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7년부터 1856년까지 풍기향교(豊基鄕校)에 등록된 액내교생만의 인명을 기록한 액안
[내용 및 특징]
풍기향교 액내교생의 명단을 기록한 額案으로 액내교생 50명의 인명과 생년 등에 관한 사항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총 9건 기록으로 丁酉年 8월부터 丙辰年 12월까지인 20년의 기록이 같이 되어 있다. 풍기향교에서 앞서 작성된 액안과는 다르게 정확하게 50명의 액내교생의 수가 작성연대에 맞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하겠다.
풍기향교의 교생의 명단을 기록한 것으로는 액안을 비롯하여, 교안, 향록 등이 있는데, 각기 작성 시기를 달리하고 있지만 명백한 차이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교안과 액안을 비교해 봤을 때 교안은 향교 교생을 額內와 業儒, 額外, 童蒙 등으로 구분하여 작성하였는데 향교에 입교하는 교생이 더 이상 양반의 자제들만이 아닌 여타의 계층으로 충족되어 가는 시기에 신분적 차이를 두고자 한 것임에는 분명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더군다나 액안은 교안에 있던 업유, 액외, 동몽 등과도 차별을 두고자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영남의 다른 지역에서 작성되던 청금록이나, 유안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겠다. 다만, 교안에 기록되었던 액내생 만을 따로 액안으로 작성한 것은 분명 교안에 등재된 인물들과의 차별을 두기 위한 것임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겠다.
향교에 입교한다는 것은 국가로부터 혜택을 입는 계층으로 편입되는 것이었으므로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양반뿐만 아니라 하층민들도 향교에 앞다퉈 입교하게 되었고, 무분별한 향교 교생의 증가는 많은 병폐를 야기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로인해 향교 교생으로서의 신분 유지를 어렵게 한다는 명목하에 교생고강을 강력하게 시행하기도 하였으나 사회제도의 와해로 인하여 실효를 거둘수가 없었고, 다른 방편으로 시도된 향교의 校籍을 강화하는 측면도 크게 성과를 보지 못하게 되어 교생으로부터 야기되는 문제는 사그러 들지 않았다.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교생의 신분이 정리되길 바랬던 향촌사회의 사족들은 향교 교생으로서의 신분적 위계질서 확립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그나마 향교에 입교하였지만, 적어도 신분적 구분은 명확하게 하기 위해 그들만의 각종 명부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청금록’, ‘유안’ 등이 있으나 풍기향교에는 그러한 이름으로 작성된 것이 없어 풍기향교 운영실체들이 어떠한 자구책으로 신분지배질서를 성문화한 구분 방법을 사용하였는지는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교안과 대비되는 액안을 통해서 18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나름의 명부를 작성한 기조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하겠다.
양반들의 군역면제가 조선후기로 오면서 점차 보편화되는 추세에게 굳이 향교에 교생으로 입학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양반들은 교생으로의 입학을 회피하였을 뿐 향교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유효하였다. 향교는 고을의 유일한 관학이자 공자의 위패를 모신 성리학전파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양반사족들은 종래 교생으로 입교를 피하는 대신 그들만의 명부를 작성하고 향교의 운영에 지속적으로 관여하였다.
액안에 등재된 성씨 중 절대 다수를 黃氏가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풍기향교의 모든 액안에 공통으로 드러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본 문서에서도 정유년에 26명을 비롯하여 병진년에는 29명까지 전체의 기간동안 50% 내외의 수를 차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풍기의 토성은 鄭, 安, 皮, 吳, 朴, 金 등의 土姓吏族으로 일부는 도태되고, 일부는 사족으로 성장하였다. 黃씨의 경우 일찍부터 풍기지역으로 이주한 성씨로 본관이 창원, 평해 등으로 일찍부터 유향소를 조직하여 토성이족을 대신하여 향촌질서를 재편하였다. 이는 향안에 등재된 성씨를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 향안에 등재된 성씨는 황씨와 이씨를 중심으로 김씨, 안씨, 박씨, 權씨 등이고, 이들은 앞서 토성과 이주 사족토성 성관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적구성에 있어서는 조선시대의 향촌사회는 상당히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 일률적으로 설명하기 곤란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자료적 가치]
19세기 중반에 작성된 풍기향교 액안으로 당시 풍기향교 운영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이들의 인적구성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풍기향교에 남아 있는 향교 교생과 관련된 교안 및 향안과 비교하여 풍기지역의 향촌질서의 변화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풍기지역의 토성과 이주 성씨 등 당시의 향촌질서가 어떻게 유지되는 지에 대한 대략적인 면을 인적구성으로 보여주는 자료라고 하겠다.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嶺南士林派의 形成』, 李樹健, 嶺南大學校 出版部, 1979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경성대학교 출판부, 1992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윤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