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1년 서악서원(西岳書院) 통문(通文)
이 통문은 1731년 1월 4일 서악서원에서 화재로 인해 소실된 금산재사를 중건하는데 옥산서원의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의 것이다. 이 통문에서 말하고 있는 금산재사에 대해서 자료의 부족으로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리고 이 통문이 발행된 연대 또한 분명한 것이 아니라, 숭정 갑진년(1664년 : 현종 5)이란 연호와 간지를 중심으로 통문의 내용을 연계시켜 추정한 것이다. 그렇지만 서악서원이 창건된 과정을 대비시켜 보면 조금이나마 금산재사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서악서원은 1561년(명종 16) 당시 경주부윤이었던 이정이 옛 신라의 묘역들이 몹시 황폐해진 것을 보고 개탄하며 이를 수리하고자 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그 묘역들 가운데 통일 사업에 큰 공헌을 남긴 태종 무열왕과 각간 김유신의 것에 특히 관심을 가지고, 이들에 대해서는 묘역을 수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당을 세우고자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정은 자신의 스승인 퇴계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러자 퇴계는 일개 군수의 신분으로 제왕의 사당을 세우려 하는 것은 분수를 넘어선 것 같으니 각간의 사당만 세우되 제향이나 묘역 관리 및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겸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어놓았다. 이정은 퇴계의 견해를 쫓아 선도산 아래에 서악정사를 세워 김유신의 제사 및 교육을 위한 장소로 삼게 하였다. 이후 경주의 유생들이 홍유후 설총과 문창후 최치원의 위패도 합사하자는 의견을 내자, 이정은 다시 퇴계에게 자문을 구하여 두 사람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 이에 화답하듯 퇴계는 ‘서악정사’라는 현판을 써주었다. 이후 서악정사는 1623년(인조 1) 진사 최동언 등이 부윤 여우길을 통해 조정에 사액을 청하였고, 조정에서는 서악서원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서악정사에서 서악서원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보면 금산재사는 서악정사를 모델로 지어진 재사라고 추정할 수 있다. 금산재사가 김유신을 ‘묘향’하던 곳이라는 말은 이정이 그 묘소를 수리하면서 지은 사당인 서악정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다 퇴계의 조언을 받아들여 서악정사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겸하게 했는데, 이는 금산재사에서도 하였던 일이다. 그래서 이 통문에서 금산재사를 설명하면서 ‘들어가서 학업을 닦게 한 것이 40여 년이다.’라는 말을 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금산재사는 서악정사가 서악서원으로 바뀌면서 처음 서악정사가 했던 기능과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 창건되었다고 추정을 해도 그다지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금산재사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을 보면 그때 이후로 더 이상 복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慶北書院誌』, 한국국학진흥원, 경상북도, 2009
하창환,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