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0년 禮安鄕校의 校生을 기록한 儒案
[내용 및 특징]
본 자료는 1620년 禮安鄕校에서 작성된 儒案으로 당시 향교에 출입하였던 生徒의 명부이다. 예안향교에는 1620년의 유안을 포함하여 총 54건의 교생안이 현전하고 있으며 儒案 또는 校案이라는 명칭으로 작성되어 있다. 종래의 교생안에 관련한 연구를 따른다면, 표면적인 명칭으로만 보아서는 유안은 士族의 案이며, 교안은 평천민의 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안향교의 경우 두 안의 내용을 검토해 보았을 때에 동일한 성격의 명부이다. 즉, 사족안과 평천민안으로 구별되어 작성된 것이 아닌 혼재되어 사용된 것이다. 1620년에 유안이라는 이름으로 작성되었다가 1681년에는 교안으로 바뀌었으며, 다시 18세기 후반부터는 유안으로 쓰이고 있다. 교안의 작성은 대체로 일년에 한번 작성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일년에 두 번씩 작성된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교안의 입록인 수는 17세기 보다는 18세기 후반에 이를수록 더욱 많아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사족층의 숫적 증가현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620년의 유안을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면 우선 입록인원의 경우 총 38명이 입록되어 있으며 額內校生 30명, 額外校生 8명으로 구분되어 있다. 여기에서 액내와 액외란 향교의 정원을 기준으로 구분한 것으로 액내는 군현의 등급에 따라 규정된 정액내의 교생을 말하는 것이며, 액외는 이들 정액 외의 교생을 말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향교의 교생에게는 軍役免除와 같은 특권이 주어졌기에 군현의 등급에 따라 교생의 수에 법적 한도를 두고 있었다. 교생의 정액은 선초이래 몇 번의 변동과정을 거쳤으나 『經國大典』에서 府·大都護府·牧 90명, 都護府는 70명, 郡은 50명, 縣은 30명으로 법제화된 이후 조선말기까지 변동없이 유지되었다. 조선시대 예안의 행정단위는 縣이었기에 법적 교생수는 30명이었으며 이러한 액내교생의 수는 18세기 후반까지 대부분 지켜지고 있다. 액외는 정액 외의 교생의 수이기에 당연히 그 편차가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구분된 액내교생과 액외교생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를 알아보도록 한다. 종래의 연구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양반들은 군현의 등급에 따라 규정된 정액내의 교생, 즉 액내교생으로 입교하여 향교의 운영에 관여하며 군역면제를 비롯한 여러 특혜를 누리고 있었다. 법적으로는 군역면제와 같은 특혜는 액내교생만이 그 대상이었으나, 수령의 묵인과 향교자체의 필요성 등 여러요인으로 인해 액외교생 또한 학생으로 간주되어 군역을 면제받고 있었다. 따라서 교생에 대한 특권을 획득하기 위한 非양반층의 입교 또한 이루어졌으며 이들 정원 외의 교생을 액외교생이라 하였다. 그리고 특권을 획득하기 위한 서얼 및 상층평민층의 액외교생으로의 광범위한 입교현상은 점차 심화되었고 이에 따라 군역부족과 같은 각종 사회문제가 발생하였다. 이의 해결을 위해 仁祖의 집권초기 중앙에서는 校生考講을 실시, 落降者는 군역에 충당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교생고강은 무자격 교생들을 도태시키는 데에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는 반면, 양반의 액내교생 회피현상을 초래하였다. 임란 후 양반의 군역면제라는 신분적 특권이 점차 확립되어 가는 상황에서 굳이 향교에 입교할 필요가 없었던 양반들은 교생으로의 입교를 점차 외면하는 경향이 심해져 갔다. 그러나 당시 양반들은 액내교생으로 입교를 회피하였을 뿐 향교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향교는 양반들의 향촌활동의 근거지로서의 성격이 강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반사족들은 종래의 교생안에 입적하지 않고 대신 그들만의 명부인 靑衿錄을 작성하고 지속적으로 향교의 운영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청금록의 작성 후 액내교생과 액외교생은 군역을 회피하기 위한 평민층이 입록하게 되었다. 즉 향교의 생도는 인조년간을 기점으로 양반사족인 청금유생과 평민층인 액내 및 액외교생으로 분화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1620년 예안향교의 유안은 일반적인 교생의 분화현상과는 그 양상이 다르게 나타난다. 앞서 서술하였듯 교생고강 이전 향교의 액내교생은 양반이, 액외교생은 일반평민층이 입교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본 자료의 액내는 물론 액외의 대부분 또한 양반사족이었음이 유안과 예안향안과의 비교를 통해 확인된다. 주지하듯 향안은 조선초기 지방자치 기구로서 존재했던 留鄕所를 운영하며 사실상 鄕權을 장악한 재지사족의 명부로, 향안의 입록은 곧 양반임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또한 향촌사회의 관련한 모든 문제를 처리하는 鄕會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은 향안입록자로 제한되어 있었기에 향안의 입록은 곧 一鄕에서 지배신분의 지위를 인정받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족들의 권위의 상징인 향안의 입록은 대단히 까다롭고 엄격하였으며 허물이 있는 경우 削籍 당하는 경우도 발생할 만큼 폐쇄적으로 운영되었다. 예안의 경우에도 일찍부터 향안이 작성된 것으로 생각되며 현재 1572년 이후의 향안이 향록이라는 명칭으로 전하고 있다.
이러한 예안의 향록과 1620년 유안을 상호 비교해 보면 다수가 중복되어 입록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액내교생의 경우, 30명 가운데 14명이 향록에 중복 입록되어 있다. 그리고 액외의 경우에도 8명 가운데 5명이 중복입록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총 38명 가운데 19명이 중복 입록되어 있으며 이러한 수치는 당시 예안향교의 액내를 비롯한 액외의 교생 모두가 예안지역의 사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안에 입록된 성씨의 경우, 金氏 10명, 李氏 9명, 琴氏 6명, 尹氏 3명, 申氏 2명, 沈氏 2명, 柳氏 2명, 吳氏 1명, 黃氏 1명, 朴氏 1명, 權氏 1명이 입록되어 있다. 유안에 나타난 이상의 성씨는 『禮安邑誌』에 나타나는 성씨 및 향안의 입록성씨의 분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예안읍지』의 人物條에 나타난 성씨를 살펴보면, 眞城 李 9, 光山 金 9, 奉化 琴 8, 安東 權 6, 永川 李 1, 坡平 尹 3, 禮安 李 1, 英陽 南 1, 義城 金 3, 橫城 趙 1, 豊泉 任 1, 丹陽 禹 1, 高敞 吳 1로 나타나고 있으며, 향안의 성씨별 분포에 있어서도 李 , 金, 琴, 朴, 尹, 吳, 權, 柳, 申씨가 높은 비율로 입록되어 있다.
이상과 같이 읍지와 향안, 그리고 유안의 성씨분포가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액내교생 가운데에는 退溪 李滉의 曾孫인 李岐도 포함되어 있으며 그 역시 향안에 중복 입록되어 있다. 즉, 이시기에는 유력 사족층이 교생으로 입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지배집단은 조선후기로 올수록 변화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유안이 작성된 17세기 초반의 이러한 사정은 결국 16세기 예안의 향촌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성씨가 계속해서 향교를 장악하고 있었고, 동시에 향교는 이들 지배집단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향교 교생의 구성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예안향교의 경우 일반적인 교생층의 분화현상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즉 액내를 비롯한 액외교생에 모두 양반사족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이는 타지역의 양상과는 다른 예안지역의 특징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즉 당시 예안의 사족이 다른 지역에서 보다도 더욱 강력하게 향교를 장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인 것이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정진영,
『古文書硏究』30, 朴賢淳, 한국고문서학회, 2007
박소희,유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