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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고산서원(高山書院)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5+KSM-XF.1931.4777-20130630.Y1350101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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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김홍락, 유연구, 김헌주, 고산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남후면 암산1길 53-1
작성시기 1931
형태사항 크기: 28.8 X 50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931년 고산서원(高山書院) 통문(通文)
이 통문은 1931년 1월 7일 고산서원에서 보낸 것으로 그 내용은 후산 이종수를 배향한다는 것이다. 이 통문에서 말하는 이종수안동출신으로 19세에 대산 이상정과 그의 아우 소산 이광정의 문하에 들어가 43년 동안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리고 이상정은 자신들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로 이종수의 호를 ‘후산’이라고 지어주었고, 이종수 또한 그들의 뒤를 잇는 사람으로 자처하였다. 본 통문에서 이종수가 “일찍이 대산 이상정을 모시고 나아가면 배우고 물러나면 그 배운 것을 익혀서 지극한 가르침을 늘 마음에 두고 잊지 않았다.”는 것은 이 같은 사실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이종수이상정이 세상을 떠난 뒤 스승이 주도했던 『주서강록간보』를 교정하고 보완하여 간행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하였다. 이 통문에서 이종수주자의 문인 가운데 채원정과 같은 현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와 연관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채원정주자의 문인으로 들어가 공부하며 주자의 이학사상을 계승 발전시켜 세상에 드러나도록 한 것처럼 이종수이상정이 평소 간행하고 싶어 했던 『주서강록간보』를 그의 사후에 잘 정리하고 보완하여 세상에 빛을 보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 밖에 이종수는 여러 저작을 남겼는데, 본 통문에서는 이를 두고 스승의 학문적 단서를 발명하여 후학에 끼친 은혜가 무궁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종수동암 유장원천사 김종덕과 함께 이상정 문하의 가장 빼어난 제자들 가리키는 ‘호문삼로’ 중의 한 사람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이 통문은 칭송했다.
그런데 이종수는 유림에서 배향하는 곳이 없었다. 이 통문이 발행되던 1918년은 아마도 이종수의 봉사가 끝나는 시점에 도달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본 통문에서 “세월이 흘러 그를 모시던 제사를 후손들이 거두려한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사정을 이야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상정을 배향하던 고산서원에서 추배하는 일을 추진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이종수는 기존의 서원에 배향될 인물로는 충분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 적어도 서원에 제향이 되기 위해서는 도학적 연원과 학문종사로서의 자격뿐만 아니라 나라에 대한 공적과 충절인 등의 조건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통문에서도 지적하는 것처럼 이종수는 벼슬하거나 경륜을 펼쳐 대외적으로 보일 수 있는 공적은 전무하고 단지 학문적 업적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통문은 이종수를 배향하는 일을 “의기지례”라는 말로 그 타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 말은 『예기』에 나오는 것으로 예의 실질은 의에 있기 때문에 비록 예문에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의에 맞으면 새로운 예를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고산서원의 이러한 제안은 유림으로부터 호응을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종수의 배향을 발의한 고산서원에는 현재 이상정이광정만을 배향하고 있고, 다른 어떤 院祠에서도 이종수를 배향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 통문을 읽어보면 그 글이 형식적인 면에 있어 잘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것을 보면 이종수의 배향은 오랜 시간을 두고 찬찬히 계획되고 여러 사람에 의해 면밀히 검토된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慶北書院誌』, 한국국학진흥원, 경상북도, 2009
『안동시사』, 안동시, 안동시사편찬위원회, 1999
하창환,이수환

상세정보

1931년 1월 7일, 고산서원에서 李宗洙를 배향하는데 참석해줄 것을 당부하는 통문
[
내용 및 특징
]
이 통문은 1931년 1월 7일 高山書院에서 보낸 것으로 그 내용은 后山 李宗洙를 배향한다는 것이다. 이 통문에 따르면 이종수는 순수하고 온화한 성품이 빼어나며, 대대로 덕을 닦은 명가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일찍이 大山 李象靖을 모시고 나아가면 배우고 물러나면 그 배운 것을 익혀서 지극한 가르침을 늘 마음에 두고 잊지 않은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학문은 깊고 행실은 고매하여 어느 사이엔가 여러 선생들 가운데 앞서가는 사람이 되었고, 세 어른 가운데 한 분으로 추앙을 받으니 朱子 문하의 蔡元定과 같은 현인이 되었다고 이 통문은 이종수의 됨됨이를 소개하였다. 이러한 이종수는 현실에서 경륜을 쌓거나 벼슬을 하는 등의 화려한 이력은 없지만, 은거해 살면서 게으름이 없이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幾微를 아주 깊이 연구하여 저서로 세상에 알렸다. 그래서 스승의 학문적 단서를 발명하여 후학들에게 끼친 은혜가 무궁하여 우리 儒學에 있어 영원한 스승이 되기에 마땅하다고 그의 업적을 역설하였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그를 모시던 제사를 후손들이 이제 거두려하여 사림에서는 그를 추모할 곳을 잃게 되었다고 아쉬움을 나타내었다. 그래서 이제 그를 추모하는 의식을 거행하는데, 이것은 한쪽에서 멋대로 거행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 날짜를 정하여 알리니 많이들 오셔서 이 행사가 함께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주면 고맙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는다.
이 통문에서 말하는 이종수안동출신으로 19세에 대산 이상정과 그의 아우 小山 李光靖의 문하에 들어가 43년 동안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리고 이상정이종수의 號를 ‘后山’이라고 지어주었는데, 이는 자신과 그 아우의 호인 대산소산의 뒤라는 뜻이었으며, 이 호를 받은 이종수 또한 그들의 뒤를 잇는 사람으로 자처하였다. 본 통문에서 이종수가 “일찍이 대산 이상정을 모시고 나아가면 배우고 물러나면 그 배운 것을 익혀서 지극한 가르침을 늘 마음에 두고 잊지 않았다.”는 것은 이 같은 사실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이종수이상정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안동 지역의 講會를 주도하고, 북부 지역 사림들의 문헌을 교정하고 간행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러한 일들 가운데 특히 이상정이 주도했던 『朱書講錄刊補』를 교정하고 보완하여 간행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하였다. 이 통문에서 이종수주자의 문인 가운데 채원정과 같은 현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와 연관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채원정이 주자의 문인으로 들어가 공부하며 주자의 理學思想을 계승 발전시켜 세상에 드러나도록 한 것처럼 이종수이상정이 평소 간행하고 싶어 했던 『주서강록간보』를 그의 사후에 잘 정리하고 보완하여 세상에 빛을 보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 밖에 이종수는 『感興詩諸家註解』, 『近思錄朱子語類輯錄』, 『洙泗傳習錄圖說訓義』, 『退溪先生詩集箚疑』, 『家禮輯遺』 등의 저서를 남겼다. 본 통문에서 이종수가 화려한 이력은 없지만 저서를 통해 스승의 학문적 단서를 발명하여 후학에 끼친 은혜가 무궁하다는 것은 이와 같은 많은 저서를 두고 말한 것이다. 이종수의 이러한 업적은 東巖 柳長源川沙 金宗德과 함께 이상정 문하의 가장 빼어난 제자들 가리키는 湖門三老 중의 한 사람으로 불리게 했다. 본 통문에서 “三老之一實”이라는 말은 세상의 이러한 평가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종수는 유림에서 배향하는 곳이 없었다. 다시 말해서 이종수에게는 不遷位의 祭享을 드리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통문이 발행되던 1918년은 아마도 이종수의 奉祀가 끝나는 시점에 도달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본 통문에서 “세월이 흘러 그를 모시던 제사를 후손들이 거두려한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사정을 이야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되면 이종수를 더 이상 추모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사림에서는 그를 영구히 모실 방안, 즉 서원에 배향하는 일을 추진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이종수는 기존의 서원에 배향될 인물로는 충분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 적어도 서원에 제향이 되기 위해서는 도학적 연원과 학문종사로서의 자격뿐만 아니라 나라에 대한 공적과 충절인 등의 조건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통문에서도 지적하는 것처럼 이종수는 벼슬하거나 경륜을 펼쳐 대외적으로 보일 수 있는 공적은 전무하고 단지 학문적 업적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 통문은 이종수를 배향하는 일을 “義起之禮”라는 말로 그 타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 말은 『예기』에 나오는 것으로 禮의 실질은 義에 있기 때문에 비록 禮文에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의에 맞으면 새로운 예를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말에 따르면 이종수의 배향은 종래의 기준에서 보면 미흡한 점이 없지 않지만, 그가 남긴 학문적 업적을 볼 때 의리에 있어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산서원의 이러한 제안은 유림으로부터 호응을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종수의 배향을 발의한 고산서원에는 현재 이상정이광정만을 배향하고 있고, 다른 어떤 院祠에서도 이종수를 배향하고 있지 않다. 이것을 보면 일제강점기에도 서원의 배향인물에 대한 기준이 여전히 엄격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하고 추측하게 된다. 그리고 이 통문을 읽다보면 그 글이 형식적인 면에 있어 잘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것을 보면 이종수의 배향은 오랜 시간을 두고 찬찬히 계획되고 여러 사람에 의해 면밀히 검토된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
자료적 가치
]
이 통문은 高山書院에서 李宗洙를 배향하려 했던 사례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그런데 지금 고산서원에서 이종수는 배향되지 않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통문은 일제강점기에도 서원의 배향인물에 대한 사림의 기준이 祠宇에 비해 엄격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慶北書院誌』, 한국국학진흥원, 경상북도, 2009
『안동시사』, 안동시, 안동시사편찬위원회, 1999
하창환,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931년 고산서원(高山書院) 통문(通文)
通文
右通諭事伏以我 后山李先生挺醇和之姿生詩禮之庭
早事大山李先生進講退習服膺至敎學邃而行高才
全而德備菀爲諸子之先進而得蒙三老之一實朱門季通
之賢也經綸黼黻之華雖不得展布於當世而閑臥林泉
一念匪懈極深硏幾立言著書發明師門之緖嘉惠後學
於無窮玆豈非吾黨百世之師乎世代推遷神捿將掇慈
孫盡追孝之地士林無寓慕之處則方欲爲古人義起之禮
而亦非一方之所擅行以今二十九日定告祀惟願 僉尊濟
濟來臨共敦行事之地千萬
右文通
辛未正月七日高山書院會中前承旨 金鴻洛
幼學 柳淵龜
金獻周
李承奎
權泰東
南斗淵
李羲植
李悳求
金奎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