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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자계서원(紫溪書院)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5+KSM-XF.1924.4713-20130630.Y135010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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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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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박재도, 자계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자계서원길 17-7
작성시기 1924
형태사항 크기: 81.3 X 51
판본: 고문서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924청도 자계서원을 중건하여 위판봉안을 하니 참석해 달라고 옥산서원에 보낸 통문
이 문서는 훼철되었던 자계서원이 묘우인 존덕사와 강당인 보인당을 중건하고, 위패를 봉안하는 행사를 거행하니 옥산서원 유생들도 많이 참석해주길 청하는 내용의 통문이다. 본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자계서원은 절효 김극일, 탁영 김일손, 삼족당 김대유 세 선생을 제향하는 곳이다. 옛적 숙종조에 편액을 내려 그것을 존숭하고, 제문을 내려 그것을 표창하니, 온 나라에 학문을 숭상하는 것을 높이고, 유림이 존봉하는 것이 지금 수 백 년이 되었다. 그러나 1871년 조정의 명으로 훼철된 후 제사가 시행되지 않고, 유림들이 글을 읽고 음악을 연주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그 터가 황량하게 되어 잡초가 무성하게 되었다. 이를 한탄하면서 마음이 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이에 후생들이 한을 품은 것이 한결 같았다. 몇 해 전에 스스로 반성하여 안으로 공의가 높이 일어나 중건과 다시 제향을 하려고 했지만, 큰 힘이 계속해서 들어가야 하는 까닭에 성과 없이 제자리에만 있었다. 다행히 본손인 전 전랑 김용희가 정성과 온 힘을 다하였던 것에 힘입어 묘우와 강당을 차례로 중건하는데 힘을 덜게 되었다. 이에 이번 달 30일에 봉안하기로 정하였다. 이는 우리 사림의 큰 행운이요, 사문의 큰일이다. 어진 이를 공경하고 보위하는 정성과 이를 기쁘게 여기고 감동하는 도리는 정녕 멀고 가까움의 차이가 없이 동일한 것일 것이다. 이에 알리니 첨존들께서는 많이 참석하시어 큰일을 더욱 돈독히 해주시면 다행이겠다고 하였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紫溪書院誌』, 金峻坤 編, 川井印刷所(부산),1926.
이병훈,이수환

상세정보

1924淸道 紫溪書院을 重建하여 位版奉安을 하니 참석해 달라고 玉山書院에 보낸 통문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이 통문은 紫溪書院이 廟宇와 講堂을 重建하여 先賢의 위패를 봉안하는 행사에 참여해 달라는 내용이다. 통문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자계서원節孝 金克一, 濯纓 金馹孫, 三足堂 金大有 세 선생을 제향하는 곳이다. 옛적 숙종조에 편액을 내려 그것을 尊崇하고, 祭文을 내려 그것을 襃獎하니, 온 나라에 崇學하는 것을 높이고, 유림이 존봉하는 것이 지금 수 백 년이 되었다. 그러나 한번 朝令으로 毁撤된 후 俎豆가 시행되지 않고, 絃誦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그 터가 황량하게 되어 궁궁이, 토끼풀, 귀리 등의 잡초가 무성한 것을 한탄하면서 마음이 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이에 후생들이 한을 품은 것이 한결 같았다. 몇 해 전에 스스로 반성하여 안으로 公議가 높이 일어나 重建과 復享을 하려고 했지만, 큰 힘이 계속해서 들어가야 하는 까닭에 성과 없이 제자리에만 있었다. 다행히 本孫인 前 展郞 金容禧의 정성과 盡力에 힘입어 묘우와 강당을 차례로 중건하는데 힘을 덜게 되었다. 이에 이번 달 30일에 奉安하기로 정하였다. 이는 우리 사림의 큰 행운이요, 사문의 큰일이다. 어진 이를 공경하고 보위하는 정성과 이를 기쁘게 여기고 감동하는 도리는 정녕 멀고 가까움의 차이가 없이 동일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通告하니 첨존들께서 많이 참석하시어 大事를 도탑게 해주시면 다행이겠다.
자계서원은 통문에서 밝힌 것과 같이 金海金氏 가문의 金克一·金馹孫·金大有 등 3인을 제향한 서원이다. 1926년 간행된『紫溪書院誌』에는 1488년에 金馹孫이 이곳에 雲溪精舍詠歸樓를 세워 후진교육에 힘썼으며‚ 戊午士禍에서 金馹孫이 화를 입은 후 中宗反正으로 신원되자 1518년에 이 지역 유림들이 운계정사 자리에 사우를 세워 김일손을 제향하였다. 이어 1578년에 사우를 ‘紫溪書院’으로 고쳐 창건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서원이 불타자 1608년에 중건하고 김일손의 조부인 김극일과 조카인 김대유를 함께 제향하게 되었다. 이후 1660청도의 유생들이 賜額을 청하는 疏를 올리자 다음해인 1661년(현종 2)에 賜額되었다. 사액당시 工曹參議 李殷相이 왕명을 받아 「賜額時諭祭文」을 지어 致祭하였다. 1669년에는 詠歸樓를 중수하였지만, 1871년에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이후 통문에 나온 것과 같이 김용희 등의 후손과 유림들에 의해 1924년에 복원하면서, 우선 묘우인 尊德祠와 강당인 輔仁堂을 우선 중건하였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1920년대 전국적으로 先祖顯揚事業의 일환으로 서원과 사우의 복설이 다수 추진되었다. 자계서원의 경우에도 후손들이 주축이 되어 중건한 것으로 이 사실을 영남지역 유림들에게 알려 그 의미를 더 높이고자 하였다. 이에 본 통문을 보낸 것인데 여기에는 짧지만 서원의 중건이 이루지기 까지의 과정이 간략히 소개되어 있어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양반지배체제의 붕괴이후 근대사회로의 과도기 속에서도 여전히 성리학적 사유와 의례를 전승해가고 있는 향촌사회의 모습을 알려주고 있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紫溪書院誌』, 金峻坤 編, 川井印刷所(부산),1926.
이병훈,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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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924년 자계서원(紫溪書院) 통문(通文)

通文
右文爲通告事伏以鄙鄕 紫溪書院金節孝濯纓三足堂三先生尸祝之所而奧在 肅廟朝賁額而尊崇之賜侑而褒獎之
屹爲一國崇學儒林尊奉數百年于玆矣一自 朝令毁撤後俎豆無徵絃誦無聞叩墟荒凉鞠爲茂草兎葵燕麥之歎無日不
傷心而後生之齎恨如何可道哉年前自省內公議峻發爲重建復享之擧而事鉅力綿因循未果幸頼本孫前殿郞容禧之彈誠
盡力廟宇講堂次第歇役以今月三十日奉安爲定實吾林之大幸斯文之盛擧也尊衛之誠欣感之道寧有遠邇之不同哉
玆以通告 僉須賁臨以敦大事千萬幸甚
右文通
玉山書院
甲子十月十五日紫溪書院講長前參奉 朴在燾
有司 幼學 金容煥
芮鍾坤
會員 幼學 李庚庠
朴龍漢
李淳華
參奉 金昌宇
幼學 潘東{名+隹}
朴秉鉉
李德浩
朴永祚
崔章默
蔣華植
李長基
李洪基
朴守坤
金容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