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7년 禮安鄕校의 校生을 기록한 校案
내용 및 특징
본 자료는 1707 8월 禮安鄕校에서 작성된 校案이다. 교안은 향교에 출입하던 生徒를 기록한 일종의 학생명부로 예안향교에는 1620년부터 18세 후반까지 54건의 교안이 현전하고 있으며 본 자료는 그 가운데 하나이다. 예안향교 생도안의 명칭은 본 자료명인 校案 외에 儒案이라는 명칭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인 연구에서는 儒案을 양반유생의 案으로, 校案을 중서층의 案으로 보고 있으나 예안향교의 경우, 입록인을 분석해 보았을 때 두 안은 동일한 성격의 안이다. 즉 예안향교에서 작성된 유안과 교안, 두 案은 신분적 차이는 없는 동일한 성격의 명부로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예안향교의 교안은 대체로 일년에 한 번 작성되었으며, 몇 몇 연도의 경우 두 번 작성되었다.
1707년 8월 교안의 구체적 입록현황을 살펴보면, 우선 총 135명이 입록되어 있다. 입록된 135명은 額內 30명, 別儒 70명, 額外 12명, 校生 23명으로 나뉘어져 있다. 성씨별 입록상황을 살펴보면, 액내의 경우 金氏 9명, 琴氏 7명,李氏 4명, 朴氏 3명, 吳氏 2명, 尹氏 1명, 權氏 1명, 柳氏 1명, 成氏 1명, 許氏 1명이 입록되어 있으며, 별유의 경우 金氏 23명, 李氏 18명, 琴氏 8명, 朴氏 6명, 尹氏 4명, 任氏 3명, 許氏 2명, 申氏 2명, 南氏 2명, 孫氏 1명이 입록되어 있다. 액외의 경우 金氏 6명, 李氏 2명, 沈氏 1명, 琴氏 1명, 禹氏 1명, 曺氏 1명이 입록되어 있으며, 교생의 경우 金氏 9명, 李氏 4명, 琴氏 4명, 朴氏 2명, 南氏 2명, 趙氏 1명, 沈氏 1명이 입록되어 있다.
위의 입록현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1707년의 교안 입록인은 액내와 별유, 그리고 액외와 교생으로 구분되어 작성되고 있다. 이전의 1687년 교안분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예안향교의 액내와 별유에는 양반사족이, 액외와 교생에는 서얼 및 평민층이 입록되고 있었다. 본 자료인 1707년의 교안 또한 이전과 마찬가지이며, 이는 예안지역 士族의 명부인 禮安鄕錄과의 비교를 통해 더욱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예안향록과 교안 입록인을 상호 비교해 보면, 30명의 액내 가운데 19명의 이름이 중복입록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70명의 별유 가운데 2명이 중복입록되고 있다. 별유의 경우 이전에 비해 향안과의 중복입록의 수가 현저히 줄어드는데 이는 별유입록인의 연령과 관계된 것으로 보인다. 현전하는 교안의 액내와 별유 입록인의 연령을 확인해 보면 대체적으로 연장층이 액내, 연소층이 액외로 입록하고 있었다. 그리고 연소층으로 구성된 별유의 경우, 교안입록 후 대체로 20~30년 후 향록에 입록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당시 향록입록의 구체적인 연령 기준을 확인할 수는 없으나 별유의 입록 연령보다는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보았을 1707년 별유 입록인은 일정 기간이 지난 후 향록에 입록될 것이었으나 1717년 이후의 예안향록은 현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별유의 향록 입록 상황을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1707년 별유의 다수가 이전 시기부터 별유에 입록되고 있고, 앞선 시기 별유의 다수가 향록입록이 확인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1717년의 별유 또한 액내와 함께 사족층으로 구성되고 있었다 할 수 있다. 이러한 액내와 별유에 반해 액외와 교생의 경우에는 향록의 입록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예안향교의 액내와 별유가 예안 향촌사회내의 유력사족으로 구성되고 있었으며, 이에 대비되는 액외와 교생은 비사족층으로 구성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본 자료를 비롯한 앞선 시기의 교안분석에서와 같이 17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예안의 사족은 액내와 별유로, 중서층은 액외와 교생으로 입록하여 향교에 출입하고 있었다. 이는 『承政院日記』 숙종 7년 8월 23일의 기사인 “영남․호남은 양반은 액내교생이 되고 중인․서얼은 액외교생이 된다”는 표현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安鼎福의 『雜董散異』 鄕校令條에서와 같이 “靑衿錄 유생은 東齋에 居하고, 西齋校生은 閑散庶孼과 凡民 중에서 준수한 자를 택해서 교생으로 삼고 西齋에 居한다”는 표현처럼 靑衿錄을 작성하지는 않았다. 조선후기 액외교생의 증가로 인한 군역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仁祖년간 校生考講이 실시되자, 종래 액내교생으로 입교하였던 사족들은 考講을 회피함과 동시에 그들의 향교 장악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만의 명부인 청금록을 작성하였고, 스스로 儒生, 또는 靑衿儒生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종래의 액내는 향교입교를 통한 신분상승을 도모한 서얼 및 평민층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교생고강이라는 정책이 시행되고 중서층의 광범위한 향교입교라는 정책적,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예안향교에서는 청금록이 작성되지 않고 사족들은 종래의 액내, 그리고 별유에 그대로 입록하였다. 이는 곧 당시 예안의 사족이 더욱 향교를 강력하게 장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타 지역의 양상과는 분명한 차이점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본 자료는 조선후기 예안향교 교생의 구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예안향교의 경우 일반적인 교생층의 분화현상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양반사족들이 그들만의 案인 청금록을 작성한데 반해 예안의 사족들은 청금록을 작성하지 않고 법적 정원 내인 액내로 입록하였고, 이외에 별유를 두어 향교에 출입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중서층은 액외 및 교생으로 입록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예안사족의 향교 장악력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 자료는 이와 같은 예안 사족과 향교와 관계, 그리고 당시 예안향교의 인적구성을 보여 주는 자료로써 그 가치가 높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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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東文化硏究』5, 정진영, 安東文化硏究會, 1991
유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