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 慶尙道 英陽縣 소재 英陽鄕校에서 居接을 실시하고 耆老會를 개최한 뒤, 참석 耆老 30명의 성명과 字, 본관 등을 기재한 명부
己丑四月十三日 居接時堂上會話錄
[내용 및 특징]
1889년 4월 13일부터 15일까지 慶尙道 英陽縣 소재 英陽鄕校에서 居接을 실시한 뒤, 耆老會를 개최하였는데, 이때 참석한 耆老 명부이다. 자료의 표제는 ‘己丑四月十三日 居接時堂上會話錄’이며, 耆老들과 居接 때의 임원 명부, 이어 趙承基의 識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영양 영양향교에는 본 자료를 비롯하여 『老人勝會錄』, 『耆老會錄』, 『鄕校耆老會話錄』이라 표제가 붙은 18~19세기 때의 기로회 명부 세 편이 함께 소장되어 있어 비교 검토가 가능한데, 본 자료는 이 중에서도 가장 늦게 작성된 것이다.
명부 다음에 수록되어 있는 조승기의 識는 居接과 기로회가 개최되는 경위를 간략히 언급해 놓았다. 작성자 조승기도 기로 명단에서 확인되는데 54세의 나이로 이 모임에 참석하였다. 識에서는 우선 養老와 養士를 위해 향교에 別所가 설립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설치한 지 십수년이 되었지만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기에, 금년 봄 고을의 長老들이 개탄하며 居接의 명을 내렸고, 이에 興起하게 되었다며, 居接이 개최된 경위를 언급해 놓았다. 別所는 향교나 서원 등에서 특정한 일을 거행하기 위해 내외의 구성원들이 자금을 형성해 놓은 것을 의미한다. 당시 영양 영양향교에서 居接을 통해 교육적 기능을 수행하고, 耆老會와 같은 養老 행사를 통해 향촌 교화를 표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일찍이 권장하는 방도가 없었지만, 이상과 같이 居接을 실시하니 고을의 生徒들과 인근 고을의 人士가 모여 들어 가히 볼만 했었다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4월 13일부터 개최된 거접은 3일 간 개최되어 4월 15일에 파하였는데, 여기서 끝나지 않고 밤에 고을의 어른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술 마시는 모임이 열렸다며, 居接 이후 耆老會가 바로 개최된 경위를 언급해 놓았다. 이어 말미에는 諸生들이 耆老들의 이러한 모임을 본 뒤, 서로 권면하고 나아가는 자세를 잊지 말 것을 당부하며 識를 마무리하고 있다.
본문의 耆老 명단은 나이 순서대로 수록되어 있다. 먼저 성명을 기재하였으며, 그 아래에 세주로 해당 인물의 字와 출생 간지, 그리고 다시 그 아래에 姓貫을 기재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어 말미에는 居接을 주관한 接有司의 명단과 영양 영양향교 校任인 掌議와 齋有司 성명을 같은 형식으로 기재해 놓았다. 말미의 接有司와 校任을 제외하고 명부에 수록된 耆老는 모두 30명으로, 최고령자는 1824년 甲申生으로 66세인 趙粹容이며, 최연소자는 1838년 戊戌生으로 52세인 趙秉倫과 吳世寧이다. 연령대별로는 60대가 12명, 50대가 18명으로 나타난다. 전반적으로 이전에 작성되었던 기로회 명부 보다 참여 기로의 연배가 낮은 편이다. 耆老 다음에 수록된 接有司는 모두 6명으로 이들의 연배는 50세에서 39세까지이며, 이어 향교의 副任인 掌議 2명과 齋有司 1명의 성명도 기재되어 있다. 향교의 首任인 上有司는 기로 명부에 해당 직임이 기재되어 있는데, 53세의 趙秉時로 확인된다. 명부에 수록된 耆老들을 姓貫별로 나열하면, 漢陽趙氏 18명, 咸陽吳氏 5명, 安東權氏 3명, 奉化琴氏 1명, 英陽南氏 1명, 全州柳氏 1명, 東萊鄭氏 1명 순이다. 接有司 이하 임원과 교임은 漢陽趙氏 3명, 咸陽吳氏 3명, 安東權氏와 野城鄭氏 각 1명으로 나타난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향교 운영의 일면과 19세기 영양현 재지사족들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먼저 조승기의 識에서 확인되듯이 養老와 養士의 명분으로 영양 영양향교에 別所가 설립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별소는 향교의 공식적인 재정 이외에 축적된 기금을 운영하는 곳으로, 향교에서 치러지는 특별한 행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識에서 확인되듯이 영양 영양향교에서는 居接과 耆老를 위해 別所를 건립하여, 거접을 통해 교육을 장려하고 耆老를 통해 유교적 질서 윤리와 향촌 교화를 표방하였던 것이다.
한편, 본 자료에 수록된 30명의 耆老들은 당대 영양현 내에서 명망을 가지고 있던 인사들로 추정된다. 30명 가운데는 영양 영양향교의 首任도 포함되어 있으며, 적지 않은 인사가 邑誌類 人物條에서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로회 참여 인사를 많이 배출한 가문일수록 영양현 내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가문으로 이해 할 수 있다. 본 자료에는 절반이 넘는 인사가 漢陽趙氏 가문 출신으로 확인된다. 이 가문은 17세기 이래 영양현을 대표하던 사족 가문이었기 때문에 다수의 耆老들을 居接 때에 참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英陽郡誌』, 英陽郡誌編纂委員會, 1970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경성대학교 출판부, 1992
이광우,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