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서악서원(西岳書院) 통문(通文)
이 통문은 1923년 7월 10일 서악서원이 옥산서원에 보내온 것으로 그 내용은 옥산서원이 제안한 두촌 이팽수의 재실 건립에 대해 찬동한다는 뜻을 담을 것이다. 이 통문에서 말하는 이팽수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홍천 등지에서 적을 무찌르고, 6월에는 문천회맹, 즉 경주를 탈환하기 위해 의병들이 탑동지역에 모여 왜병에 맞서 싸운 전투에서 상당한 공로를 세웠다. 그 후 이팽수는 무과에 급제하여 복병장으로 울산 서생포의 방어를 담당하였으나, 왜군의 막대한 군사력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33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본 통문에서 임진년에 우뚝한 절개로 효자가 효도를 하듯 전장에서 있는 힘을 다해 싸워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기틀을 마련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공적이 인정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0년 가까이 되는 1783년(정조 7)으로 추증된 관직은 가선대부병조참판이었고, 드러난 징표는 표충각이었다. 이 통문에서 이팽수의 공적에 대해 조정에서 증직과 의식이 내려졌다는 것은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또한 그의 공로는 영의정을 지낸 번암 채제공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지은 묘갈명, 묘지명, 초혼사, 초혼묘시, 정려기, 그리고 정려비문 등에 나타나 있다. 이러한 글들은 본 통문에서 당시의 선배들이 그의 공적을 공개적으로 칭송했다고 하는 것들이다. 이처럼 공적이 뚜렷한 이팽수를 추모할 재실을 건립하자고 옥산서원이 경주 일원의 교원에 제안하였다. 이 제안에 대해 본 통문의 서악서원처럼 모두가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이듬해인 1924년에 안강읍 산대리에 덕산서사라는 재실이 건립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어떻게 제안과 동시에 그 실천이 이루어질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객관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팽수는 옥산서원에서 재실의 건립을 제안할 만한 인물이 되기에 부족하다. 물론 옥산서원이 있는 안강읍은 이팽수의 본관인 청안이씨의 세거지이기는 하지만, 그곳의 향권은 이언적의 후손인 여강이씨와 손중돈의 후손인 경주손씨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경주에는 학문적으로나 공적에 있어 이팽수를 능가하는 여러 인물들이 배향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옥산서원이 먼저 나서서 그의 재실을 건립할 것을 제안하고, 그 제안과 동시에 실천에 옮겨졌다는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현실적 요구에 의한 것으로 추측이 된다. 이팽수를 추모할 재실을 건립하자고 제안한 1923년은 기미년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가 4년 가까이 흐른 뒤이다. 만세운동이 일어날 당시만 해도 조선인의 마음속에는 독립에 대한 열망과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만세운동이 좌절되면서 점차 일제의 식민지가 고착화되어가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독립에 대한 열망을 다시 불러일으켜야 했다. 그러한 임무에 적합한 인물이 이팽수라고 옥산서원은 생각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잊힌 과거를 되살려줄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지향해야 할 행동방향을 제시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현실적 요구는 그의 재실을 건립하게 한 원동력인 것으로 생각이 된다. 이것을 보면 당시 새롭게 건립되거나 복원이 되는 많은 원사들이 모두 사적인 이익, 즉 일족의 단합과 그 위세의 과시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현실의 요구와 필요, 그리고 기여를 위해 건립되기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창환,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