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3년에 작성한 안동지역 유력 재지사족의 명단으로 향안에 이름을 올리는 것에 대한 논의를 기록한 완의와 함께 부기된 향록
[내용 및 특징]
1707년 이후 26년만에 작성된 癸丑年 향록으로 현재 안동시 하회마을 충효당 영모각내 소장되어 있다. 작성연도와 함께 ‘三參’이라고 밝히고 있어 입록 대상자를 삼참인으로 한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앞서 작성된 향록이 입록 자격에 대해 ‘新鄕’ 및 ‘他官人’ 처리 문제로 향중의 쟁단이 있었던 것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707년에 작성된 향록 또한 30년만에 작성되는 것이라 입록 자격과 관련하여 향중의 뜻이 합치되지 않고 입록 자격 요건을 완화하여 입록하되 削籍을 통한 방법으로 모순점을 고쳐 나가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어 700명이 넘는 인원이 입록되어 있는 것에 반해 본 향록에는 220명만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향록 작성에 앞서 ‘三參’으로 자격요견을 명시하고 작성되어 있으며 완의를 통해서 밝히고 있듯이 훗날 소임을 맡은 이로 하여금 修案하여 입록에 대한 잡음이 없도록 당부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1707년 이후 26년만에 작성된 계축년 향록이다. 조선시대 지방자치기구인 留鄕所를 운영하던 鄕中士類들의 명부인 향안은 일종의 鄕紳錄으로 鄕座目·鄕籍·鄕錄儒案·鄕目·靑衿錄 또는 士籍이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대개 世族·顯族·右族 등으로 불리는 在地士族들만이 입록될 수 있었다. 또한 향안에 입록되어야 비로소 양반으로서의 대우는 물론, 座首·別監의 향임에도 선출되고, 지배신분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 즉 그들은 향권을 장악한 재지사족들로서 대개 고려 말 첨설직을 받은 前銜品官이나 또는 조선 개국시 처음부터 勳臣 계열에 들지 않고 조상 전래의 세거지에 토착해 경제적·문벌적으로 강한 세력을 형성하면서 중앙권력에 대립해온 부류들이었다.
향안이 작성되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체로 유향소 성립시기와 같이한다고 하겠다. 壬亂 후 향촌사회에서는 시기적, 지역적으로 다소의 차이는 있었으나 향안 작성의 일반적 양상은 17세기에 본격화되어 18세기 중·후반부터 향촌 내 사족층의 분화 및 新鄕 세력의 대두와 갈등으로 종식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임란 전에도 향안은 존재하였으나 亂 이후 보다 광범위하게 향안작성의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이는 향안을 작성하여 향원이 되면 一鄕 내에서 ‘治鄕之人’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향안을 두는 것은 世族을 밝혀 일향의 綱紀와 民俗을 바로잡고자 함에 있었으며, 또한 문벌현족에서만 구하는 것은 향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吏族들을 통제하려면 양반 중에서도 현족이 아니고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향안에 오른 향원은 일향 내에서 치향지인으로 공인받게 되며 이들에 의해 향촌사회의 지배질서가 운영되었으며,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향안이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사회적 격동기에 따라 향촌 구성원이 변화하면서 土姓집단들이 기존의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향안의 필요했다. 그로인해 향록 입안 자격을 문벌현족으로 제한하고 族系가 분명해야 하며 외족이나 처족이 타읍에서 온 자는 입안하기가 심히 어려웠던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 기인했다고 하겠다. 그리고 향안을 작성하는 것은 守令權으로 대표되는 관권으로부터 향권을 보호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수령과 향임들의 대립이 있을 경우 일향이 齋會하여 향원·鄕黨의 결속된 힘으로 관권에 대응하여 향권을 지켜 나가기 위함에서였다. 뿐만 아니라 향안의 작성은 향임의 선출을 향원들로부터 이뤄지게 해서 향권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렇듯 향안은 재지사족의 향권을 유지하는 수단이자 명분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에 그들간의 약속으로 향규를 정했는데 즉 留鄕所의 조직, 座首의 선임, 향안 입록 자격 및 절차, 鄕先生 및 그 서무인 향유사의 업무와 戶長·吏房의 선임에 관한 규약을 만들어서 향원들이 함부로 향권을 남용하거나 鄕風을 어지럽히거나 향장을 능멸하면 그 경중에 따라 벌을 주기도 하였다. 또한 자격이 없는 사람을 천거하거나 의론이 정해진 후 중의를 따르지 않거나 심지어 鄕會에 까닭없이 불참하는 등 향원간의 결속력을 저하시키는 행위 등에 대해 엄중하게 처벌하는 규정도 만들어서 재지사족의 향권보호와 향촌사회에서의 사족 중심의 기강확립을 통한 향촌지배를 굳건히 하려했다.
본 문서는 1733년에 작성된 것으로 당시 안동지역의 재지사족의 구성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겠다. 신분 및 관직, 이름을 기입하고 생년을 기록한 간략한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체제는 앞선 시기에 작성되어진 안동의 다른 향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인데 특히 18세기로 접어들면서 향안의 작성은 점차 줄어드는 추세였고, 그 형식 또한 간소화되는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 투영된 형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18세기 이후 향안 작성을 둘러싼 향중쟁단이 끊임없이 전개되는 것이 향안의 필요성을 감소시키는 결정적 계기였는데 이것은 신분 또는 경제적 기반을 달리하는 세력의 성장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양반 내부의 갈등에서 비롯되고 있었던 것이다. 즉, 二參人의 입록문제를 둘러싼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내부 갈등이 자율적으로 수습되지 못함으로써 관권의 개입과 간섭을 불가피하게 하였고 안동의 양반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수령권과 타협 또는 그것에 예속됨으로써 비록 한계는 있었지만 향안의 작성이라는 외형적인 틀을 유지하는 것에 머무르게 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18세기로 접어들면서 차별받던 서얼들이 조정의 조치로 점차 그 영향력을 키워가면서 기존의 향안체제의 유지는 어렵게 되었고 서얼들도 향안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舊鄕은 향안 작성을 스스로 종식시키고, 서얼들이 별도로 파악된 ‘罷案’을 보존함으로써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구향의 기득권은 향안의 작성이 중지된 이후에도 한계는 있었지만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것은 좌수와 별감을 향안의 명문가문에서 여전히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좌수와 별감은 수령의 지방지배의 동원되는데 불과하였다. 본 문서의 말미의 완의를 통해서도 향촌의 양반사회가 외형적인 안정성과 지성성과는 달리 내부에서 크게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고을 향안이 京外에서 가장 중하게 숭상되고 그런 것은 예로부터 이어저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좌수 김이현에 의해 향안이 작성되었고 요사이 다시 좌수 권가징에 의해 한 案을 만들었으나 鄕議가 같지 않고 罷却하여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舊案의 향원들이 이미 늙고 擬任에 있어 窘窄하여서 4월 회의에서 구초본에 의거하여 수록하기로 하였으나 역시 物議의 이동이 없지 않았다. 더욱이 향당의 燕賀하는 자리에서 논의가 더욱 격렬하여 진정되지 못하고 罷해지니 나이든 노인들이 이 같은 대사를 짧은 시간에 감당할 수 없으나 鄕弊를 생각하고, 또 관의 뜻을 피할 수 없어서 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鄕規를 따르지 않고 前案 중 府三參과 應參之人을 考出하여 입록하였으니 사실은 일시의 방편에 따른 부득이한 것이니 원컨대 뒤에 소임을 맡은 이들은 계속해서 修案하여 향안에 참여하지 못하고 見漏된 사람들이 오랫동안 원한을 품지 않게 해주면 심히 다행이겠다. 학생 신덕유 이사람은 이미 二參이나 首先生이 효행으로 천거하여 발탁한 까닭에 향안을 수정함에 미쳐 退書한다.
라고 하여 어느 때 없이 향안의 修正은 鄕規에 따라 혹은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733년의 〈癸丑鄕錄〉 역시 이전의 향안 수거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더욱이 이 때의 향안은 분명히 “안동부의 3참인과 前案에 참여하였던 사람”만을 뽑아서 입록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역시 어느 것이나 鄕議가 분분하였고, 심지어는 연회석에서도 격론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鄕任들이 집단으로 물러나거나 나아가는 항의 사태가 오랫동안 지속되고, 外議가 일어 새로 선임됨 향임들이 안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외의란 아마 향안에 입록되지 못한 사람들, 즉 2참인들이 향안 입록에 대한 문제를 관에 소청함으로써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의 불만은 결국 관의 간섭을 초래하여 이미 만들어진 향안에 대한 재조정을 불가피하게 하였음을 1735년의 〈완의〉를 통해 알 수 있다.
을묘(1735) 정월 26일 향회시 완의
계축(1733)년 겨울 향안을 수정한 뒤에 外議가 없지 않아 새로운 향안의 향원들이 안위하지 못하였다. 그런 까닭에 관의 뜻 또한 다시 수정하여 조정하고자 하였고 이에 相議하여 다시 점검을 하니 입록한 향원들은 비록 문제점이 없으나 향안에 참여하지 못하고 빠진 사람들이 많아 이들이 오랫동안 원한을 품을까 민망하여 追錄하자는 논의가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나이가 많은 늙은이들이고 또 참고로 증명할 것도 없어서 갑자기 지시를 수용하기 어려운 까닭에 이미 만들어진 案을 收議하여 完定하고 빠진 향원은 첫머리에 올려 향규에 따라 單子를 제출하여 속히 수정할 것이다.
아무튼 위에서 볼 수 있듯이 18세기 안동의 향안 작성은 현실적으로 더 이상 향안의 작성을 미룰 수 없었거나 관의 명령에 따라 작성되고 있었다. 그것도 문제가 있는 향안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거나 재작성하였던 것이 아니라 다소간 변통하거나 삼참인 등으로 한정하는 등 일시의 방편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로써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1733년의 향안 작성은 관의 명령에 따른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작성된 이후에도 外議가 많아, 관에 의해 조정될 정도였고, 1773년의 〈계사향록〉 또한 관의 권고와 독촉이 작성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었다. 이것은 향안이 이제까지 향촌사회 내부에서 자율적으로 작성되고 있던 사정과는 판이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무튼 士族鄕으로 불리던 안동에서도 향촌내의 다양한 爭端을 자율적으로 조정하고 수습할 수 없었던 사정에서 수령권의 개입은 불가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여타 士族勢가 미약하였던 지역에서는 사족의 다양한 향촌지배 조직이 전적으로 수령에 의해 장악되었을 것임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서북지방과 남부의 일부지역에서 자행된 수령에 의한 賣鄕·賣任은 바로 이같은 사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향록에 기록된 인물은 모두 221명으로 1707년에 작성된 향록에 비해 1/3로 급감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앞서 완의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안동부의 삼참인과 前案에 참여하였던 사람”만을 뽑아서 입록한 것이라는 이유와 함께 향안 입록 연령이 앞서 작성된 향록보다 많이 상향된 결과가 반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출생년이 기록된 인물은 총 25명 밖에 되지 않아 향록에 입안을 하는 연령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최소 연령으로 기입되어 있는 51세가 하한선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단정지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입록된 이들의 본관과 출신지 등 인적사항들이 기록되지 않아 舊鄕으로서 재지적 기반을 갖추고 있는 사족 집단이라는 결론을 내리기는 힘들지만 앞서 작성된 향록에 안동에 지역적 근간을 갖고 있는 姓貫집단이라고 보여지는 金, 李, 權氏의 비중이 2/3였던 것과 비교를 해봐도 3 성씨가 약 64%(141명)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아 18세기 중반에도 안동지역의 재지적 기반을 갖춘 성관을 중심으로 향권은 명맥상으로는 유지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본 향안은 앞선 향안과 약 30년의 차이로 작성되었는데 통상적으로 5년을 주기로 작성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완의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향록 입록을 둘러싼 향촌사회 내부의 다양한 갈등과 대립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향안에 입록되는 인물의 수에 있어서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조선 후기 양반인구의 급격한 증가 또는 사회변화와 관련지어지기도 하나 안동의 경우에서는 입록 연령과 자격 기준의 차이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1707년에 작성된 향안에 입록되는 연령의 하한선과 본 문서에서 나타나는 최소 연령이 적어도 17년이 차이가 나고 있고, 三參인과 전안에 참여한 사람만으로 한정지어 입록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앞서 입록된 인물의 사족적인 신분과 지위의 차이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인적구성에 있어 평가할 수 있는 주요 잣대인 성관에 있어 시기별로 큰 차이를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안동의 향촌사회를 주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18세기 중반 안동지역 재지사족들의 명부인 향록으로 향촌 지배 양상과 추이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재지사족들은 향안을 바탕으로 지역 내에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향안 입록을 도모하는 庶孼, 富豪, 吏族에서 성장한 新鄕 세력을 배제해 나가려 했지만 17세기 중엽 이후 심해지는 향안 작성에 있어서의 향촌 내의 複雜多岐한 갈등이 노정되면서 향안 입록이 파행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17세 중반 향안 권위의 약화, 新鄕 세력의 도전과 갈등, 당색 및 가문 간 갈등의 문제는 鄕論의 통일을 저해하게 되었고 그러한 현상은 계속 심화되어 결국 향안 작성이 향촌사회에서의 실질적 명분으로서의 작용을 하지 못하는 것이 되어 거의 이뤄지지 않게 된다.
안동은 조선 양반사회에 있어서 ‘특수한’ 지역으로 이해되는데 그것은 鄕案과 鄕所를 중심으로 하는 양반들의 鄕權이 19세기에까지 온전히 유지되고 있었다는 점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이해와는 달리 안동에서도 18세기 이후 향안 작성을 둘러싼 鄕中爭端이 끊임없이 전개되고 있었고 이것은 신분 또는 경제적 기반을 달리하는 세력의 성장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양반 내부의 갈등에서 비롯되고 있었던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문서라고 하겠다. 향안 입록은 향론을 분열시키는 것이었으나 본 문서가 작성되는 18세기 중반에도 향안에 입록된 안동의 재지사족의 인적구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향촌사회의 주도권 또한 기존의 사족들이 유지해 나갔음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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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식,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