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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천상정회(川上亭會)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5+KSM-XF.1923.4777-20130630.Y1350101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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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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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이광로, 천상정회
작성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작내리
작성시기 1923
형태사항 크기: 93.4 X 52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862년 천상정회(川上亭會) 통문(通文)
이 통문은 1862년 5월 15일 지례군 장천, 즉 지금의 김천시 구성면 작내리에 있는 천상정회에서 관란재 김여권의 사우를 건립하는데 옥산서원이 이에 동의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것이다. 이 통문에서 사우를 설립하여 제향하고자 하는 김여권은 임진왜란 때 지례향교의 교임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향교의 대성전이 불타 오성과 동방 제현의 위패가 불에 탈 위험에 처하다 불속으로 뛰어들어 위판을 구해 나와 지례군 대덕면 등곡, 즉 지금의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로 옮겨 모셨다. 본 통문에서 김여권이 성현의 위패를 깊은 계곡 정갈한 곳에 모셨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두고 말한 것이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이 일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위판이 곧 그 존재와 같은 것이기 위판을 구한 것은 그 존재의 목숨을 구한 것과 같은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김여권지례향교에 안치되어 있던 성현의 위판을 불긴 속에서 꺼내 온 것은 바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성현의 목숨을 구한 일과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김여권의 행위를 찬양하는 흥선대원군의 친필 현판에 잘 나타나 있다. 그에 따르면 김여권의 행위는 ‘추악하고 더러운 것들이 선현의 위패를 침범치 못하게 하였으니, 모두들 성인을 잘 보살폈다고 칭송할 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의 삶을 ‘쓸쓸히 쑥대로 지붕을 잇고 초라히 살면서도 큰 업적을 남겼으니 …… 호화로이 지내던 벼슬아치들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이 통문에서 김여권이 90세가 되도록 초야에 묻혀 살면서 이름이 세상에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고 한 것에 대한 찬사인 것이다.
이상의 사실들은 김여권이 제향되기에 충분한 여건을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통문에서 그의 제향이 문중이나 고향에서 주도한 것이 아니라 각 향교가 모이는 도회에서 그러한 의론이 크게 일어나 자신들의 고장으로 알려와 통문을 돌리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과장이나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통문을 돌려진 불과 2년 후인 1864년(고종 1)에 그의 사당인 경인사와 함께 자제들을 교육시킬 의산서당이 지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사당 건립에 유림의 호응이 대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호응 속에는 당시 실세로 부상하던 대원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이 사당에 ‘석파흥선대원군이하응(石破興宣大院君李昰應)’이라는 낙관이 뚜렷한 친필 현판을 내렸다. 하지만 그는 그로부터 7년 뒤인 1871년(고종 8)에 서원철폐령을 내렸다. 대원군이 개인의 사당에 친필 현판을 내린 것과 서원에 대한 일대 정리 명령인 서원철폐령 사이에서 우리는 그의 유교관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김천시사』, 김천시, 1999
하창환,이수환

상세정보

1862년 5월 15일, 川上亭會에서 觀瀾齋 金汝權의 祠宇를 건립하는데 玉山書院에 同意를 구하며 보낸 通文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이 통문은 1862년 5월 15일 知禮郡 長川, 즉 지금의 김천시 구성면 작내리에 있는 川上亭會에서 觀瀾齋 金汝權의 祠宇를 건립하는데 玉山書院이 이에 同意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것이다. 이 통문에 따르면 관란재 김여권은 타고난 자질이 출중하고, 학문은 넓고도 깊으며, 나이 90세가 되도록 초야에 묻혀 살면서 이름이 세상에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그는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묘를 할 때 피눈물을 흘리며 죽을 먹으며 지냈다. 그리고 임금과 왕비의 제삿날에는 반드시 素食을 하였으며, 國喪을 당하면 祭壇을 만들어 분향하고 북쪽을 바라보며 호곡하면서 장례기간을 보냈다. 만년에는 龜城의 鑑湖 곁에 집을 짓고 ‘觀瀾’이란 편액을 내어걸으니 사방에서 배우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으며, 그를 태산북두처럼 바라보았다고 이 통문을 말하고 있다. 이어서 김여권이 제향을 받을 공적을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임진왜란 때 知禮鄕校의 首席 校任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왜군의 방화로 향교가 불더미에 휩싸이자 화마를 두려워하지 않고 다섯 聖人과 宋代 여러 현인들의 位版을 꺼내왔다. 그리고는 그 위판들을 깊은 계곡 정결한 곳에 임시로 안치하고 8년을 하루같이 초하루와 보름이 되면 향례를 올리다가 전란이 끝나자 다시 봉안하였다. 이 일의 顚末은 寒岡 鄭逑가 그 제자들과 문답한 것을 기록한 책에 담겨 있다. 전란 이후에 각 향교에서 위패를 다시 만들 때는 그 치수와 규모를 모두 이 향교의 위패에 법식을 본받게 되었다고 이 통문은 김여권의 공적을 서술하였다. 그리고 통문은 그의 이 같은 행적을 魯나라의 유생들이 祭器를 품에 안고 달리며, 梁나라의 화가 張僧繇가 부처의 초상을 옮겨 봉안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평가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한 김여권柳川 韓浚謙이 관찰사로 있을 때 임금에게 아뢰어 부역과 호세를 면해주려 하자, 성인을 호위하는 일은 선비가 늘 해야 할 일이라는 말로 그것을 거절했다. 그리고 金나라 오랑캐들이 쳐들어 왔을 때 고을의 수령을 격려하여 의병을 일으키게 한 일은 諸葛孔明孫權에게 간웅 曹操를 토벌하도록 권한 일과 유사한데, 이것을 보면 김여권이 학문뿐만 용기를 겸비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말로 그를 제향해야 할 당위성을 본 통문은 역설하였다. 이러한 김여권의 행적이 縣의 地理誌뿐만 학자의 공적을 기록한 문서, 선배들의 詩文, 墓誌銘, 편지글 등등에 실려 영원한 이야기거리가 되고 있음에도 포상과 제향할 공간이 없었던 것이 사림의 여한이었다고 통문은 그 동안의 아쉬움을 토로하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향교가 모이는 도회에서 김여권을 제향하자는 중론이 크게 일어나 이렇게 發文하여 통고하니, 옥산서원 여러분께서 한목소리로 흔쾌히 답을 내려 선비들의 사기를 진작하고 큰일을 이룰 수 있게 하면 참으로 고맙겠다는 말로 이 통문은 끝을 맺는다.
이 통문에서 사우를 설립하여 제향하고자 하는 김여권은 임진왜란 때 지례향교의 교임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향교의 대성전이 불타 五聖과 동방 諸賢의 위패가 불에 탈 위험에 처하다 불속으로 뛰어들어 위판을 구해 나와 지례군 대덕면 등곡, 즉 지금의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로 옮겨 모셨다. 본 통문에서 김여권이 성현의 위패를 깊은 계곡 정갈한 곳에 모셨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두고 말한 것이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이 일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위판이 곧 그 존재와 같은 것이기 위판을 구한 것은 그 존재의 목숨을 구한 것과 같은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김여권지례향교에 안치되어 있던 성현의 위판을 불긴 속에서 꺼내 온 것은 바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성현의 목숨을 구한 일과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김여권의 행위를 찬양하는 다음과 같은 興宣大院君의 친필 현판에 잘 나타나 있다.
한 조각 구성 땅 외로이 떨어져 있지만 / 一片龜城勢阽孤
관란재가 한 일 뭇 선비의 마음을 움직였네. / 觀瀾事業動群儒
추악하고 더러운 것들이 선현의 위패를 침범치 못하게 하였으니 / 腥塵不敢侵師位
모두들 성인을 잘 보살폈다고 칭송하는도다. / 與論皆稱護聖徒
쓸쓸히 쑥대로 지붕을 잇고 초라히 살면서도 큰 업적 남겼으니 / 蕭瑟蓬廬餘偉蹟
험한 골짜기 등곡은 신령스런 땅이 되었어라. / 崎嶇巖谷卽靈區
난세를 구한 뒤에 포의로 돌아가니 / 艱危此擧歸常布
호화로이 지내던 벼슬아지들 부끄럽기만 하여라. / 肉食當年愧大夫
이 시는 김여권의 행위가 당시에 있어 어떤 의미였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통문에서 기술된 그의 삶을 또한 압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김여권이 제향되기에 충분한 여건을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통문에서 그의 제향이 문중이나 고향에서 주도한 것이 아니라 각 향교가 모이는 도회에서 그러한 의론이 크게 일어나 자신들의 고장으로 알려와 통문을 돌리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과장이나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통문을 돌려진 불과 2년 후인 1864년(고종 1)에 그의 사당인 景仁祠와 함께 자제들을 교육시킬 義山書堂이 지어졌기 때문이다.
김여권의 사당과 그에 부속된 서당이 의론이 있고서 불과 2년만에 지어졌다는 것은 유림의 호응이 대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호응 속에는 당시 실세로 부상하던 대원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이 사당에 ‘石破興宣大院君李昰應’이라는 낙관이 뚜렷한 친필 현판을 내렸다. 하지만 그는 그로부터 7년 뒤인 1871년(고종 8)에 서원철폐령을 내렸다. 대원군이 개인의 사당에 친필 현판을 내린 것과 서원에 대한 일대 정리 명령인 서원철폐령 사이에서 우리는 그의 유교관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자료적 가치]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관란재 김여권의 사당인 경인사를 설립하기 위해 돌린 것이다. 이 통문과 함께 일의 결과를 보면 당시 경인사를 건립하는데 유림의 호응이 어떠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따라서 본 통문은 경인사의 설립 배경과 과정, 그리고 그에 대한 당시 유림의 반응을 이해하게 하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김천시사』, 김천시, 1999
하창환,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62년 천상정회(川上亭會) 통문(通文)

通文
右通諭事伏以尊衛 聖賢扶植名敎彛衷所均今古何限而至於艱危奔窟之際猶切奉奉護 聖之誠未嘗須臾少懈者惟我 觀瀾齋金先生是已 先生天
姿英邁學問宏深九旬林泉不求聞達而性根至孝前後居廬泣血啜粥恒居遇 國忌必食素遭 國喪設壇焚香北望號哭以趁 因山之期晩築室於龜城
鑑湖上扁之曰觀瀾四方學者多歸之而蔚然爲山斗重望也往在龍蛇 先生適當本 校首任冒犯鋒燹出 五聖及宋朝諸賢位版權安于深谷淨處朔望
行香禮八年如一日得免蓬棘灰燼之患及靖亂還復奉安當時顚末 岡門問答錄已備矣自是以後各 校位牌重造尺數規模皆取式於此 校嗚呼其大
有功於斯文亦可以幷軌於魯諸生之抱走祭器張僧繇之移奉 聖像者矣韓公柳川按巡時 啓聞復其戶 先生曰衛聖士之常也何足嘉遂抗辭不受方其
搶攘之日激地主而倡義旅有似乎孔明孫權討奸之事則 先生非但學問中人其志勇槩可見矣烝烝乎 其事親之孝炳炳乎其愛 君之忠卓卓乎其護 聖之義昭載
於本縣地誌各州儒狀太學通辭與夫畿湖嶺三省諸先輩之詩文誌銘稟題書牘足爲千古公案而以此卓異之行誼尙未蒙 褒贈之典是爲世道可慨也且尙
闕俎豆尊奉之所尤爲士林所齎鬱者久矣何幸近者達 校道會席衆論大發通告本鄕勗以畏塁象賢之道 抑亦幾百年未遑之擧有待於今日歟鄙等居在本郡
密邇 先生之古宅羹墻之慕一倍激勵齊會爛商發文輪告望須 僉君子同聲愜心據實賜答俾振士氣克敦大擧千萬善甚
右文 通于
玉山 書院
壬戌五月十五日知禮長川川上亭會中
班首 呂一鷹
柳東郁
李鉉沃
公事員 姜泰麟
李之性
李種久
張百相
李源和
製通 李光魯
寫通 李鉉坑
李廷鳳
許垞
崔芝燮
曺司 李鉉澤
文東鉉
申駿浩
裵相禧
會員 李雨均
李昌均
李大永
李鍾倫
姜泰文
姜泰龍
崔駿永
呂羲龍
呂永憲
沈英鐸
愼宗一
金世默
李相穆
李尙義
朴鍾文
李時燦
鄭華相
李炳泰
金庸直
呂憲東
李秉香
鄭煥九
文洪琪
李楨善
李相弼
朴錫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