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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9년 8월 9일 경상도(慶尙道) 풍기향교(豊基鄕校) 교안(校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5+KSM-XG.1699.4721-20130630.Y131190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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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유안
작성주체 풍기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작성시기 1699
형태사항 크기: 29.5 X 30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주 풍기향교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교촌리 147-2
현소장처: 영주 풍기향교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교촌리 147-2

안내정보

1699년 풍기향교 교안
1699년 8월 9일에 풍기향교의 교생들의 명단을 신분별로 액내와 업유, 액외 등으로 구분하여 작성한 교안이다. 본 문서가 작성되고 난 뒤 280여 년이 흐른뒤에 재성책하면서 문서의 앞뒤가 중복되거나 누실된 것으로 보인다. 풍기향교에 소장되어 있는 7건의 교안 중 6건은 모두 교생을 액내, 업유, 액외, 동몽으로 구분하여 액내 교생의 수를 50명으로 법정액수를 맞춰 기록되어 있는데 이 문서는 문서 중간에 재임의 서명과 수결이 들어가 있거나 문서의 전개과정이 얽혀 있을 뿐만 아니라 통상적으로 작성되던 동몽의 명단이 누락되어 있고, 문서의 말미에 해당되는 부분이 중간에 삽입되어 있다.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嶺南士林派의 形成』, 李樹健, 嶺南大學校 出版部, 1979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경성대학교 출판부, 1992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윤정식,이수환

상세정보

1699년 8월 9일에 작성된 경상도 풍기향교의 교안으로 유교생 47명, 업유 11명, 액외 16명 등 교생의 인명이 수록
[내용 및 특징]
己卯年(1699)에 8월 9일에 풍기향교의 교생들의 명단을 신분별로 額內와 業儒, 額外 등으로 구분하여 작성한 교안이다. 본 문서가 작성되고 난 뒤 280여 년이 흐른 뒤에 再成冊하면서 문서의 앞뒤가 중복되거나 누실된 것으로 보인다. 풍기향교에 소장되어 있는 7건의 교안 중 6건은 모두 교생을 액내, 업유, 액외, 동몽으로 구분하여 액내 교생의 수를 50명으로 법정액수를 맞춰 기록되어 있는데 이 문서는 문서 중간에 齋任의 서명과 수결이 들어가 있거나 문서의 전개과정이 얽혀 있을 뿐만 아니라 통상적으로 작성되던 동몽의 명단이 누락되어 있고, 문서의 말미에 해당되는 부분이 중간에 삽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총 127명의 인명이 등록되어 있으나 액내 교생만 12명이 중복되어 있고 같은 해 2월에 작성된 교안과도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교생은 향교의 학생으로서 그 신분과 자격은 시대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가 있었다. 향교에 入校할 수 있는 연령은 조선초 이래 10세로 되어 있어 최소한의 기준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지역별, 시대별 교생의 연령차이는 考講과 교생으로서의 책무수행 등과 관계있는 것이어서 교생자격 획득과는 별개로 생겨나는 것이었다. 한편 향교입교의 신분상 자격에 대해서는 법제상 구체적 자격제한이 명시되지는 않았다. 다만 교생의 赴校 목적은 과거 준비에 있었기 때문에 文科에 응시할 수 있는 신분상의 자격자가 향교에 들어갔고, 실제 문과 응시 자격은 兩班 자제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향교입학의 신분적 자격은 양반자제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종년간에 이르러 사회기강이 문란해지면서 향교에는 양반자제 뿐만 아니라 良人의 자제가 교생에게 부여된 군역면제의 특전을 얻기 위해 입교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현상은 후일 더욱 심해졌다. 평민이나 서얼들이 향교에 들어가게 되어 士族의 자제들은 오히려 부교를 기피하게 되었고 결국 양반자제들은 면역의 특전을 받기 위해 入籍만 하고 실제로는 赴學하지 않고 양인의 자제들이 군역 면제를 위해 부교하여 교생들의 구성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본 문서에서는 교생의 이름만 기재되어 있어 연령이나 신분상의 구분을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교생을 크게 儒校生, 業儒, 額外로 구분하여 대략적으로나마 신분상의 차이를 두어 작성되었다.
향교에 입교한다는 것은 단순히 군역만을 면제받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국가가 향교를 건립하여 인재를 양성한다는 목적을 위해 學田과 校奴婢등을 지원하였기 때문에 향교에 입교한 교생은 학업을 마칠 때까지 무상으로 공부할 수 있었으며, 四學生徒와 함께 교생에게만 應擧의 자격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성적이 우수한 교생에 대해서는 小科 응시의 특전이나 戶役(二雜役)을 量減, 敎導로 取才되어 他職으로 진출할 수도 있는 국가적 배려도 있었다. 이밖에도 양인교생의 신분상승, 吏胥職으로의 充差 등의 혜택도 있었다. 이로 인해 향교는 양반 자제뿐만 아니라 양인, 서얼층의 등록이 활발해졌고 시간이 흐를수록 향교에는 양인 이하 계층의 자제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16세기 이후 향교교육의 여러 가지 문제점이 노출되어 양반들의 향교교생 회피현상은 뚜렷해졌고, 한편으로 신분상승 또는 피역을 목적으로 한 비양반층의 입교가 성행하였다. 이로 인해 교생의 자격을 엄격히 적용하기 위해 考講이 실시되었지만 양반을 대신한 양인, 서얼들의 액내교생으로 입학하기에 이르렀고 양반들의 액내교생 회피현상은 더욱더 일반적인 것이 되어 향교에서 공부하는 것을 기피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추세에 대응하여 士族들은 신분적 기득권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서얼 및 평천민층과 차별성을 가지기 위하여 그들 나름의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구책은 그들만의 명부를 작성하여 신분적인 폐쇄성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마련된 사족의 교생안을 儒案 또는 靑衿錄이라 하였다. 양반들은 東齋儒生이라는 이름으로 그들만의 명부를 작성하고 계속 향교에 출입하고 있었다. 풍기향교에도 교안을 비롯하여 액내교생만을 기록한 「額案」, 「鄕案」 등을 작성하여 교안에 등록된 교생안과는 차별성을 두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본 교안에 등록된 모든 인물들이 17세기 후반 여타의 향교에서 작성되던 각종 案과의 차별성을 찾아보기란 힘든 면이 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교안에서는 다만 이름만이 등재되어 있어 업유나 액외라고 별도로 표기하지 않는 이상 그들의 신분을 명확하게 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1699년에는 봄과 가을에 각각 한번씩 교안을 작성하였는데 본 문서는 그 중 가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나 문서가 결책될 당시에 혼란이 있어 제대로 인적구성을 파악하기에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자료적 가치]
자료가 작성된 해는 1699년인데 280여 년이 흐른 1986년 풍기향교 典校가 재결책한 문서이다. 再結冊 시에 어떠한 사정이 있었는지 명확하진 않지만 문서 말미에 위치해야할 향교 교임들의 수결이 중간에 들어가 있거나 官의 정확한 확인이 이뤄진 여부에 대해서는 불투명하지만 문서의 서식이 풍기향교에 소장하고 있는 여타의 교안과 다른 뿐만 아니라 통상적으로 교안작성에 있어서의 규칙과도 상이한 부분이 있어 문서 전체가 확인되지 않는다고 하겠다. 풍기향교에 남아 있는 교안은 본 문서를 포함하여 7건이다. 대략 액내 교생의 수를 50명으로 법정액수에 맞게 등록하였고, 이어 業儒와 額外, 童蒙 순으로 작성되던 본 문서에는 양식이 흐트러져 기술되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교안에 등록된 교생들이 전후에 작성된 교안의 인물들로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17세기 후반에 집중적으로 작성되고 있는 다른 교안과 함께 풍기향교의 교생의 인적 구성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겠다.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嶺南士林派의 形成』, 李樹健, 嶺南大學校 出版部, 1979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경성대학교 출판부, 1992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윤정식,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699년 8월 9일 경상도(慶尙道) 풍기향교(豊基鄕校) 교안(校案)

校上
己卯
校案
儒校生
黃瑱
南斗元
郭文奎
朴震夔
秦潤培
黃處厚
丁處重
柳宗開
蔡應海
李翊祥
秦得培
黃埴
黃垶
權翎
權世濂
黃雲亨
黃裌
黃聖銓
黃命性
金冑元
金澤萬
金兌彦
潘世澤
申鏐
權大經
黃道明
申銡
河聖圖
黃裳
金甲萬
李應和
金冑弘
黃坦
李渤
韓德愈
金沃萬
李震鉉
黃珣
李元錫
黃廷烋
權壇
朴震瑗
黃命長
李亨翊
金萬綱
安夏臣
黃渫
齋任 金 [着名]
朴 [着名]
安夏範
李翊文
朴益章
黃道五
蔡夏祥
金萬秀
黃夏振
黃雲亨
黃壽麒
李孟鐸
琴銓
黃垶
蔡應洛
南昌夏
黃雲望
蔡應文
權有銓
黃垕
黃埰
蔡夏錫
金周彦
黃自漢
黃弼龍
宋時平

己卯八月九日
都有司 黃 [着名]
掌議 黃 [着名]
權景淹
南夏重
朴履祥
朴星耈
李元培
金冑元
黃裌
黃命性
金冑獻
黃一淸
河聖圖
朴廷莢
郭爾崇
黃裳
業儒
權稱萬
權和萬
張漢籌
秦世雄
許載
許墰
李元白
秦善培
權應錘
南夏正
安履謙
額外
黃立樞
宋時衡
安宗赫
李元錫
金之兄
李亨翊
黃廷烋
金宗兄
黃自漢
黃雲彩
黃珣
黃自河
黃(?)
張承奎
安世舜
李之輝
額內
黃{玉+燮}
黃道明
李延元
黃處一
蔡應海
秦得培
柳宗開
李應祉
秦種秀
李翊祥
潘世澤
權景濂
黃道行
黃命天
黃埴
英祖三十四年(四○九一)戊寅作成
檀紀四三一九年丙寅十一月十日再結冊
典校 張鳳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