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3년 4월에 작성된 안동의 재지사족의 명단이 기록된 향록으로 총 235명의 인명과 관직 및 직임, 출생년도가 기록
[내용 및 특징]
癸巳年 9월에 작성된 안동지역 鄕錄이다. 향록은 조선시대 지방자치행정기구인 留鄕所의 구성원 명단을 일컫는 것이다. 유향소가 전국적으로 널리 설치되어 운영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중기 이후로, 당시 지역을 대표하는 양반들에 의해 그 운영이 주도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지역 사회 내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견고히 유지하기 위해 향안을 작성해 나갔다. 향안에 입록되어 있다는 것은 유향소 운영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며, 유향소 운영에 참여한다는 것은 지역의 대표적인 양반 가문 출신임을 표방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각 고을의 양반들은 향안 작성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것이다.
안동부의 향록은 1530년에 작성된 것을 시작으로 1766년부터 1906년까지 작성된 좌수별감안까지 총 11건이 현전하고 있는데 특히 18세기에 작성된 것이 가장 많은데 이 문서는 그 중 18세기 후반에 작성된 것으로 향안 작성의 필요성이 점차 감소되고 있는 시점에 작성된 향록으로 당시 안동부의 향안 입록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향안 작성이 18세기 중, 후반 이후에는 더 이상 작성되지 않는 경향으로 흘러가는 데 비해 안동지역에서는 향안과 향소를 중심으로 하는 양반들의 향권이 19세기에까지 온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안동을 조선 양반사회에서 ‘특수한’ 지역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향안 작성을 둘러싼 鄕中爭端은 이미 끊임없이 전개되고 있었다. 조선사회의 변화, 즉 신분 또는 경제적 기반을 달리하는 세력의 성장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양반 내부의 갈등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즉 二參人의 입록문제를 둘러싼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내부 갈등이 자율적으로 수습되지 못함으로써 官權의 개입과 간섭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안동의 양반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수령권과 타협 또는 그것에 예속됨으로써 비록 한계는 있었지만 향안의 작성이라는 외형적인 틀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 문서가 작성된 1773년에 있어서도 이러한 내부 갈등의 요소는 문서 말미에 기록에 그대로 드러난다. 무진년(1748)에 향안을 修案한 후 20여 년이 지나 향안 중의 사람들은 이미 零落하여 남은 사람이 없는 상황인데 매번 임원을 薦出할 때마다 이론이 많아 修案이 지연되었으나 鄕先生이 수안할 생각을 가지고 있고 관으로부터 勸督의 지시가 있어 새로이 수정하고자 하였으나 입록하고자 하는 초안이 오래되고 실제로 생존해 있는 이가 적어 향안 수록에 있어 어려움이 있으니 후에 수안하는 사람이 그 자손을 수록하는 등의 일에 대해서는 어떡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투영되어 있다.
향안 입록을 둘러싼 쟁단은 앞에서 줄곧 문제가 되었듯이 향원의 자격 즉, 3참으로 한정하느냐, 2참에까지 확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사실 향촌사회에서 이들이 신분적으로 차별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향규에서도 이들의 입록이 배제되지 않았고, 또 17세기의 향안에도 입록되고 있었다. 3참안을 작성하였던 좌수와 별감들이 2참으로 입록되지 못한 사람들이 후일에 설원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도 바로 이 같은 사정 때문이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2참인이 줄곧 문제가 되었던 것은 향안에 直書할 수 있었던 3참과는 달리 一鄕과 鄕先生의 동의와 허락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취사선택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향안 입록을 둘러싼 鄕中爭端은 이 같은 사정에서 계속될 수밖에 없었고, 점차 유력 가문 상호간의 鄕權 주도 다툼으로도 비화될 수 있었다.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豊案’과 ‘金溪案’은 다름 아닌 안동의 두 유력 성씨인 풍산 유씨(西厓 柳成龍 후손)와 의성 김씨(鶴峰 金誠一 후손) 가문 주도로 작성된 향안이 아닌가 생각된다. 풍산 유씨와 의성 김씨는 조선후기 안동의 양반사회를 실질적으로 주도하던 가문이며, ‘屛虎是非’로 잘 알려져 있듯이 屛論과 虎論을 대표하면서 상호 대립 갈등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18세기 안동의 향안 작성은 현실적으로 향안의 작성을 미룰 수 없었거나 관의 명령에 따라 작성되고 있었다. 그것도 문제가 있는 향안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거나 재작성하였던 것이 아니라 다소간 변통하거나 삼참인 등으로 한정하는 등 일시의 방편에 따른 것으로 향안의 작성을 둘러싼 시비가 관의 개입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향안 작성에 자율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수령의 지시에 따른다는 것은 향안을 토대로 한 사족의 향촌지배가 점차 수령권에 예속되거나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안동에서도 향촌내의 다양한 쟁단을 자율적으로 조정하고 수습할 수 없었던 사정이 불가피한 수령권의 개입으로 점철된 것으로 보인다.
향안 작성에 자율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수령권에 예속되거나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향안 첫머리에 18세기 이후에 작성된 안동 향안에서 중앙의 고관 또는 감사가 등장하는 사정을 대변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18세기 이전의 향안에서는 수령이 입록된 예가 없었고 연령에 상관없이 향안 첫머리에 등재되는 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수령의 입장이 반영되어 지방 행정의 수반으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향안에 입안하여 향원의 자격으로 향중의 일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면모로 보아 본 향안이 작성되던 18세기 후반의 안동 향촌사회는 다양한 쟁단을 사족층이 자율적으로 조정, 수습하기에는 어려운 사정이었고 그로 인해 수령권이 일정부분 개입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향안에 입록한 총 인원은 235명으로 최소 입록 연령은 60세이다. 이는 안동의 향안 중 가장 높은 입록 기준이지만 입록된 인원의 수가 급격하게 감소하는 등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다. 안동부의 다른 향안과 마찬가지로 성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없어 본 문서만으로는 성관의 구별에 의한 안동의 향촌사회 지배사족을 구별하기는 힘들지만 성씨별로 분석해 보면 金氏(66명), 李氏(45명), 權氏(39명), 柳氏(28명), 鄭氏(13명), 南氏(9명), 순으로 유력한 6개 성씨가 전체의 75%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데 특히 김, 이, 권 세 성씨는 향안이 작성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계속해서 향촌사회의 주도권이 크게 변화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특히 입록된 235명 중 46명의 ‘新通’은 말미에 별도로 나이순에 따라 수록되어 있다. 신통은 신향인 서얼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향안에는 수록하였으나, 서치는 아니었던 셈이다. 입록 연령을 60세 이상으로 한정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서얼의 입록을 제한하고자 한 고육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1773년에 작성된 안동부 향안으로 향안에 입록된 사족의 구성원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향안의 작성은 실질적으로 줄어들게 되는데 더 이상 향안이 가진 향촌사회에서 실효적 지배세력의 집단이라는 명분을 갖춘 증거 자료로서의 위치를 가지지 못하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향촌사회에 대한 수령권의 강조는 조선조가 추구하던 지방세력을 중앙의 권력에 아래에 두고자 하는 것의 일환으로 점차 그 영향력을 키우고 있었고, 사회변동에 의해 신분의 변동은 향촌의 지배구조를 변화시킬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향안 작성에 있어서도 그러한 것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본 문서는 그러한 사정이 안동부에 있어서 어떻게 반영되어 변화되어 가는지에 대한 것을 보여주는 사료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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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식,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