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7년에 작성된 안동지역의 재지사족의 명단을 기록한 것으로 총 713명의 향원의 관직 및 직임, 신분과 이름, 출생년을 기록한 향록
[내용 및 특징]
丁亥년 정월에 작성횐 향록으로 현재는 안동시 하회마을 忠孝堂 내 永慕閣에 소장되어 있다. 안동의 향록이 작성된지 30년만에 다시 작성된 향록으로 총 713명의 향원의 관직 및 직임과 이름, 출생연도를 기록하였다. 30년전인 1677년에 작성된 향안에 비해 입록된 수가 3배가 넘는데 이는 앞서 작성된 향록 자체가 너무 오래 전인 1617년에 작성되어진 것으로 근간으로 삼을만한 자료가 부족하여 사망한 이들을 중심으로 기록된 것이었고, 정해년에 작성하는 향록에 대해서는 향안 입록 부적격자에 대한 처분에 관하여 문서 말미에 완의에서 削籍을 통한 정화를 할 것이라고 언급한 데에서 과하게 입록된 경향을 보이고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겠다.
鄕錄은 조선시대 향촌사회에서 門閥顯族인 재지사족의 명단으로 士族 중심의 향촌사회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하여 재지사족 권위의 상징이었다. 향안에 입록된 자를 鄕員이라 하였고, 향원의 모임을 鄕會, 향원들의 규약을 鄕規라고 하였다.
壬亂 후 향촌사회에서는 시기적, 지역적으로 다소의 차이는 있었으나 향안 작성의 일반적 양상은 17세기에 본격화되어 18세기 중·후반부터 향촌 내 사족층의 분화 및 新鄕 세력의 대두와 갈등으로 종식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임란 전에도 향안은 존재하였으나 亂 이후 보다 광범위하게 향안작성의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이는 향안을 작성하여 향원이 되면 一鄕 내에서 ‘治鄕之人’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향안을 두는 것은 世族을 밝혀 일향의 綱紀와 民俗을 바로잡고자 함에 있었으며, 또한 문벌현족에서만 구하는 것은 향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吏族들을 통제하려면 양반 중에서도 현족이 아니고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향안에 오른 향원은 일향 내에서 치향지인으로 공인받게 되며 이들에 의해 향촌사회의 지배질서가 운영되었으며,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향안이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사회적 격동기에 따라 향촌 구성원이 변화하면서 土姓집단들이 기존의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향안의 필요했다. 그로인해 향록 입안 자격을 문벌현족으로 제한하고 族系가 분명해야 하며 외족이나 처족이 타읍에서 온 자는 입안하기가 심히 어려웠던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 기인했다고 하겠다. 그리고 향안을 작성하는 것은 守令權으로 대표되는 관권으로부터 향권을 보호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수령과 향임들의 대립이 있을 경우 일향이 齋會하여 향원·鄕黨의 결속된 힘으로 관권에 대응하여 향권을 지켜 나가기 위함에서였다. 뿐만 아니라 향안의 작성은 향임의 선출을 향원들로부터 이뤄지게 해서 향권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렇듯 향안은 재지사족의 향권을 유지하는 수단이자 명분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에 그들간의 약속으로 향규를 정했는데 즉 留鄕所의 조직, 座首의 선임, 향안 입록 자격 및 절차, 鄕先生 및 그 서무인 향유사의 업무와 戶長·吏房의 선임에 관한 규약을 만들어서 향원들이 함부로 향권을 남용하거나 鄕風을 어지럽히거나 향장을 능멸하면 그 경중에 따라 벌을 주기도 하였다. 또한 자격이 없는 사람을 천거하거나 의론이 정해진 후 중의를 따르지 않거나 심지어 鄕會에 까닭없이 불참하는 등 향원간의 결속력을 저하시키는 행위 등에 대해 엄중하게 처벌하는 규정도 만들어서 재지사족의 향권보호와 향촌사회에서의 사족 중심의 기강확립을 통한 향촌지배를 굳건히 하려했다. 그러므로 사족간에 강한 결속력을 유지하려면 외부에 대한 배타성이 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한 성향은 특히 신분의 제한을 통하여 나타났다. 1581년 安東에서 제정된 〈鄕約〉을 보면 향록에 입록하려면 먼저 자신의 내외족계에 흠이 없어야 됨은 물론이고 庶孼, 鄕吏의 자손은 반드시 4, 5世 동안 향안에 오른 현족과 통혼한 다음에 입안을 許한다고 하였다. 또한 양반이 가난하여 軍士百姓의 집안과 결혼하더라도 역시 4, 5世 동안 淸族과 혼인한 후에야 향안에 許錄되었다. 뿐만 아니라 本府人이 타관인과 결혼을 하면 일향의 모든 사람이 잘 아는 현족이 아니면 향안에 입록될 수 없었고 그 중 타관인의 집안이 타관에서 향임을 지냈더라도 본부에서는 그대로 鄕參員으로 대우하지 않았으니 이는 신분적, 지역적으로도 강한 배타성을 보였다고 하겠다.
이 문서가 작성될 18세기 초반은 재지사족의 향촌 내 지위가 약화되고, 향안 입록을 도모하는 新鄕 세력이 등장함으로서 그 기준이 二參으로 축소되거나, 아예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는데 문서 말미의 완의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吾鄕案錄成毁無常 不能歸正者 厥惟久矣 近者金座首以鉉氏 蓋然有修整之計 旣己率業 則鄕議多有紛紜之端 而亦不能伜然廢葉 以此案用之者 亦有年 所間 或有仍舊更釐之議 而一時當任之人 率皆旅進旅退 以至今因循矣 頃日因鄕會收議 則咸以爲旣成之案 不可輕易擅改 祗优諸長老單辭 拔他官書之 乃是妥當底道理 故玆敢點出 他官之不干于本府者 祛之 而其中作故之員 依舊書之 盖一遵鄕議而已 畧書顚末 以備後覽焉 辛卯十一月 日
대강의 내용은 근래에 좌수 김이현이 향안을 수정할 계획을 세워 案을 완성했으나 鄕議가 분분하고 향원사이에서 다툼이 생기고 타관인에 대해 삭적과 입록에 대해서도 의견이 합쳐지지 않아 이러한 사정의 전말을 기록하여 후대에 참고되게 한다는 내용이다.
1677년의 〈丁巳鄕錄〉 이래로 꼭 30년에 이르도록 또 다시 안동에서는 향안이 修擧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 역시 이전과 마찬가지로 향안 입록 자격을 이참으로 하느냐, 삼참으로 한정하느냐 하는 문제, 향원의 입록 자격에 있어서 新鄕으로 대변되는 이들의 입록에 관한 문제 등에서 비롯되고 있다. 그러다가 비록 1707년에 이르러 〈정해향록〉이 만들어지지만 이것은 공의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더 이상 천연할 수 없었던 사정에서 좌수 김이현에 의해 작성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鄕議가 紛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이를 폐각할 수만도 없는 사정이었다. 그래서 우선 他官人으로 입록된 향원을 削籍하는 것으로 타협책을 마련하고 있다.
이렇듯 18세기로 접어들면서 향안의 작성으로 인해 야기되는 재지사족의 명분이 줄어드는 경향은 안동지역에서도 일어나는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17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재지사족의 향촌 내 지위가 약화되고, 향안 입록을 도모하는 신향 세력이 등장함으로서 그 기준이 二參으로 축소되거나, 아예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고 壬亂 이후 광범한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라서 대두한 신흥세력 부농층 서얼들이 면리의 실무를 맡게 되자 향촌사회에 있어서의 사족의 향권은 그들의 사회경제적 세력의 감축에 따라서 감축되기에 이르른다. 따라서 향권행사에 있어 향임의 역할은 수령들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약화되고 서얼 및 신향들의 성장으로 말미암아 향안 작성 자체가 필요성이 줄어들게 되는데 본 문서는 그러한 변동 속에서 작성된 것으로서 〈정사향록〉 이래의 향안 작성의 어려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향록에 기록된 인물은 모두 713명으로 30년전에 작성된 향록에 비해 그 수가 엄청나게 늘어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완의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옛것을 그대로 쓰거나 다시 整正하자는 논의도 있었으나 한 때 향원이었던 이들이 실력행위로 그러지 못하고 이미 만들어진 案을 가볍게 함부로 바꾸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니 他官人으로 本府에 관여되지 않은 사람 중 作故한 향원은 옛것에 따라 그대로 쓴다하여 야기된 결과로 보인다. 그로 인해 향안의 내용은 관직이나 품관과 이름만을 기재하였고 간혹 生年이 기록된 정도로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입록된 이들의 본관과 출신지 등 인적사항들이 기록되지 않아 舊鄕으로서 재지적 기반을 갖추고 있는 사족 집단이라는 결론을 내리기는 힘들지만 앞서 작성된 향록에 안동에 지역적 근간을 갖고 있는 姓貫집단이라고 보여지는 金, 李, 權氏의 비중이 2/3였던 것과 비교를 해봐도 3 성씨가 약 63%(449명)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아 18세기 초반에도 안동지역의 재지적 기반을 갖춘 성관을 중심으로 향권은 명맥상으로는 유지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다만 완의에서도 밝히고 있는 것과 같이 향안 작성 초기에 작용하였던 배타성이 철저하게 작용하였는가는 향록에 입안된 인물의 수가 급속하게 많아진 점, 新鄕이 제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향촌사회에서 역할을 수행할 능력이 상대적으로 커진 점 등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향안의 작성이 처음의 그것과 성격을 꾸준히 유지하지는 못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라 하겠다. 향안에 기록된 700여 명 중 생년을 기록하고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어 입록 연령 제한을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기록된 경우를 통해서 본 당시 향안 입록의 연령은 34세 이상인 자로 규정한 듯하다. 물론 연령순으로 향안을 작성한 것을 기본 전제로 하더라도 마지막에 생년이 기록된 인물 이 후에도 인명이 작성되어 있어 명확한 하한선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연령이 가장 가까운 제한 연령이 아닌가 추정할 수 있다.
재지사족의 촌락지배는 16, 7세기에 이르러 확고한 것으로 보였고, 이를 바탕으로 한 일향 범위의 지배에 있어서도 그들의 일정한 역할이 결코 부정되지는 않았다. 유향소와 향안을 위시하여 향약 등은 재지사족의 향촌지배를 위한 것이었으나 18세기로 접어들면서 일향 범위에서의 사족의 지배는 사실상 해체과정을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사회, 경제적인 변화는 사족의 촌락지배까지도 부정하고 거주 촌락을 단위로 한 지배만이 현실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던 것이고 이 문서는 이러한 상황에 접어들기 시작한 시기의 안동지역 향록 작성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자료적 가치]
조선중기 이래 재지사족들은 향촌사회에서 留鄕所 운영을 통해, 鄕論을 주도해 나갔을 뿐만 아니라 이들은 유향소 운영 규정인 鄕規에다 향약을 접목시켜 시행해 나감으로써, 그들 주도의 향촌지배질서 확립에 대한 성리학적 명분을 제공받았다. 이러한 유향소의 구성원인 鄕員의 명부가 바로 鄕案인데 조선시대 향안에 입록되었다는 것은 곧 유향소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는 것이며, 또한 지역사회의 여론을 주도할 수 있는 유력한 사족임이었으므로 조선시대 재지사족들은 향촌사회의 지위를 보장할 수 있는 향안 작성에 열중하였고, 이를 배타적으로 운영해 나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향촌 내의 複雜多岐한 갈등이 노정되면서 향안 입록이 파행되어가는데 특히 17세 중반 이후 향안 권위의 약화, 新鄕 세력의 도전과 갈등, 당색 및 가문 간 갈등의 문제는 鄕論의 통일을 저해하였고, 향안 작성과 입록에 대한 갈등이 증폭되는 것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안동은 조선 양반사회에 있어서 ‘특수한’ 지역으로 이해되는데 그것은 鄕案과 鄕所를 중심으로 하는 양반들의 鄕權이 19세기에까지 온전히 유지되고 있었다는 점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이해와는 달리 안동에서도 18세기 이후 향안 작성을 둘러싼 鄕中爭端이 끊임없이 전개되고 있었고 이것은 신분 또는 경제적 기반을 달리하는 세력의 성장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양반 내부의 갈등에서 비롯되고 있었던 것이다. 즉, 二參人의 입록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자율적으로 수습되지 못함으로써 官權의 개입과 간섭이 불가피하게 됨으로써 안동의 양반들은 수령권과 타협 또는 그것에 예속됨으로써 한계점을 가진 향안 작성의 외형적인 틀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고 이 문서를 통해서 살펴 볼 수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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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식,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