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운곡단소(雲谷壇所) 통문(通文)
이 통문은 1923년 3월 9일 운곡단소가 옥산서원에 보낸 것으로 그 내용은 옥산서원에서 제안한 두촌 이팽수의 재실 건립에 적극 찬동한다는 것이다. 이 통문에서 말하는 이팽수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홍천 등지에서 적을 무찌르고, 6월에는 문천회맹, 즉 경주를 탈환하기 위해 의병들이 탑동지역에 모여 왜병에 맞서 싸운 전투에서 상당한 공로를 세웠다. 그 후 이팽수는 무과에 급제하여 복병장으로 울산 서생포의 방어를 담당하였었다. 하지만 왜군의 막대한 군사력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33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본 통문에서 이팽수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충성을 위해 죽었다고 하는 것은 그의 이러한 행적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팽수는 이러한 공적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의 공적이 인정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0년 가까이 되는 1783년(정조 7)때였다. 이때 그는 비로소 가선대부병조참판으로 추증하고, 표충각이 세워져 공로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유명 인사들이 묘갈명, 묘지명, 초혼사, 초혼묘시, 정려기, 정려비문 등을 통해 이팽수의 공적을 찬양했다. 하지만 이팽수는 어느 원사에서도 제향되지는 않았다. 본 통문에서 받들어 모셔지는 의식이 없어 지금까지 여한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옥산서원에서 이팽수를 추모할 재실을 건립하자고 공의를 발의하여 통문으로 운곡단소를 비롯한 경주 일원의 교원에 제안하였다. 그 제안은 이듬해인 1924년에 안강읍 산대리에 덕산서사라는 재실로 결실을 보았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어떻게 제안과 동시에 그 실천이 이루어질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객관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팽수는 옥산서원에서 재실의 건립을 제안할 만한 인물이 되기에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산서원이 먼저 나서서 그의 재실을 건립할 것을 제안하고, 그 제안과 동시에 실천에 옮겨졌다는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이 통문이 발행된 시기와 경주 인근의 원사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동의가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추측해 볼 수 있다. 이팽수를 추모할 재실을 건립하자고 제안한 1923년은 기미년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가 4년 가까이 흐른 뒤이다. 만세운동이 일어날 당시만 해도 조선인의 마음속에는 독립에 대한 열망과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만세운동이 좌절되면서 점차 일제의 식민지가 고착화되어가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독립에 대한 열망을 다시 불러일으켜야 했다. 그 방안으로 옥산서원에서는 이팽수를 이 시점에서 다시 살려내는 것을 채택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잊힌 과거를 되살려줄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지향해야 할 행동방향을 제시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현실적 요구는 그의 재실을 건립하게 한 원동력이었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즉 일제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시대적 열망이 경주 인근의 원사들로부터 한결같은 찬동의 의견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당시 새롭게 건립되거나 복원이 되는 많은 院祠들이 모두 사적인 이익, 즉 일족의 단합과 그 위세의 과시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현실의 요구와 필요, 그리고 기여를 위해 건립되기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창환,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