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4년 9월에 작성된 안동 지역에 유력한 재지사족의 인명과 관직 및 직임 등을 수록한 향록
[내용 및 특징]
甲午年 9월에 작성된 안동부 향록으로 현재는 안동시 하회마을 충효당 영모각에 소장되어 있다. 앞선 계사년의 향안 작성 후 1년만에 작성된 것으로 작성방식은 여타의 안동부 향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관직 및 직임과 이름, 나이 순으로 기록하였는데 첫머리에는 나이에 관계없이 觀察使를 기입하였다. 18세기로 접어들면서 향안의 작성에 있어 관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전의 향안에서는 수령이 입록된 예가 없었고 연령에 상관없이 향안 첫머리에 등재되는 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수령의 입장이 반영되어 지방 행정의 수반으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향안에 입안하여 향원의 자격으로 향중의 일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8세기 이후 향촌의 양반사회에서 가장 심각하게 전개된 것은 아마 서얼문제였을 것이다. 알고 있듯이 서얼은 정치 사회적으로 차별되고 있었지만, 경제적 기반과 학문적 식견에 있어서는 嫡孫 못지 않은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18세기 이후 각종 變亂에 적극 참여하기도 하였고, 향촌사회에서는 적손 중심의 질서에 대항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특히 서얼은 18세기 이후에 법제적이며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차별철폐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앙관직에서만이 아니라 향촌사회에 있어서도 鄕案·校案·院案 등 이른바 三案에의 입록과 입록의 순차를 나이에 따를 것[序齒]을 요구하고 있었다. 경상도 서얼을 중심으로 한 이들의 보다 큰 관심사는 바로 향촌사회의 현실적인 문제 즉, 三案에의 입록과 서치였다. 이러한 서얼의 요구는 영조 년간에 부분적으로 수용되다가 정조 원년에 〈庶類疏通節目(丁酉節目)〉을 통해 ‘外方의 鄕任 중 首任을 제외한 제반 等任에의 參用이 허용’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조정의 조치는 향촌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음이 보고되기도 하였고, 그것은 영남지역에서 더욱 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향촌의 양반사회에서 조정의 법을 정면에서 거부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안동에서도 1773년의 〈계사향록〉에 서얼이 공식적으로 입록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반 향원 뒤에 별도로 ‘新通’이라 하여 서얼들을 입록하고 있다. 말하자면 향안에는 수록하였으나, 서치는 아니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 향안에서 주목되는 점은 입록된 인물의 나이가 모두 60세 이상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국가의 曠蕩之典과 通淸關文이 연이어 하달됨으로써 안동의 舊鄕들이 서얼의 향안 입록을 정면에서 거부할 수도, 그렇다고 전면적으로 수용할 수도 없었던 사정에서 취해진 조치였다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향안 입록을 60세 이상으로 한정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서얼의 입록을 제한하고자 한 고육책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서얼들은 ‘甲規(나라 법)’을 거론하며 강력하게 항의를 하였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에서 1773년의 〈계사향록〉은 ‘罷案’이라는 조치를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고, 구향은 어쩔 수 없이 通同序齒를 한 新案을 작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서 말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임진(1772) 9월에 위로부터 廣蕩之典을 특별히 쓴다는 것과 通淸關文이 여러번 내려온즉 즉시 거행했어야 마땅하나 향중에 사고가 많아 명을 받들 겨를이 없었다. 지금 비로소 안을 수정하고 아울러 새로 참여하는 경우에는 나이에 따라 合錄하였다. 이것은 列邑에서 통행하는 법이다. 新鄕은 甲外多人이니 案의 말미에 써서 후일을 기다려 修案할 때에 변통할 계획이다. 그러나 이미 향중에 쓰여졌으니 이는 鄕員이다. 甲規를 논할 필요가 있겠는가?
즉, 1773년 계사년 향록의 罷案은 국왕의 하교와 관문을 받고 향안에 서얼을 입록하였지만, 이것은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序齒도 아니었고, 또한 60세 이상자 만을 대상으로 하여 서얼의 향안 입록을 한정시키고자 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1773년 향록에 ‘신통’으로 입록된 인물들의 직역은 하나같이 학생이었다. 그러나 본 향록에서는 이들 중 일부의 직역이 同知, 護軍(6명), 通德郞 등으로 수정되고 있다. 이것 역시 舊鄕의 의도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서얼도 향안에 입록되었으면 곧 향원인데 나라 법을 들먹여 다시 서치를 주장할 필요가 있겠는가하는 구향의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서얼의 입록과 서치에 대한 구향의 불만은 소극적이었지만 여러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본 향안에서는 신·구향이 완전한 서치를 이루고 있지만, 역시 입록인의 나이는 40세 이상으로 한정되고 있다. 이전 향안에서의 입록 연령은 대부분 20세 이상이었다. 또한 파안된 계사년 향록을 파기하지 않음으로써 후일에 누가 서얼인지를 고증할 수 있게 한 것도 역시 서얼의 입록과 서치에 대한 불만 표시로 해석된다.
아무튼 이후 안동에서는 향안이 작성되지 않았다. 향안이 작성되지 않은 것은 입록을 둘러싼 양반 내부의 갈등에서 말미암은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서얼의 입록에 따른 舊鄕의 소극적인 자기방어라 할 수 있다. 구향은 이미 累代에 걸친 향안 입록으로 향촌사회에서의 신분적 사회적 특권과 권위를 이미 확보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사정에서 굳이 新鄕과 어깨를 함께 할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서얼이 입록되는 상황에서 2향이나 1향의 향안 참여를 거부할 수 있는 명분도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 향원의 배타적 특권은 사실상 무의미하게 된다. 그렇다고 하여 안동에서 향안 종식이 곧 사족의 향촌지배체제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8세기 이후에는 통일된 향안의 작성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시기적으로 차이는 나지만, 18세기 이후 영남 지역의 대다수 고을에서의 鄕論은 크게 분열되는 양상을 보인다. 먼저 吏族, 庶孼, 富豪에서 사족으로 성장한 이른반 新鄕들의 향권 도전이 일어나고 그 가운데 향론이 크게 분열되었으며, 신향의 향안 입록 도모에 종전의 재지사족은 향안 운영을 기피하거나 배제되기에 이른 것이다. 또 사족들 간에도 분열이 일어나는데 이는 당색으로 인한 갈등, 가문 간의 우열 경쟁 등에서 비롯되었다.
[자료적 가치]
18세기 후반에 작성된 안동부 향록으로 1년전에 작성된 계사년 향록의 파안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향촌사회에 대한 수령권의 강조는 조선조가 추구하던 지방세력을 중앙의 권력에 아래에 두고자 하는 것의 일환으로 점차 그 영향력을 키우고 있었고, 사회변동에 의해 신분의 변동은 향촌의 지배구조를 변화시킬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향안 작성에 있어서도 그러한 것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본 문서는 그러한 사정이 안동부에 있어서 어떻게 반영되어 변화되어 가는지에 대한 것을 보여주는 사료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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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식,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