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3월 7일, 京畿의 李容九를 비롯한 26명의 儒林이 衛正斥邪를 주장했던 烈士와 忠臣을 祭享할 祠宇의 建立을 추진하기 위한 會合의 開催를 玉山書院에 알리는 簡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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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및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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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簡通은 京畿地域의 李容九를 비롯한 全國의 儒林 26명이 서명하여 玉山書院에 보낸 것으로 그 내용은 衛正斥邪를 주장했던 2명의 烈士와 10명의 忠臣을 祭享할 祠宇를 建立하기 위해 會合을 開催한다는 것이다. 이 간통은 서두에 모두가 알고 있는 2명의 열사와 10명의 충신의 실제 행적이 이제 사우를 지어 제향하자는 데까지 의론이 이르게 되었다고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래서 이 간통에 그들에 대한 사실을 분명하고 자세히 채록하여 보여드릴 테니 읽어주기 바란다고 당부하였다. 이 간통에 따른 그들의 행적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許元栻은 직언을 한 신하로서 1880년 11월에 당시의 정치를 논하고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방도를 진술한 상소를 올렸다. 그 상소에서 대략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임금께서 法講을 폐한 지가 이미 7년이 지났다. 이제 교화가 막히고, 기강이 해이해지고, 어진 사람과 불초한 사람의 구별이 없는데, 이것은 聖人의 학문인 儒學을 끊임없이 밝히지 않은 때문이다. 우레의 異變은 그 소리를 거두어들인 후에 나타나니, 어질고 또 사람을 사랑하는 하늘이 정녕 임금과 신하, 그리고 아래와 윗사람 모두에게 경고를 보이니 마땅히 두려워하며 자신을 닦고 살피는데 겨를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임금께서 이 경고에 음식의 가짓수나 줄이고 正殿을 피해있음은 겉만 그럴듯하게 꾸미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三司에서 연명하여 상소를 올리는 것 또한 겉만 꾸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上帝를 알지는 못하나 겉치레로 하는 재앙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이치이니 빨리 간언할 수 있는 길을 열고 다스리는 도리를 들어야 한다고 직언하였다. 그리고 허원식은 다시 상소를 올려 국가의 계책과 백성에게 부과되는 세금의 절도가 없음을 논하고, 聖人의 덕을 쌓도록 힘쓰고, 바른 학문을 숭상하고, 사치를 억제하며, 외교에 있어 자세히 살펴보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1881년 7월에는 關東의 烈士 洪在學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피하지 않고 도끼를 지고서 상소를 올린 일이 있었다. 문신인 허원식과 劉元植, 무신인 洪時中과 黃載顯,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인 李晩孫, 金祖榮, 金碩圭, 韓洪烈 등은 위정척사의 의리를 강조한 사람들로 그들의 말을 따르면 나라가 옛 풍속을 이룰 것이지만, 그들의 말을 버린다면 사람은 금수의 지경에 빠질 것이라고 이 간통은 이들의 말을 강조하였다. 이어서 1882년 4월에 상소한 충남의 白樂觀은 다음과 같이 간언하였다. 지금의 임금에게는 안으로 가까이할 수 있는 신하가 없는데 천하의 모든 나라와 외교를 하게 되면 지난해에 있었던 변란이 지금에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우며, 平陽․臺城․巴蜀․幙北의 환란이 3년이 지나지 않아서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허원식을 비롯한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형벌로 죽임을 당하는 것을 피하지 않고 직언으로 직간한 사람들로 모두 나라를 걱정하고 충성스러우면서도 공평한 신하이며, 성인을 존중하고 도리를 호위하는 선비들이다. 임금이 이들의 말을 듣고 그 계책을 쓴다면 옛 나라를 새롭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 간통은 백낙관의 간언을 소개하였다.
이어서 본 간통은 이후의 사태에 대해 기술하였다. 1882년 6월에 군병들이 옥문을 부수고 南間에 가두어진 백낙관을 방출하고, 동쪽 別營에 가서 대원군을 해방시켜주었다. 하지만 민비가 임금의 御駕를 뒤따라 돌아온 후에 사약을 받고 죽게 하였으나 세상에서는 모두 두 열사와 열 명의 충신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위정척사를 외치던 여러 사람들이 殉死한 후 1884년 10월에는 金玉均에 의한 郵政局의 변란이 있었고, 1894년 4월에는 동학교도들이 크게 일어나 청나라와 일본이 素沙에서 전쟁을 벌였고, 1895년 8월 17일 밤에는 明成皇后가 죽임의 변을 당했고, 1905년에는 5명의 역적이 을사조약에 찬성하는 변란이 있었고, 1910년 7월에는 나라를 합하는 擧事가 있었고, 1918년 12월 20일 밤에는 고종황제께서 붕어하셔서 1919년 2월 8일 나라의 벼슬아치와 선비, 그리고 수많은 백성들이 상여를 따라 가니 金谷의 50리 길의 곡성이 하늘에 사무쳤다고 이 간통은 기술하고 있다. 한말에 있었던 비극적 사건들을 이렇게 차례로 나열한 것은 곧 위정척사를 주장하던 사람들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결과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충신과 열사들이 황천에서 원통하고 억울해한 지가 지금으로부터 40여 년이 되었다고 이 간통은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2명의 열사와 10명의 충신이 보인 문장과 덕업이 당시에도 찬연히 빛났을 뿐만 아니라 후세에도 계도하고 도울 것이니 수많은 선비들이 그들의 풍취에 영향을 받지 않음이 없었다고 본 간통은 그들의 업적을 기렸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남긴 상소의 글과 원고들이 상자 속에서 좀먹어 들어가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 인사들의 수치라고 하며 그들을 버려둔 현실을 비판했다. 하지만 최근에 사림의 의론이 통일되지는 않았으나 먼저 대구의 六臣祠나 진주의 彰烈祠 곁에 忠烈祠宇를 건립하면 좋겠다고 말들을 하는데, 그렇게 되면 춘추의 享祀 때 후생들로 하여금 그들의 상소문을 읽게 하고 그들의 세태를 논하게 한다면 후세의 풍속을 교화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며 본 간통은 사우의 건립을 적극 찬동하였다. 그래서 타고난 마음의 정성을 모으고 한 목소리로 호응하여 우리나라 인사들이 그림자를 따르듯 구름처럼 모여들어 이 일을 잘 이룰 수 있도록 한다면 참으로 다행이겠다는 말로 긴 간통을 마무리한다.
이 간통에서 말하는 열사와 충신들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880년(고종 17)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金弘集이 고종에게 黃遵憲의 『朝鮮策略』이라는 소책자를 바친 것이었다. 이 책의 내용은 아시아에 있어 가장 위험한 나라를 러시아로 보고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은 ‘親中國․結日本․聯美國’의 외교정책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자 특색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신사의 나라이기 때문에 조선이 조약을 체결하여도 아무런 해가 없을 것이며, 그들이 신봉하는 예수교와 천주교는 동일한 근원에 당파가 다른 것이 중국에 있어 朱子와 陸象山이 있는 것과 같고, 또 그 근본 취지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중국에서는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충고가 포함되어 있다. 이 같은 내용은 고종과 고위층 관리에게 미국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1882년(고종 19)에 제물포에서 韓美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조선의 정계와 유림은 이러한 내용을 담은 『조선책략』으로 일대파란이 일어났다. 먼저 이 간통에서 언급한 병조정랑 유원식이 1880년 10월 “耶蘇와 天主의 學을 유교의 朱․陸 과 같다고 하였는데, 이는 聖賢을 심히 모욕하는 언사이므로 수신사 김홍집은 그 자리에서 마땅히 꾸짖고 衛正斥邪의 뜻을 표시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그 책을 함부로 받아온 것은 잘못이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유원식은 조정을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平安道 鐵山府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조선책략』을 비판하는 상소는 끊이지 않았다. 1880년 11월과 12월 사간원의 정언을 지냈던 허원식이 연이어 상소를 올렸다. 그가 올린 상소의 내용은 이 간통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민심의 이반이 각종 부정행위에서 비롯된 것으로 임금을 비롯한 모든 신하들이 성리학적 세계관을 재확립하여 치세에 응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 간통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위정척사운동에 참여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881년 2월 경상도 예안의 유생인 이만손을 疏頭로 하는 이른바 ‘嶺南萬人疏’이다. 이 상소에서 사람들은 『조선책략』을 보고 저절로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쓸개가 흔들리며 통곡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하면서, 그와 같은 사특한 책을 가져온 김홍집을 처벌하고 그 책자를 불속에 던져 위정척사의 大道를 보이라고 외쳤다. 그리고 3월에는 홍시중과 황재현이 상소하고, 5월에는 충청도의 한홍렬, 경상도의 金鎭淳, 경기도의 柳冀永 등이 그 뒤를 이었다. 7월에는 경기도의 신섭, 강원도의 홍재학, 충청도의 趙啓夏, 전라도의 高定柱 등이 각각 소두가 되어 四道儒生의 連書로 伏閤上疏를 올렸으나, 이들도 모두 처벌을 받았다.
이처럼 1881년에 많은 사람들이 상소를 올린 일을 辛巳斥邪運動이라고 한다. 이 운동에 대해 주자학에 바탕을 둔 도덕적 규범주의로 서양과 관련된 일체의 대상을 배척하게 함으로써 서양의 과학과 기술에 대해서 눈을 멀게 하였으며, 서양을 금수로 규정짓는 독선으로 국제정세를 외면하고 쇄국을 묵수하게 하였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위정척사운동은 항일 의병투쟁으로 계승 발전하여 반침략적 민족정신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아무튼 『조선책략』으로 야기된 신사년의 위정척사운동은 전국 유림에 커다란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이 간통이 발행된 1925년에도 유림에서는 그 지지가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간통에서 추진하던 사업, 즉 위정척사운동에 앞장섰던 열사와 충신의 사우 건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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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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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간통은 辛巳斥邪運動에 앞장섰던 인물들의 사우를 건립하자는 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자료이다. 하지만 이 간통이 가지는 자료적 가치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 간통은 신사척사운동에 대한 보다 많은 사실적 내용을 담고 있으며, 아울러 1925년에도 위정척사의 이념이 유림에 계속적으로 이어져 오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자료라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퇴계학과 유교문화』47, 윤순갑,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10
『한국행정사학지』22, 우홍준, 한국행정사학회, 2008
하창환,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