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1731년 서악서원(西岳書院)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5+KSM-XF.1923.4777-20130630.Y1350101085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서악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2길 23
작성시기 1923
형태사항 크기: 78.3 X 60.6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731년 서악서원(西岳書院) 통문(通文)
이 통문은 1731년 1월 4일 서악서원에서 화재로 인해 소실된 금산재사를 중건하는데 옥산서원의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의 것이다. 이 통문에서 말하고 있는 금산재사에 대해서 자료의 부족으로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리고 이 통문이 발행된 연대 또한 분명한 것이 아니라, 숭정 갑진년(1664년 : 현종 5)이란 연호와 간지를 중심으로 통문의 내용을 연계시켜 추정한 것이다. 그렇지만 서악서원이 창건된 과정을 대비시켜 보면 조금이나마 금산재사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서악서원1561년(명종 16) 당시 경주부윤이었던 이정이 옛 신라의 묘역들이 몹시 황폐해진 것을 보고 개탄하며 이를 수리하고자 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그 묘역들 가운데 통일 사업에 큰 공헌을 남긴 태종 무열왕과 각간 김유신의 것에 특히 관심을 가지고, 이들에 대해서는 묘역을 수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당을 세우고자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정은 자신의 스승인 퇴계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러자 퇴계는 일개 군수의 신분으로 제왕의 사당을 세우려 하는 것은 분수를 넘어선 것 같으니 각간의 사당만 세우되 제향이나 묘역 관리 및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겸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어놓았다. 이정퇴계의 견해를 쫓아 선도산 아래에 서악정사를 세워 김유신의 제사 및 교육을 위한 장소로 삼게 하였다. 이후 경주의 유생들이 홍유후 설총문창후 최치원의 위패도 합사하자는 의견을 내자, 이정은 다시 퇴계에게 자문을 구하여 두 사람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 이에 화답하듯 퇴계는 ‘서악정사’라는 현판을 써주었다. 이후 서악정사1623년(인조 1) 진사 최동언 등이 부윤 여우길을 통해 조정에 사액을 청하였고, 조정에서는 서악서원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서악정사에서 서악서원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보면 금산재사서악정사를 모델로 지어진 재사라고 추정할 수 있다. 금산재사김유신을 ‘묘향’하던 곳이라는 말은 이정이 그 묘소를 수리하면서 지은 사당인 서악정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다 퇴계의 조언을 받아들여 서악정사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겸하게 했는데, 이는 금산재사에서도 하였던 일이다. 그래서 이 통문에서 금산재사를 설명하면서 ‘들어가서 학업을 닦게 한 것이 40여 년이다.’라는 말을 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금산재사서악정사서악서원으로 바뀌면서 처음 서악정사가 했던 기능과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 창건되었다고 추정을 해도 그다지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금산재사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을 보면 그때 이후로 더 이상 복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慶北書院誌』, 한국국학진흥원, 경상북도, 2009
하창환,이수환

상세정보

1731년 1월 4일, 西岳書院에서 화재로 燒失된 金山齋舍을 重建하기 위해 玉山書院에 도움을 요청하는 通文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이 통문은 1731년 1월 4일 西岳書院에서 화재로 인해 燒失된 金山齋舍를 重建하는데 玉山書院의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의 것이다. 이 통문에 따르면 금산재사는 開國公 金先生, 즉 金庾信의 墓享을 봄과 가을로 받들던 곳으로 崇禎 甲辰年(1664년 : 현종 5)에 창건되었다. 그런데 甲子年(1684년 : 숙종 10)에 화재를 만나 소실되었다. 중건할 재력을 나누어내야 하는데 그럴 수 없게 되자 당시의 어른들께서 公議를 발의하고 官家에 여쭈어 고을의 크고 작은 집안을 세 부류로 나누어 돈을 거두어들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부족하여 고을의 각 祠宇와 書院들로부터 조금씩 재물을 거두었다. 이것으로 10間이 넘는 齋舍를 지었다. 그렇게 하여 40여 년 동안 선비들이 그곳에서 학업을 닦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 섣달 그믐날 큰 변고가 갑자기 일어나 모든 것이 다 타버리고 남은 것이 없게 되어 자신들의 고을에 닥친 불행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이 통문은 탄식하였다. 이어서 사림에서 선현을 받들어 모시는 도리를 위해서는 제사를 거행할 재실이 없을 수 없고, 또한 이제 묘향을 지내야 할 때가 멀지 않았으니 재실을 지어야 하기에 서악서원에서부터 먼저 공의를 발의하여 관가에도 아뢰고, 고을에 두루 고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말과 함께 이 일을 같은 집안의 일로 보고 전례에 따라 넉넉히 도와주면 참으로 고맙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에서 말하고 있는 금산재사에 대해서는 자료의 부족으로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리고 이 통문이 발행된 연대 또한 분명한 것이 아니라, 숭정 갑진년이란 연호와 간지를 중심으로 통문의 내용을 연계시켜 추정한 것이다. 그렇지만 서악서원이 창건된 과정을 대비시켜 보면 조금이나마 금산재사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서악서원1561년(명종 16) 당시 경주부윤이었던 李楨가 옛 신라의 묘역들이 몹시 황폐해진 것을 보고 개탄하며 이를 수리하고자 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그 묘역들 가운데 통일 사업에 큰 공헌을 남긴 太宗 武烈王과 角干 金庾信의 것에 특히 관심을 가지고, 이들에 대해서는 묘역을 수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祠堂을 세우고자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정은 자신의 스승인 退溪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러자 퇴계는 일개 군수의 신분으로 제왕의 사당을 세우려 하는 것은 분수를 넘어선 것 같으니 각간의 사당만 세우되 제향이나 묘역 관리 및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겸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어놓았다. 이정퇴계의 견해를 쫓아 선도산 아래에 西岳精舍를 세워 김유신의 제사 및 교육을 위한 장소로 삼게 하였다. 이후 경주의 유생들이 弘儒侯 薛聰文昌侯 崔致遠의 位牌도 합사하자는 의견을 내자, 이정은 다시 퇴계에게 자문을 구하여 두 사람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 이에 화답하듯 퇴계는 ‘西岳精舍’라는 현판을 써주었다. 이후 서악정사1623년(인조 1) 進士 崔東彦 등이 府尹 呂祐吉을 통해 조정에 賜額을 청하였고, 조정에서는 서악서원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서악정사에서 서악서원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보면 금산재사서악정사를 모델로 지어진 재사라고 추정할 수 있다. 금산재사김유신을 ‘묘향’하던 곳이라는 말은 이정이 그 묘소를 수리하면서 지은 사당인 서악정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다 퇴계의 조언을 받아들여 서악정사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겸하게 했는데, 이는 금산재사에서도 하였던 일이다. 그래서 이 통문에서 금산재사를 설명하면서 ‘들어가서 학업을 닦게 한 것이 40여 년이다.(莊修四十餘年矣)’라는 말을 쓴 것이다. 이렇게 보면 금산재사서악정사서악서원으로 바뀌면서 처음 서악정사가 했던 기능과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 창건되었다고 추정을 해도 그다지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17세기 중반 이후에 경주에는 금산재사가 세워져 봄가을로 김유신에게 묘향을 받들었고, 그곳에서 선비들이 학문을 닦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곳은 한 차례의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경주의 민가와 관청, 그리고 원사의 도움으로 중건되었다가 1730년 섣달 그믐날 갑작스런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여러 곳에 도움을 청했다는 것을 이 통문은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지금 금산재사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을 보면 그때 이후로 더 이상 복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자료적 가치]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비록 지금은 확인할 수 없는 금산재사라는 사당을 겸한 학당의 내력을 소상하게 알려주고 있다. 그와 함께 재사의 건립이나 중건에 있어 각 원사에서 십시일반으로 도움을 주는 것은 오랜 전통이었으며, 그 도움을 요청하는 곳이 단순히 원사뿐만 아니라 관청과 민간들도 포함이 된다는 것을 이 통문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慶北書院誌』, 한국국학진흥원, 경상북도, 2009
하창환,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731년 서악서원(西岳書院) 통문(通文)

通文
右文爲通諭事 開國公金先生春秋墓享金山齋舍創建於崇禎甲辰粤在甲子年間偶値回祿之災重
建財力萬無辨出故先父老竣發公議稟告官家收歛三分錢於一邑大小民戶而此猶不足又爲鳩財於
鄕中各祠院造成數十間齋舍考諸往錄昭然載在莊修四十餘年矣頃於臘月晦日大變猝發燒燼無餘
吾鄕之不幸一至於此哉爲士林遵奉先賢之道不可無典祀齋室目今墓享不遠方营垂建故自本院先發公
議稟達官家遍告一鄕伏願 僉尊視以同室之事援例優助千萬幸甚
右文通
玉山書院
辛亥正月四日西岳書院 院長 南至陽
齋任 任致湜
會員 柳汝春
崔世璞
鄭志鴻
崔思萬
韓公琪
李羲錫
韓公揆
朱陽鳳
崔世文
白東老
孫震魯
柳寅龍
徐奎
鄭頥樂
李曾壽
黃啓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