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및 특징]
1763년, 1784년, 1796년 慶尙道 英陽縣 소재 英陽鄕校에서 개최되었던 耆老會의 참석 耆老 명부이다. 자료는 『老人勝會錄』이라는 제목으로 엮여져 있으며, 본문은 1763년의 「育英樓耆老會題名」, 1784년의 「鄕校耆老會題名」, 1796년의 「聖廟重修落成養老會題名」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3회에 걸쳐 개최된 耆老會의 참석 耆老들은 각 명부에 나이 순서대로 수록하였다. 아울러 해당 耆老의 성명 아래에는 字와 기로회 당시의 나이도 함께 기재되어 있다. 한편, 영양 영양향교에는 본 명부 이외에도 19세기에 작성된 『耆老會錄』, 『鄕校耆老會話錄』, 『居接時堂上會話錄』이라는 제목의 기로회 명부 3편이 전해져 비교 검토가 가능하다.
첫 번째 명부인 1763년의 「育英樓耆老會題名」에는 25명이 수록되어 있다. 명부 가장 앞에는 당시 英陽縣監로 본 기로회를 지원했던 李彦藎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 이하 25명은 순서대로 나열하였다. 가장 마지막의 趙龍道와 趙居默은 字만 기재하고 나이는 기재하지 않았는데, 이들은 기로가 아님에도 기로회를 주관한 인사이기에 이름을 나란히 한 것이다. 다만 趙龍道는 1784년의 기로회 명부에서도 확인되는데, 그때의 나이로 미루어 보아 1763년 당시 45세였음을 알 수 있다. 명부 수록자 25명의 연령대는 70대 3명, 60대 12명, 50대 7명, 기타 3명으로 최고령자는 74세의 南正夏로 확인된다. 이들을 다시 성씨별로 나열하면, 趙氏가 13명으로 절반을 넘게 차지하고 있고, 그 외 權氏 3명, 成氏 2명, 吳氏 2명, 金氏, 南氏, 朴氏, 辛氏, 李氏 각 1명 순이다.
1763년 기로회 명부 다음에는 ‘昭陽協洽端陽日’, 즉 1763년 5월 5일에 작성된 간략한 기로회 소개 글이 수록되어 있다. 이 글에 따르면 본 기로회가 ‘香山故事’, 즉 唐나라 때 白居易가 만년에 香山에서 만든 香山九老會를 모방하였으며, 25명 중 수령과 연소자 2명을 제외한 耆老 23명의 나이를 합치면 1,416세이고, 末座의 2인은 執事라고 하였다. 이어 말미에는 본 기로회 명부에 대해 언급한 太守, 즉 당시 영양현감 이언신의 평가를 수록해 놓았다. 이언신은 年末도 여러 耆老들과 함께 自書하여 명부에 수록되어 있어,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평가하고 있다.
1763년의 「育英樓耆老會題名」 말미에는 ‘耆老會題名後序’라는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작성 시기와 작성자는 확인되지 않는다. 後序에는 기로회가 개최되고 명부가 작성되는 경위를 앞선 글 보다 좀 더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먼저 우리 영양현은 이전까지 耆老會와 같은 遺俗은 없었다고 하였다. 이전까지 山翁과 野老들은 혹 남쪽 밭길과 북쪽 논길에서 지팡이를 짚고 呼邀하거나, 혹은 佳辰令節에 계를 결성해 술 마시고 유유자적하며 한가로운 세월을 보내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嘉會의 의례와 牲牢의 제물로 성대한 연회의 자리를 膠庠, 즉 향교에서 개최하여 一鄕의 耆老를 모셔서 음식을 마련해 잔치를 열어주니, 이것은 이전에 없었던 성대한 거사라고 평가하고 있다. 하물며 이때는 學樓, 즉 育英樓가 새롭게 만들어진 시기라 落成에 맞추어 諸生이 모여 학궁에서 다 같이 養老의 행사를 개최하게 되었으니, 이는 일시의 거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燕老하는 것은 仁을 보존하는 것이고, 耆老하는 것은 孝를 받들기 위해서이며, 尙齒하는 것은 尊敬과 仁孝, 그리고 恭敬의 도리가 세워지는 것이니, 천하의 선비들이 가히 권장할 만한 일임을 자부하고 있다. 74세의 최고 연장자부터 최연소인 末者까지 포함되어 있는 이 모임에서, 末者는 儒林의 任司이고, 燕禮를 주관하는 인사임을 밝혀 놓았다. 영양현에서 이들의 구체적인 위치는 확인되지 않지만, 영양 영양향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던 인사로 추정된다. 실제 趙龍道의 경우 영양 영양향교에 보존되어 있는 『執綱錄』에서도 확인되는 인사이다. 이와 같이 성대하게 기로회를 개최하였으나, 다만 80세가 넘은 어른 여섯 분은 연세가 너무 많아, 거동이 불편해 참석하지 못한 것이 흠이라며 아쉬움을 표명하고 있다. 한편, 이 행사에 대해 太守 李公, 즉 영양현감 이언신은 먼저 米饌을 마련하였으며, 행사가 있을 때 말 한필과 두 동복과 함께 와서 來會하여, 창백한 얼굴과 흰 머리가 그윽한 耆老들에게 초저녁부터 밤까지 拜跪하고 問言하면서 尊老와 敬士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성대하게 열린 기로회가 끝나자 바로 나이에 따라 이름을 列書하여 명부를 만들게 되었는데, 나이가 가장 어린 자가 여러 耆老의 끝에 自書하게 되니, 커다란 은총이 심히 두텁다고 하였다. 앞선 글의 작성자가 趙龍道와 趙居默 둘 중의 한 명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이로써 鄕黨은 선한 풍속, 즉 기로회를 서로 권장하는 것으로 삼게 되었으니, 이러한 흥함은 어진 원님의 겸손한 미덕에서 비롯됨을 칭송하였다. 그리고 아름다운 풍속은 후대에 전하지 않는 것이 불가하니, 이와 같이 대강의 내력을 서술하게 되었다며, 명부의 작성 경위를 밝힌 뒤 後序를 마무리 하고 있다.
본 자료의 두 번째 기로회 명부는 1784년의 「鄕校耆老會題名」이다. 여기에는 80세에서 65세까지 모두 30명의 기로를 수록해 놓았다. 연령대로는 80대가 1명, 70대가 16명, 60대가 13명이며, 이중 최연장자는 80세 趙喜益이며, 최연소자는 65세의 權壽得이다. 특히 趙喜益은 59세의 나이로 1763년의 「育英樓耆老會題名」에도 수록된 인물이다. 그 외 본 명부에 수록된 79세 朴宗絅과 66세 趙龍道도 이전 명부에서 확인되는데, 이때 趙龍道는 앞서 언급했듯이 연소했지만 행사를 주관하는 관계로 명부에 수록될 수 있었다. 본 명부는 연도가 별도로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앞선 명부에 수록된 趙喜益 등의 나이를 미루어 보아 1784년에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기로회 명부 수록자를 성씨별로 구분하면, 단연 趙氏가 12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 吳氏 4명, 權氏 3명, 南氏 3명, 鄭氏 2명, 琴氏, 金氏, 朴氏, 成氏, 孫氏, 朱氏 각 1명 순으로 나타난다. 한편, 명부 말미에는 임원을 별도로 기재해 놓았는데, 本所執任으로는 趙居善, 趙宅道, 成彦桶 3명, 養士堂有司로는 吳顯大가 기재되어 있다. 여기서 本所執任은 명확하지 않으나 영양 영양향교 교임으로 여겨진다. 비록 이 시기에 작성된 영양 영양향교 『執綱錄』은 전해지지 않지만, 앞서 작성된 『執綱錄』에는 趙居善과 趙宅道가 校任으로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유추가 가능하다. 그리고 養士堂有司는 육영이라는 이름대신 養士堂 또는 養士齋라는 명칭이 사용되는 것으로 보아, 育英樓 관리를 담당하는 임원으로 추정된다.
본 자료의 마지막 세 번째 기로회 명부는 1796년 6월 18일에 작성된 「聖廟重修落成養老會題名」이다. 1784년의 기로회와 더불어 1796년의 기로회도 개최 및 명부 작성 경위가 별도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1796년의 경우, 명부의 제목으로 보아 영양 영양향교 大聖殿 重修 落成式에 맞추어 기로회가 개최되었음을 추정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모두 16명이 기재되어 있는데, 가장 앞에 기재된 朴道翔은 당시 영양현감으로 확인된다. 수령의 신분으로 기로회에 참석하였기에, 가장 서두에 이름이 기재된 듯하다. 朴道翔 이하로는 나이 순서대로 기재되어 있는데, 이중 최연장자는 82세의 權壽頤, 최연소자는 70세의 鄭世觀으로 확인되며, 본 명부에 수록된 權壽頤, 趙運道 2명은 1784년의 기로회도 참여했던 인사이다. 수령을 제외한 명부 수록자를 연령대 별로 나누면 80대 2명, 70대 13명으로 나타나, 이전의 기로회에 비해 전반적으로 참여 연령대가 높아지는 추세임을 알 수 있다. 입록자를 성씨별로 나열하면 趙氏 5명, 吳氏 3명, 具氏 3명, 鄭氏 2명, 權氏, 琴氏, 朴氏 각 1명 순으로, 趙氏의 비중이 이전에 비해 점점 줄어들고 있음이 나타난다. 말미에는 1796년 기로회의 임원으로 本所執任 2명, 重修都監 3명, 贍學所都監 1명, 陪父兄 2명이 기재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향교 운영의 일면과 18세기 후반 경상도 영양현 재지사족들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본 자료를 작성하게 만든 耆老會는 국왕 또는 지방 수령이 퇴임한 관리 가운데 70세 이상 연로한 자들에게 향연을 베풀어 주던 행사를 뜻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지방에서의 기로회는 수령이나 향교 등에서 지역 내 연로한 인사를 대접하는 자리를 만들어, 유교적 질서 윤리에 입각하여 향촌 사회를 교화한다는 의도에서 개최되었다. 본 자료의 기로회도 향촌 질서 확인과 교화를 위해 영양 영양향교의 주요 행사와 맞물려 개최되었던 것이며, 적어도 1763년과 1796년의 기로회에는 교화의 책임을 지고 있는 수령이 간여 또는 주도했음이 확인된다. 특히 영양현은 기로회 개최와 관련하여 育英樓, 養士堂, 贍學所 등 향교 내 講學 기구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기로회와 같이 향촌 교화를 위한 행사에 향교가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본 기로회 명부에서 확인되는 인사는 영양 영양향교의 執綱을 역임하거나, 영양현 내에서 영향력을 일정 부분 끼치고 있던 사족 가문 출신들이다. 따라서 본 기로회 명부 수록자의 성씨 분포는 18세기 후반 영양현 내 재지사족 가문의 族勢를 일정 부분 반영한다. 이에 따라 3차에 걸쳐 작성된 기로회 명부 수록자를 중복까지 포함하여 합산하면 모두 71명인데, 趙氏가 30명으로 비중이 가장 높고, 이어 吳氏, 權氏, 南氏 등의 순으로 복수의 수록자를 배출하고 있다. 이들은 영양현을 대표하던 漢陽趙氏, 咸陽吳氏, 安東權氏, 英陽南氏 등의 사족 가문 출신으로, 영양 영양향교를 중심으로 이들 가문에 의해 18세기 후반 鄕論이 주도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