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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경주향교(慶州鄕校) 답통문(答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5+KSM-XF.1923.4777-20130630.Y1350101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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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최현필, 경주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교촌안길 27-20
작성시기 1923
형태사항 크기: 86.7 X 60.5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923년 경주향교(慶州鄕校) 답통문(答通文)
이 통문은 1923년 3월 경주향교에서 옥산서원으로 보낸 것이며, 그 내용은 옥산서원에서 두촌 이팽수를 추모할 재실을 건립하자는 제안에 대해 답변한 것이다. 이 통문에서 말하는 이팽수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홍천 등지에서 적을 무찌르고, 6월에는 경주를 탈환하기 위해 의병들의 문천회맹에 참가하여 왜병에 맞서 싸워 상당한 공로를 세웠다. 그 후 이팽수는 무과에 급제하여 복병장으로 울산 서생포의 방어를 담당하였었다. 하지만 왜군의 막대한 군사력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33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런 그의 공적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0년 가까이 되는 1783년(정조 7)때였다. 이 통문에서 이팽수가 세상을 떠날 때 그의 공로를 상신하는 사람이 없어 쓸쓸히 묻힐 뻔했다는 것은 이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통문에서도 말하는 것처럼 정조는 그를 가선대부병조참판으로 추증하고, 표충각을 세워 그의 공로를 드러나게 하였다. 그리고 이팽수의 공로는 본 통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채제공, 권상일, 이헌경, 이헌락, 홍량호, 김상집, 정존람 등 당시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의 묘갈명, 묘지명, 초혼사, 초혼묘시, 정려기, 정려비문 등에 기록되어 있다. 이 통문은 이처럼 공적이 뚜렷한 이팽수를 추모할 재실을 건립하자고 옥산서원경주 일원의 교원에 제안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제안은 이듬해인 1924년에 안강읍 산대리덕산서사라는 재실로 결실을 보았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어떻게 제안과 동시에 그 실천이 이루어질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객관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팽수옥산서원에서 재실의 건립을 제안할 만한 인물이 되기에 부족하다. 물론 옥산서원이 있는 안강읍이팽수의 본관인 청안이씨의 세거지이기는 하지만, 그곳의 향권은 이언적의 후손인 여강이씨와 손중돈의 후손인 경주손씨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팽수의 업적이 뚜렷하기는 하지만, 이미 경주에는 학문적으로나 공적에 있어 그를 능가하는 여러 인물들이 배향되고 있어 또다시 그를 제향해야 할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옥산서원이 먼저 나서서 그의 재실을 건립할 것을 제안하고, 그 제안과 동시에 실천에 옮겨졌다는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현실적인 요구와 필요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이팽수를 추모할 재실을 건립하자고 제안한 1923년은 기미년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가 4년 가까이 흐른 뒤이다. 이 만세운동이 좌절되면서 점차 일제의 식민지가 고착화되어가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독립에 대한 열망을 다시 불러일으켜야 했다. 그 방안으로 옥산서원에서는 이팽수를 이 시점에서 다시 살려내는 것을 채택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잊힌 과거를 되살려줄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지향해야 할 행동방향을 제시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보면 당시 새롭게 건립되거나 복원이 되는 많은 원사들 중에는 단순히 일족의 단합과 그 위세의 과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의 요구와 필요, 그리고 기여를 위해 건립되기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창환,이수환

상세정보

1923년 3월, 玉山書院에서 提案한 杜村 李彭壽의 齋室 建立에 대한 慶州鄕校의 答通文
[
내용 및 특징
]
이 통문은 1923년 3월 慶州鄕校에서 玉山書院으로 보낸 것이며, 그 내용은 옥산서원에서 杜村 李彭壽의 齋室을 건립하자는 제안에 대해 답변한 것이다. 이 통문에 따르면 두촌 이팽수의 장엄한 충성과 우뚝한 절개는 분명하기가 해나 별과 같았으나 葬事를 지낼 때에 그의 공로를 上申하는 사람이 없어 자칫 쓸쓸히 묻힐 뻔하였다. 그런데 정조 임금께서 특별히 이팽수를 높이 받드는 의식을 내리셔서 참판에 버금가는 벼슬로 추증하고, 碑閣으로 그의 공로를 밝히셨다. 이것은 정조께서 그의 충성스럽고 근실함을 장려하여 후세 사람들을 권면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이 통문은 포상의 의미를 해석했다. 이어서 당시에 큰 덕을 지닌 선비와 대가들이 이팽수의 공로를 글로 밝힌 것은 옥산서원에서 보낸 통문의 내용과 같아서 더 추가할 것은 없으나, 그의 고향이 한적한 시골이라 경건히 모시는 예절은 미처 행하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이제 옥산서원에서부터 공의를 일으켜서 이팽수를 받들 재실을 경영하자고 하니, 이는 善을 즐기고 德을 좋아하는 군자가 타고난 성품이 같다는 것을 확인한 것으로 누군들 기뻐하며 호응하지 않겠느냐며 옥산서원의 제의에 대해 크게 환영하였다. 그래서 그 동안 쌓였던 울분을 씻어내는 정성으로 창설의 뜻에 화답한다고 이 통문은 밝혔다. 그리고 기약한 것처럼 재실의 창건이라는 큰 일이 이루어져서 한편으로는 충절을 보인 이팽수를 호위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여려 사람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었으면 참으로 다행이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는다.
이 통문에서 말하는 이팽수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홍천 등지에서 적을 무찌르고, 6월에는 汶川會盟, 즉 경주를 탈환하기 위해 의병들이 탑동지역에 모여 왜병에 맞서 싸운 전투에서 상당한 공로를 세웠다. 그 후 이팽수는 무과에 급제하여 伏兵將으로 울산 西生浦의 방어를 담당하였었다. 하지만 왜군의 막대한 군사력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33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런 그의 공적이 인정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0년 가까이 되는 1783년(정조 7)때였다. 이 통문에서 이팽수가 세상을 떠날 때 그의 공로를 상신하는 사람이 없어 쓸쓸히 묻힐 뻔했다는 것은 이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통문에서도 말하는 것처럼 정조는 그를 참판에 버금가는 벼슬, 즉 嘉善大夫兵曹參判으로 추증하고, 表忠閣을 세워 그의 공로를 드러나게 하였다. 그리고 이팽수의 공로는 領議政을 지낸 樊巖 蔡濟恭의 墓碣銘, 副提學을 지낸 淸臺 權相一의 墓誌銘, 左承旨를 지낸 艮翁 李獻慶의 招魂辭, 縣監을 지낸 藥南 李憲洛의 招魂墓詩, 禮曹參判을 지낸 耳溪 洪良浩金尙集의 旌閭記, 그리고 영의정을 지낸 陽菴 鄭存謙의 旌閭碑文 등에 나타나고, 이것들은 모두 『杜村實記』에 실려 있다. 본 통문에서 당시의 선비와 대가들이 글로써 이팽수의 공적을 밝혔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공적이 뚜렷한 이팽수를 추모할 재실을 건립하자고 옥산서원경주 일원의 교원에 제안하였다. 그 제안은 이듬해인 1924년에 안강읍 산대리德山書社라는 재실로 결실을 보았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어떻게 제안과 동시에 그 실천이 이루어질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객관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팽수옥산서원에서 재실의 건립을 제안할 만한 인물이 되기에 부족하다. 물론 옥산서원이 있는 안강읍이팽수의 본관인 淸安李氏의 세거지이기는 하지만, 그곳의 향권은 이언적의 후손인 여강이씨와 손중돈의 후손인 경주손씨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팽수의 업적이 뚜렷하기는 하지만, 이미 경주에는 학문적으로나 공적에 있어 그를 능가하는 여러 인물들이 배향되고 있어 또다시 그를 제향해야 할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옥산서원이 먼저 나서서 그의 재실을 건립할 것을 제안하고, 그 제안과 동시에 실천에 옮겨졌다는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가 명백한 것은 아니지만 본 통문의 한 구절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정조가 200년이나 지나서 이팽수의 공적을 드러낸 이유를 본 통문은 충성스럽고 근실함을 장려하여 후세 사람들을 권면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이팽수와 같은 인물이 지금에 있어 필요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팽수를 추모할 재실을 건립하자고 제안한 1923년은 기미년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가 4년 가까이 흐른 뒤이다. 만세운동이 일어날 당시만 해도 조선인의 마음속에는 독립에 대한 열망과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만세운동이 좌절되면서 점차 일제의 식민지가 고착화되어가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독립에 대한 열망을 다시 불러일으켜야 했다. 그 방안으로 옥산서원에서는 이팽수를 이 시점에서 다시 살려내는 것을 채택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잊힌 과거를 되살려줄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지향해야 할 행동방향을 제시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현실적 요구는 그의 재실을 건립하게 한 원동력인 것으로 생각이 된다. 이것을 보면 당시 새롭게 건립되거나 복원이 되는 많은 院祠들이 모두 사적인 이익, 즉 一族의 단합과 그 위세의 과시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현실의 요구와 필요, 그리고 기여를 위해 건립되기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자료적 가치
]
이 통문은 杜村 李彭壽의 재실인 德山書社가 어떤 경위로 건립되었는가를 알게 하는 자료이다. 그러나 그것이 건립된 내면적 이유를 살펴보면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많은 원사들 중에는 단순히 一族의 단합이나 그 위세의 과시라는 사적인 의도가 아닌 현실의 요구와 필요, 그리고 기여를 위한 공적인 의도에서 건립되기도 하였다는 것을 이 통문은 보여주고 있다.
하창환,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923년 경주향교(慶州鄕校) 답통문(答通文)
答通文
右文爲答通事於惟我 杜村先生李公危忠卓節炳若日星而立殣之時無人上功殆將寥寥堙沒矣逮我
正祖朝特 賜褒崇之典 贈以亞卿旌以綽楔其勵忠勤而勸來世爲何如哉且當時碩德鴻匠之信筆掦扢果如來諭宜無餘蘊而
獨於畏壘虔奉之節未遑幷擧矣今自 貴院公議齊發將營俎豆之奉噫 僉君子之樂善好德實爲先獲彛衷所同孰不
慕悅而響應哉玆因齊鬱之誠用答刱設之意伏願克期營建俾敦大事一以衛忠節二以副輿望千萬幸甚
右文答
玉山書院
癸亥三月 日 鄕校會中 幼學 李能韶
崔粲壽
南城鎭
前參奉 李圭升
幼學 黃致河
製通前正字 崔鉉弼
幼學 李烜久
孫晉弼
寫通幼學 任弼淳
崔禎燮
南翰鎭
會員 幼學 任東宰
鄭錫夏
權五洛
李基赫
李容基
崔世克
李能玹
南敎植
前參奉 金錫奎
金憲洙
幼學 孫秉文
崔世杰
李耆榮
任泰淳
崔海喆
李錫徽
南廷鎭
崔鉉澈
直員 南敎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