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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흥해향교(興海鄕校)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5+KSM-XF.1923.4777-20130630.Y1350101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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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정원검, 이상백, 흥해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동해대로 1530번길 1-3
작성시기 1923
형태사항 크기: 105.3 X 56.9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923년 흥해향교(興海鄕校) 통문(通文)
이 통문은 1923년 9월 흥해향교에서 회재 이언적을 배향하는 곡강서원을 복원하기 위한 모임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옥산서원에 알리는 내용의 것이다. 이 통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곡강서원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정삼외에 의해 1607년(선조 40)에 창건되었다. 창건될 당시에는 회재 선생만을 배향하였다. 그래서 통문에서 곡강서원회재선생의 ‘尸祝之地’, 즉 사당을 세워 제향하던 곳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 후 1708년(숙종 34)에 문간공 조경이 추배되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이 통문에서 ‘戊己令甲’이라고 하는 것은 곧 무진년(1868년 : 고종 5)과 기사년(1869년 : 고종 6)에 있었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말하는 것이고, 훼철된 정확한 연도는 기사년, 즉 1869년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1920년대를 전후하여 훼철된 서원의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일어나자 흥해에서도 곡강서원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1923년 9월 10일에 흥해향교에서 곡강서원의 복원을 위한 모임을 갖게 되었음을 이 통문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통문의 말미에 곡강서원을 복원하고자 하는 일을 ‘드러내 놓고 알릴 수는 없지만 회재 선생에 대해 곡강서원의 사림이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의 간절함이 없을 수 없어’ 옥산서원에 알리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같은 말을 특별히 하는 것은 옥산서원회재 선생의 고향이자 평소에 생활하던 곳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인연으로 서원의 복원에 도움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 통문에서 옛날의 성대했던 의식을 되살리고자 하나 시세와 재력이 미치지 못했다고 자신들의 사정을 말하는 것 또한 이러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서원 간의 인연을 근거로 도움을 요청하는 일은 당시에 있어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요청을 받은 곳에서도 냉정하게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형편에 따라 도움을 주는 것이 또한 관례였다.
그런데 1920년대를 전후로 한 서원 복원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제향 인물의 후손들로부터 희사되는 경제적 도움이었다. 당시에는 과거처럼 서원의 활동이 왕성한 시기가 아니기에 서원 간의 도움은 한계가 있었으며, 또한 과거처럼 관청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서원의 복원에는 제향 인물의 후손들이 먼저 재물을 모아 여론을 조성하고, 이에 사림이 호응을 하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하지만 이 통문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곡강서원의 복원에는 흥해 유림들이 앞장을 서고 있는 형세이다.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복원을 할 만큼의 자금을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곡강서원을 복원하고자 하는 흥해 유림들의 활동은 결실이 맺지 못하고, 곡강서원은 지금도 훼철될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하고 있다.
『玉山書院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3
『대동문화연구』, 柳浚弼,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0
하창환,이수환

상세정보

1923년 9월, 興海鄕校에서 曲江書院의 復元을 위한 모임을 玉山書院에 알리는 通文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이 통문은 1923년 9월 興海鄕校에서 晦齋 李彦迪를 配享하는 曲江書院를 복원하기 위한 모임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玉山書院에 알리는 내용의 것이다. 이 통문에 따르면 흥해곡강서원은 文元公 회재선생의 祠堂이 세워져 祭享하던 곳이며, 이곳 사람들이 믿고서 의지하던 곳이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戊辰年(1868년 : 고종 5)과 己巳年(1869년 : 고종 6)의 법령 이후로 祠宇가 훼철되었다. 그로 인해 그 곳은 잡초가 무성하고, 사림의 행동은 동요되었다. 그리고 곡강서원의 옛터를 지나는 사람은 지날 때마다 한결같은 마음이 될 수 없었다고 이 통문은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옛날의 성대했던 의식을 다시 보고자 하나 시절의 형세와 일이 되어 가는 형편, 그리고 재력 등 모두가 미치지 못해 통한을 품은지가 오래되었다며 안타까운 현실을 토로했다. 그래서 이번에 온 고을의 公議를 모아 회재 선생을 추모하는 일을 위해 契를 조직하고 오는 9월 10일 흥해향교 明倫堂에서 모임을 갖게 되었다고 곡강서원의 복원을 알리며, 옥산서원에서도 이 사실을 두루 헤아려주었으면 고맙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곡강서원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鄭三畏에 의해 1607년(선조 40)에 창건되었다. 창건될 당시에는 회재 선생만을 배향하였다. 그래서 통문에서 곡강서원회재선생의 ‘尸祝之地’라고 말한 것이다. 그 후 1708년(숙종 34)에 文簡公 趙絅이 추배되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이 통문에서 ‘戊己令甲’이라고 하는 것은 곧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말하는 것이고, 훼철된 정확한 연도는 기사년, 즉 1869년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1920년대를 전후하여 훼철된 서원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일어나자 흥해에서도 곡강서원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1923년 9월 10일에 흥해향교에서 곡강서원의 복원을 위한 모임을 갖게 되었음을 이 통문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통문의 말미에 곡강서원을 복원하고자 하는 일을 ‘드러내 놓고 알릴 수는 없지만 회재 선생에 대해 곡강서원의 사림이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의 간절함이 없을 수 없어’ 옥산서원에 알리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같은 말을 특별히 하는 것은 옥산서원회재 선생의 고향이자 평소 藏修之地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인연으로 서원의 복원에 도움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 통문에서 옛날의 성대했던 의식을 되살리고자 하나 시세와 재력이 미치지 못했다고 자신들의 사정을 말하는 것 또한 이러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서원 간의 인연을 근거로 도움을 요청하는 일은 당시에 있어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요청을 받은 곳에서도 냉정하게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형편에 따라 도움을 주는 것이 또한 관례였다. 이렇게 서로 간에 상부상조하는 일은 서원의 각종 都錄, 置簿記, 重修·重建日記, 考往錄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1920년대를 전후로 한 서원 복원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제향 인물의 후손들로부터 희사되는 경제적 도움이었다. 당시에는 과거처럼 서원의 활동이 왕성한 시기가 아니기에 서원 간의 도움은 한계가 있었으며, 또한 과거처럼 관청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서원의 복원에는 제향 인물의 후손들이 먼저 재물을 모아 여론을 조성하고, 이에 사림이 호응을 하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하지만 이 통문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곡강서원의 복원에는 흥해 유림들이 앞장을 서고 있는 형세이다.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복원을 할 만큼의 자금을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곡강서원을 복원하고자 하는 흥해 유림들의 움직임은 결실을 보지 못했으며, 곡강서원은 지금도 훼철될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하고 있다.
[자료적 가치]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1923년곡강서원을 복원하려는 흥해 유림들의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곡강서원이 지금도 훼철된 상태 그대로 있다는 것은 그 활동이 결실을 맺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통문은 일제강점기에 있어 훼철된 서원의 복원은 제향 인물의 후손들이 얼마나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있는가가 관건임을 잘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玉山書院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3
『대동문화연구』, 柳浚弼,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0
하창환,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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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923년 흥해향교(興海鄕校) 통문(通文)

通文
右通諭事伏以我曲江書院文元公晦齋先生尸祝之地廢鄕人士頼以爲依歸之所不幸戊己令甲之後
祠宇毁撤蔡麥動橈士林之行過遺址者不能三遇而如常雖欲復覩前日盛儀時勢事力俱不能及則
但抱痛恨者久矣今因一鄕公議以修契寓慕之擧而以九月十日會于本校明倫堂雖不能曠告全者其於
先生本院士林不可無同情之恳故玆以仰佈伏願 僉尊諒悉千萬幸甚
右敬通于
玉山書院
癸亥九月 日
直員 黃鎭燮
張翊弘
李相瀚
琴七奎
李禧演
柳瀁復
李宗相
鄭元儉
張泰文
李泓久
李相春
柳東韶
李相白
鄭來鵬
柳東根
權鵬峻
掌儀 李鎬久
張泰玄
李疇洛
張鎭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