 인근을 본관으로 하는 토성집단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봉화지역의 사족의 구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조선후기 향교연구』, 윤희면, 1990, 일조각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91, 慶尙北道
『조선시대 향촌사회사』, 정진영, 1999, 한길사
『조선시대 양반과 향촌사회』, 김현영, 1999, 집문당
『한국의 과거제도』, 이성무, 2000, 집문당
『CD-ROM 사마방목』,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1, 서울시스템주식회사
『역사와 담론』58, 이연숙, 2007
『이화사학연구』41, 박진철, 2010
정은영,이수환

상세정보

萬曆48년(1612)부터 辛卯年(1891)까지의 봉화지역에 거주하였거나 본관이 봉화인 인물들의 생원, 진사시 합격자 명부인 사마록.
[내용 및 특징]
봉화지역에 거주하거나 본관이 봉화인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여 生員, 進士試에 합격한 인물들의 名簿를 기록한 司馬錄이다. 조선시대 문과의 예비시험적 성질을 갖고 있었으면서 또한 그것과 별개의 성격을 가진 시험이었던 생원, 진사시는 고려시대의 國子監試를 계승한 것이었기 때문에 監試라고도 하였으며 멀리 周代의 鄕擧里選法에서 鄕學의 生徒를 國學에 천거하고(造士) 국학의 學生을 인사권자인 大司馬에서 천거(進士)한다는 것에 연원하여 司馬試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과거제도의 연원은 보통 漢代의 選擧制(賢良科)에 두고 있으나 6세기말 隋文帝 때 비롯하여 唐宋代에 完備되였다고 함이 옳다고 하겠다.
조선시대 양반이 자신들의 신분을 획득하고 지배집단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는 길은 과거에 합격하여 官職을 갖는 것이었다. 즉, 양반의 신분적 지위와 특권을 유지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관직이었다. 나아가서 관직보유는 당대에서의 위세를 가늠하는 척도였으며, 그 양반이 소속되어 있는 가문의 위세는 과거급제자의 숫자와 관직의 高下에 의해 좌우되기까지 하였다. 과거에 급제하는 일이 지배 계층에 들어갈 수 있는 최대,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물론 조선 초기에 있어서는 과거 이외의 방법으로 지배계층이 되기도 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과거의 중요성은 더욱 커져 갔다. 조선시대의 양반은 관료로서 국가기구를 장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在地士族으로서 향촌사회까지도 지배하였다. 이 중 국가기구를 장악하고 있던 관료들은 대부분 과거 급제자들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지배집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조선시대의 충원기제인 과거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고 과거 급제자와 관련된 많은 정보가 담겨져 있는 司馬錄은 과거제의 운영 실상의 보여주는 기본 자료가 된다. 본 문서는 봉화지역에 거주하였거나 본관이 봉화인 이들의 사마록 입격 실태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일반적으로 양반사족의 지방 지배력이 기초하고 있는 권력과 위신을 창출해내는 원천은 중앙권력과 관계를 가지는 관직, 생원·진사를 배출하는 司馬試와 문과 등 과거에의 합격, 유향소·사마소·종족조직 등의 사회조직에의 참여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밖에 경제력 또한 중요한 권력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반사족의 경제력 확보는 고위 관직자에게 있어 관직은 그 자체가 재산을 증식하는 토대였으므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이는 다시 문과 등 과거합격과 연관되어 있다. 과거 합격자의 수와 관직은 개인과 그 가문의 권력, 재산, 위세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조선시대에 있어 과거시험이란 사회적 진출의 관문이 되고, 사회적 지위 공인의 수단이 되며, 가문의 성쇠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요인으로 작용했었기 때문에 과거합격자 명부는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 하겠다.
이렇듯 지방 사족들은 다양한 사회적 지위 유지 노력을 전개하였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문과 급제를 통한 관직 획득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조선시대 전 시기를 통해 지방 거주 사족이 문과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특히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서울과 지방 사족 간의 관직 진출 격차는 더욱 커져 갔고 이러한 현실 속에 지방 사족이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포기할 수 없었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司馬試이다. 사마시 入格은 곧바로 入仕가 보장되지는 않지만 국가로부터 士族으로서의 지위를 공인받게 된다는 점에서 지방 사족에게는 대단히 중요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문과 급제를 통한 관직 진출이 어려운 상황에서 지방 거주 사족이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국가로부터 공인받는다는 것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 유지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특히 사마시 입격자인 생원·진사는 수적인 면에서 문과 급제자의 3배가 넘는데다 재지적인 성격이 강해 사족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크다. 사마시를 거쳐 생원·진사가 성균관에 입학하지 않고 향촌 사회에 머물면서 그 사회의 지도자로서 존재하였다. 이들은 특히 향촌사회에서 양반의 근간을 이루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험이나 추천에 의해서 중앙의 관원으로 진출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사마시 입격자 수는 그 가문과 그 지역의 위상을 가늠할 수도 있었다.
생원, 진사시는 조선시대의 양반관료들의 최고의 등용문인 文科의 응시자격을 얻기 위한 시험 내지 성균관 입학자격시험 등으로 인식되어 왔는데 조선후기의 下代로 내려올수록 그러한 측면 보다는 士類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공인받기 위한 시험으로 그 성격이 변화하였다. 그러나 19세기 후기에 이르면 생원, 진사시는 覆試를 면제받는 특혜합격자들의 量産으로 자격시험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가 없게 되었음은 물론 사류로서의 사회적 지위가 공인되는 시험이라 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후기의 사류들의 일반적인 風潮는 관직취임 보다는 재야에서 학문연구와 후학지도에 힘쓰는 것을 더 큰 보람으로 여겼기 때문에 생원, 진사시 합격후 문과에 응시하지 않는 것(不赴擧)과 응시하여도 많이 떨어진 것(累擧不中)을 자랑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才勝德이면 小人이요 德勝才라야 君子가 된다’는 書經의 구절을 暗誦하면서 영리하고 약삭 빠른 출세주의자 보다는 우직한 재야사인들을 높게 평가하였던 사류들의 유교적 사회풍조 때문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마시 입격자인 생원·진사는 幼學보다는 특정한 성격을 지니는 집단으로 국가가 운영하는 科擧의 합격자라는 공통의 성격을 갖고 있다. 이들은 문·무과나 雜科 합격자와는 달리 入仕가 보장되지는 않았지만 국가로부터 사족으로서의 지위를 공인받은 신분이라는 점에서 유학과는 구분된다. 그렇기에 사마시 입격자는 양반사회 내에서 일정한 지위를 확보하는데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사마시 입격자 명단은 국가에서 발표한 것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에 변조나 신분의 冒稱, 冒錄이 거의 불가능하며, 단순한 합격자 명단에 그치지 않고 사마시 입격자에 대한 정보를 비교적 풍부하게 담고 있다.
이 문서에 기록된 사마시 입격자를 배출한 姓貫은 모두 12개의 성관으로 安東 權 2명, 安東 金 8명, 奉化 琴 12명, 羅州 朴 1명, 漢陽 趙 1명, 延安 李 1명, 淸州 鄭 1명, 昌寧 成 1명, 延安 金 1명, 花山 李 1명, 禮安 金 1명으로 이휘봉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거주지가 봉화이거나 봉화를 본관으로 하는 이들임을 알 수 있다.(기록 상으로는 2명(이휘봉, 김주우)이 봉화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邑誌』 등을 통해서 김주우김주국의 동생으로 적어도 일정기간은 봉화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이들 중 봉화 금씨와 안동 김씨에서 배출된 생원, 진사는 모두 20명으로 전체 30명의 66.67%를 차지한다. 사마시 입격자를 다수 배출한 주요 성관이 봉화안동, 예안봉화와 그 인근을 본관으로 하는 토성집단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봉화지역의 사족의 구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특히 봉화 금씨가 가장 많은 입격자를 배출하고 있다는 것은 이들이 봉화에서 차지하는 정치, 사회적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고 하겠다.
사마록에 기록되고 있는 전체의 시기가 17세기 초반부터 19세기 후반 과거제가 철폐되기까지인데 그 이전의 기록이 없어 양상을 살펴보기는 어렵지만 전반적으로 17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조선 후기로 갈수록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사마록 입록이 문과 응시의 필수조건이 아니었기 때문인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사마록 입록이 문과 응시의 필수조건이 아닌 상황에서 합격에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 사마시 준비에 소홀하게 하였을 것이기도 하겠으나 그렇다고 사마시를 포기할 수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양반 사족으로서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유지하는데 사마시 입격은 가장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 문서에 기록된 적은 인원으로 당시 봉화지역의 전체 사족의 주도권을 투영시킬 수는 없지만 적어도 주요 성관이 입격자 배출 추이와 대체로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봉화 지역의 사족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입증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를 통해서 보는 사마시의 입격시 평균 연령은 36.37세로 연령별로는 10대 2명(6.67%), 20대 7명(23.33%), 30대 8명(26.67%), 40대 11명(36.67%), 50대와 60대가 각각 1명(3.33%) 씩이다. 40대에 입격하는 경우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30대 순이다. 20대부터 40대까지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오랜 기간 동안 사마시에 입격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향촌사회에서는 생원, 진사로서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지위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이렇듯 오랜 기간을 투자하여 사마시에 입격하고자 노력했다는 것은 향촌사회에서 생원·진사의 사회적 지위가 사족으로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마지막으로 응시한 과거 종류별로 살펴보면 式年試 12회 14명, 增廣試 11회 16명으로 식년시와 증광시에 입격한 횟수나 입격한 인원이 비슷한 것으로 통상적으로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식년시에 있어 지방 출신들이 합격률이 높은 것에 비해 증광시에도 그와 비슷한 추세를 보이는 것이 봉화지역이 한양과의 인접성으로 인해 비정기적으로 임시적으로 시행되는 증광시에 있어서도 그리 큰 어려움이 없이 응시할 수 있는 지리적 특성이 반영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지방 사족들은 그들이 속한 지역사회의 지배세력으로 존재하며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과거 합격자는 사족 내에서도 우위를 차지한다. 즉, 양반이 자신들의 신분을 획득하고 지배집단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는 길은 과거에 합격하여 官職을 갖는 것이었고 양반의 신분적 지위와 특권을 유지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관직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사마시 입격자인 생원·진사는 수적인 면에서 문과 급제자의 3배가 넘는데다 재지적인 성격이 강해 사족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컸다. 이들 중 많은 수가 향촌사회에 머물면서 그 사회의 지도자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과거 급제자와 관련된 많은 정보가 담겨져 있는 司馬錄은 과거제의 운영 실상의 보여주는 기본 자료가 된다. 본 문서는 봉화지역에 거주하였거나 본관이 봉화인 이들의 사마시 입격 실태를 보여주는 자료로서 봉화 지역의 사족의 사회적 지위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라고 하겠다.
『조선후기 향교연구』, 윤희면, 1990, 일조각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91, 慶尙北道
『조선시대 향촌사회사』, 정진영, 1999, 한길사
『조선시대 양반과 향촌사회』, 김현영, 1999, 집문당
『한국의 과거제도』, 이성무, 2000, 집문당
『CD-ROM 사마방목』,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1, 서울시스템주식회사
『조선시대연구』36, 최진옥, 2006
『역사와 담론』58, 이연숙, 2007
『이화사학연구』41, 박진철, 2010
정은영,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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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년 봉화향교(奉化鄕校) 사마록(司馬錄)

司馬錄
夫奉之爲縣古矣在昔爲玉馬於今爲鳳
城上下數千餘年間地(靈)攸(鍾)人卞命▣接
踵聯武而悠悠世代文獻無徵曉洞歸龍濕
雲己㪚靑山過▣香草無跡越在中古耳
目所逮遺風尙在者有若▣夻權進士曁其
嗣權生員有若文村琴進士時稱五▣公
子有若八溪朴生員又登庚子文科有若勿
野琴生員有若訥溪金進士有若昌坪朴
進士俱以不世卞大鳴於鄕榜雖有先後朴
則難兄弟名芳蓮籍交結蘭(?)講信春
秋投分膠添吟詠風月醉酲花(柳)其涵養
性情深討信義至于今想見於七章中矣
爾後無聞半百星霜其間從事於文翰塲
不一其數不得占一名其有係於地氣衰替不
無甚乎天荒一破邑運重通曰在庚戌歲金
令公而和巍擢桂籍如我牛馬走亦忝運科
大是吾鄕幸而逮至壬子金君萬古以妙㱓
扷萃卞得中進士金君任大朴君晦而幷
捿生員於丁巳之冬金君天支繼占生員又
己未前後八九季連袂成功無虛歲文
風之振若是乎不愧於古先人則慕古先風
而繼古先跡豈非吾輩之大幸而急然行之
不可廢者乎鳴呼循環天運往復有期昔
之所▣▣▣之間以爲陳(?)尤不能不以之興懷
則(?)代雖異昔人興感若合一契未嘗不(?)文嗟
悼於是金君任大先倡脩契之議並和同聲
之應以賁餙吾鄕一勝事凡有契必有會
有會必有所向第 國運不吊邊務日聳
創堂設所似非其時故先修講信以成壎▣待
時創所尙未晩也噫修契之名不一其(?)有
一庚契有同心契而人心不古(?)兩翻雲斟香(?)
鮮弟兄然(?)而反面側目胡越▣膽朝成▣金
夕同落葉其視諸洛中眞率▣亭▣▣不▣
愧乎今我一契不可等比於前所云云則提壺挈
榼雖是講信之不可廢而講信之實不在於提
挈壺榼而己吟風詠月縱云騁懷之所當先而騁
懷之道亦不在於吟詠風月而己則願我諸君
子一契心腹百季金石以古人開心見誠爲法以
末俗面輸▣矣爲戒其亦勉之哉其亦勉之哉
皇明萬曆四十八年春(?)正月下澣花山權
克明序
庚戌式年春榜
生員進士 權克明 晦甫 丁卯 安東
壬子式年春榜
進士 金柱宇 萬古 (戊戌) 安東
丙辰增廣春榜
生員 琴大遂 亨伯 丙子 奉化
丁巳增廣秋榜
生員 金柱國 任大 丙戌 安東
生員 朴焞 晦而 壬辰 羅州
己未式年秋榜
生員 金柱旻 天支 甲申 安東
進士 琴是正 子心 丙申 奉化
丁卯式年秋榜
生員 琴以古 靜如 庚午 奉化
癸酉式年秋榜
生員 琴純古 樣如 丁亥 奉化
生員 趙以周 伯承 壬辰 漢陽
追入
壬子增廣秋榜
生員 琴是調 景平 甲申 奉化
己酉式年秋榜
進士 琴是諧 克成 丁亥 奉化
乙亥式年秋榜
生員 金柱漢 倚老 癸卯 安東
辛卯式年秋榜
生員 金揚烈 克紹 甲子 安東
甲午式年秋榜
生員 李鍝 益(?) 丙午 延安
丁巳增廣春榜
進士 琴瑞奎 文徵 壬申 奉化
進士 琴聖奎 文(?) 丙子 奉化
進士 鄭鐸 汝宣 己亥 淸州
己卯增廣秋榜
進士 金爾銘 (??) 壬子 安東
甲午式年榜
生員 琴沃心 (??) 癸酉 奉化
庚寅增廣榜
生員 琴聖心 希伯 庚申 奉化
己亥增廣秋榜
生員 金泰運 相元 丙辰 安東
己酉式年秋榜
生員 成巨寅 寅祥 庚午 昌寧
丁卯式年春榜
生員 金相玄 汝黙 己丑 延安
丁亥增廣秋榜
生員 權馹 冀仲 辛亥 安東
庚戌增廣春榜
生員 李輝鳳 德祖 己卯 花山
乙酉增廣秋榜
進士 琴佑烈 景祖 甲申 奉化
辛卯增廣春榜
進士 金致根 華汝 丙午 安東
進士 金進銖 學一 壬戌 禮安
進士 琴龍斗 元禮 丙午 奉化
大科謂之龍榜而次於龍者馬故目至小曰馬
而取古司馬(?)稱以(?)之夫司馬(?)好其(?)也
士之登就榜仕(?)朝者至閑固不如司馬(??)
(??)仰(?)鄕曲間(??)或未(?)爲己試無故
之歸 則不(?)若司馬(?)猶(?)席上(?)唯(?)
(?)也(?)民庶敬(?)守(?)愛之惟(??)仰(?)自通
自有所不能己者此我 朝金盛時司馬者之
所以有稧(?)所點化出大平氣像此也十室(?)
鄕 多士攸作司馬之聯嗣一(?)初(?)讓(?)(?)
郡(?)往來追隨醉酲酉州唱(??)舜日月
至于今風韻之餘立後人視(????)盛矣不
(?)六七十年來爲擧子力於業此不爲小(?)無
一人勇占省選至大己矣小無蔑如遂(?)司馬並
(?)其稧(?)所而墜盡(?)山(?)察察章甫踽踽相(?)
聚首(?)嘆曰(?)生員乃吾先(?)進士乃爾祖吾
(?)爾未趾(?)美吾先與爾祖之在天其置(?)吾
有後非不(?)率修遺(??)莫(?)能雖或(?)擅
場文藝而善(?)屈(?)此之吋榮有笑蓉契禮(?)
上舍會彼契其契會至會此豈(?)有出人(?)非
吾鳳(?)人所可合及耶 此固未一中知也以(?)或疑
其邑運之否或諉以天荒之甚徒有不若人(?)恥
未免目解體(?)失載胥我溺(盒)往盒(?)殆
將泯乎終(?)以振沃(?)萬一豈意近歲有卞
能舊踵(??)名自庚而己十年年間四五其司
馬復見古先人慶光(?)今日(?)是(?)荐赫乎句
悉至自(?)土移他由他邑贅玆者而(?)之則(?)不
止六七八而方且利至鋒刀誓將一戰勝齋矣雍
(?)之先封謂無(?)於吾厲(?)無可屈伸人左右
指(?)有(?)卽雖謂之天荒大破邑運(?)泰可也
一日阿豚柱國(?)朴君晦而同解告余曰今也吾
鄕己有傾否(??)重修我古人(?)事以開他日
大盛之基如何余曰銅甁物也(?)好古(?)愛(?)況此
吾儒古(?)有(?)倡(?)明之繼(???)則夫惟不
拭目(?)聳耳也哉(?)是晦而司其(?)晦甫
叙至義遂名之曰司馬稧噫斯稧之成豈偶(?)
哉廢久維新在(??)古實(???)斯文隆替
而天之所興人不敢不作者也猗欲題哉然(?)君
子亦生直爲張皇(?)大以苟賓(?)隣壤人而己
▣其自▣▣▣▣▣▣▣▣▣▣▣文而
造士大樂正論造士之秀者告于王而升諸司馬曰進士大▣▣
▣▣進士之賢者告于王而亭其論論定然後官之任官然後▣
之位定然後祿之又▣▣▣▣六年罷▣公▣▣▣▣▣▣
▣▣氏▣…▣
釋菜命祭酒博士講論經義▣…▣
學舍千二百(?)諸生員額至三千二百▣…▣
若其進士之科始於隨而專尙文辭唐之十二科推進士明▣
久行而進士以聲韻爲學宋亦有此二科而進士得人爲盛其
第一甲第二甲則敕賜進士及第三甲四甲則進士出身五甲
則同進士出身皇明回之文曰文進士武曰武進士海東制擧
式遵中華而高麗則有罔進士如宋制我▣…▣
之規而謂之生員所試者四書疑五經▣…▣
升之制而謂之進士所試者詩賦聲韻爲學也進士▣…▣
▣太學生雖有▣用路而未▣爲釋謁立朝▣…▣
科則不復諸生員進士故生▣…▣
爲司馬者實同升諸大司馬之古制向所▣…▣
科故因(?)其(?)夫進士也生員也旣有一定之(?)而又必別稱爲司
馬如是者盖亦好其(?)而幕諸古也噫居今之世幕古之名
是誠生進者之好事而今日司馬之會又是吾鄕進古之擧
則好事中好事豈非衰世小縣之一大勝耶況春服旣成
有俗沂風詠之育次則雖聖人亦且無之向從容(?)祖講君
子交際之信義則初非衆富兒辭紅者之比猗歟羙哉或
者謂是會也苟非曾爲司馬者則雖登龍之客亦未免爲
(?)蔡惡是何言也第一第二三甲四甲式賜進士及第式
賜進士出身乃古之規也則第二甲如吾病龍雖式(?)首而
從司馬之後(?)不至於(?)濫也諸君子以爲如何噫斯言戱
之耳中淸向旣以(?)語跋晦甫之叙猶有所未盡者今又(?)
古實(?)而踵其題吁亦蔓失是年春李欲望苟全書
于桂塲洞寓居(?)書小窩之聘(?)(?)
▣…▣
戊子七月坐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