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9년 2월 7일에 작성된 경상도 풍기향교의 교안으로 액내, 업유, 액외, 동몽으로 구분하여 129명의 인명을 수록
[내용 및 특징]
己卯年(1699) 2월에 작성된 풍기향교 교안이다. 풍기향교는 경북지방의 43개 향교 가운데 관계 자료가 가장 잘 정리되어 있다. 그리하여 다른 향교에서 작성 연대를 추정하는데 어려움이 있는데 반해 풍기향교는 비교적 제작 연대를 유추하기가 쉬운 편이다. 본 문서의 작성연대에 대해 첫머리에 干支로 기록하고 있는데 풍기향교에 소장된 여타의 자료를 통해 1699년임을 알 수 있다. 특히 향교의 교임에 대한 명단을 기록한 校任錄을 통해서 본 문서에 기록된 액내교생과 일치되는 부분으로 인해 정확한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교안에 등록된 인물은 모두 129명으로 1년 전에 작성된 교안에 비해 약간의 인원 증가를 보이고 있다. 액내교생은 앞서 작성된 교안과 마찬가지로 50명을 기록하였고, 業儒는 13명, 額外는 33명, 童蒙 33명이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액내교생을 성관별로 분석해 보면 黃 14명, 李 9명, 金 7명, 朴 5명, 權 4명, 申, 蔡 각 2명, 秦, 河, 潘, 南, 琴, 韓, 安 각각 1명이다. 숫적인 면에서 50명밖에 되지 않은 것이라서 액내교생의 범위만으로는 풍기 지역의 향촌사회의 주도권을 행사하던 성관의 변화양상을 결론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본 교안 뿐만 아니라 풍기향교에 소장된 여러 자료들, 특히 鄕案이나 교임안 등을 살펴보면 17세기 후반 당시의 풍기 지역의 재지사족이라 여겨지는 성관들의 분포 성향과 크게 다르지 않는 것을 통해서 향촌질서를 주도한 세력의 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고 하겠다.
본 문서가 작성될 시기의 향교에 입학할 수 있는 교생의 자격에 대하여 명확하게 구분지어진 것이 없어 연령에 대한 규정이나 액내외의 신분 규정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통상적 교안의 작성에 비교해 보았을 때 대략적으로 연령은 20세 이상, 액내와 액외를 신분상으로 구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仁祖대 이후부터 향교 생도의 호칭이 유생으로 서재에 거하는 평민 및 서얼들을 교생을 통칭되었지만 이 문서가 작성될 시점에 있어서는 유생과 교생으로 구분짓기 보다는 액내교생은 郡鄕校의 법정 정원수이고, 업유는 中庶層, 액외는 常·賤民層이 등재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액내교생의 경우 『經國大典』에 명시되어 조선 말기까지 법제상 변동을 보이지 않았던 군향교 정원 50명이 정확하게 지켜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풍기향교에 소장되어 현전하고 있는 여러 건의 「額內」로 성책된 향교 교생안이 별도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교안을 작성하되, 액내와 업유, 액외, 동몽 등으로 구분하여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향교의 교생의 정원은 시대별로 변화가 있었다. 우선 太宗대 교생의 정원은 留守官에 50명, 大都護府와 牧은 40명, 都護府에 40명, 知官은 15명으로 책정되었다. 이 정원은 世宗때에도 변동이 없었다. 그러나 『경국대전』의 관계규정에서 정원이 대폭 증가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府·대도호부·목은 모두 90명, 도호부는 70명, 郡은 50명, 縣은 30명으로 『경국대전』에 법제화된 이후 조선말기까지 변동이 없었다. 이와 같은 증원의 배경에는 조선왕조 건국초기부터 地方의 民風을 儒敎理念에 입각하여 순화시키고 국가의 基幹人才를 양성하려는 목적이 있었는데, 국가기반이 점차 안정되어 감에 따라 점차 校生의 수를 늘인 것이라 생각된다. 풍기향교에서도 본 문서가 작성된 17세기 후반에 이러한 교생의 정원은 철저히 지켜지고 있다. 비록 교안의 등록된 인물이 액내와 업유, 액외, 동몽 등으로만 구분되어 실질적인 신분을 파악하는데는 일정한 한계가 있으나 적어도 액내 교생은 그 법정액수를 유지함으로써 국가 교육기관으로서의 최소한의 입학 정원을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자료적 가치]
풍기향교에 소장된 7건의 교안 중 하나로 17세기 후반의 교생들의 명단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17세기에 작성된 교안은 모두 4건으로 이보다 앞서 작성된 교안과는 1년의 주기를 보이고 있다. 앞서 작성된 교안과 비교해 보았을 때 등록된 총 인원이 129명으로 7명 늘어난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액내는 50명으로 동일하고, 업유가 5명, 동몽이 7명이 증가되어 기록되어 있고 액외는 5명이 감소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풍기향교에서 작성되어진 다른 교안과 마찬가지로 명단만 기록되어 있어 구체적 신분관계나 향교에 등록하게 된 특이한 경우 등을 알아보기는 힘들지만, 당시 풍기향교를 구성하고 있는 교생들의 성관의 분포나 향교에 있어서의 영향력 행사정도의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겠다.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嶺南士林派의 形成』, 李樹健, 嶺南大學校 出版部, 1979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경성대학교 출판부, 1992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윤정식,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