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흥해향교(興海鄕校) 통문(通文)
이 통문은 1923년 9월 흥해향교에서 회재 이언적을 배향하는 곡강서원을 복원하기 위한 모임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옥산서원에 알리는 내용의 것이다. 이 통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곡강서원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정삼외에 의해 1607년(선조 40)에 창건되었다. 창건될 당시에는 회재 선생만을 배향하였다. 그래서 통문에서 곡강서원은 회재선생의 ‘尸祝之地’, 즉 사당을 세워 제향하던 곳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 후 1708년(숙종 34)에 문간공 조경이 추배되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이 통문에서 ‘戊己令甲’이라고 하는 것은 곧 무진년(1868년 : 고종 5)과 기사년(1869년 : 고종 6)에 있었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말하는 것이고, 훼철된 정확한 연도는 기사년, 즉 1869년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1920년대를 전후하여 훼철된 서원의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일어나자 흥해에서도 곡강서원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1923년 9월 10일에 흥해향교에서 곡강서원의 복원을 위한 모임을 갖게 되었음을 이 통문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통문의 말미에 곡강서원을 복원하고자 하는 일을 ‘드러내 놓고 알릴 수는 없지만 회재 선생에 대해 곡강서원의 사림이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의 간절함이 없을 수 없어’ 옥산서원에 알리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같은 말을 특별히 하는 것은 옥산서원이 회재 선생의 고향이자 평소에 생활하던 곳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인연으로 서원의 복원에 도움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 통문에서 옛날의 성대했던 의식을 되살리고자 하나 시세와 재력이 미치지 못했다고 자신들의 사정을 말하는 것 또한 이러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서원 간의 인연을 근거로 도움을 요청하는 일은 당시에 있어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요청을 받은 곳에서도 냉정하게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형편에 따라 도움을 주는 것이 또한 관례였다.
그런데 1920년대를 전후로 한 서원 복원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제향 인물의 후손들로부터 희사되는 경제적 도움이었다. 당시에는 과거처럼 서원의 활동이 왕성한 시기가 아니기에 서원 간의 도움은 한계가 있었으며, 또한 과거처럼 관청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서원의 복원에는 제향 인물의 후손들이 먼저 재물을 모아 여론을 조성하고, 이에 사림이 호응을 하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하지만 이 통문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곡강서원의 복원에는 흥해 유림들이 앞장을 서고 있는 형세이다.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복원을 할 만큼의 자금을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곡강서원을 복원하고자 하는 흥해 유림들의 활동은 결실이 맺지 못하고, 곡강서원은 지금도 훼철될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하고 있다.
『玉山書院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3
『대동문화연구』, 柳浚弼,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0
하창환,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