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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남계서원(南溪書院)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5+KSM-XF.1923.4777-20130630.Y1350101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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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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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남계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대북길 9
작성시기 1923
형태사항 크기: 105 X 61.5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906년 남계서원(南溪書院) 통문(通文)
이 통문은 1906년 4월 3일 남계서원에서 발문한 것으로 양천사가 충평공 정헌 홍관을 추배하면서 서원으로 승격하고자 하는데 옥산서원이 이에 동의해 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의 것이다. 이 통문에서 추배할 인물로 거론하고 있는 홍관은 고려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113년(예종 8) 예부상서로서 요에 정사가 되어 다녀왔으며, 그 후에는 학사로 청연각에서 임금에게 『서경』「순전」을 강론하였다. 이 통문은 홍관의 이러한 점들을 강조하며 중국인들로부터는 노숙한 선생으로 불리고 우리나라에서는 큰 학자로 추앙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가 이자겸의 난 때 임금을 호위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고려사』의 기록을 인용하며 학식에 충절을 겸한 인물로 소개하였다. 이러한 그를 양천사, 즉 군위의 남양홍씨 사우로 양파 홍언박과 서담 홍위를 모시는 곳에 추배하고, 아울러 이곳을 서원으로 승격시키고자 하니 동의를 해달라고 이 통문은 당부하였다.
이 통문에서 기술하고 있는 것처럼 홍관은 학문이나 업적의 측면에서 보면 배향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군위의 남양홍씨들이 자신들의 사우에 새로운 인물을 추배하려는 시도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많은 서원이나 사우들이 일제강점기에 복원 또는 중건하면서 하려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남양홍씨들이 추배하려는 의도는 단순하게 추배하는 일이 아닌 사우였던 양천사를 그보다 한 단계 격이 높은 서원으로 승격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지역사회에서 그들의 권위를 한 단계 격상시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그리고 그들의 의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은 자료가 없어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1937년에 간행된 『교남지』에 명칭은 양천서원이며, 제향인물은 홍관, 홍언박, 홍위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로 양천사양천서원으로 기록되고, 또 그렇게 불려졌다.
『향촌의 유교의례와 문화』, 권삼문․김영순, 민속원, 2003
이병훈, 영남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
『慶北書院誌』, 한국국학진흥원, 경상북도, 2009
『嶠南誌』卷之三十四,
하창환,이수환

상세정보

1906년 4월 3일, 良川社洪灌를 追配하는데 玉山書院의 同議를 당부하며 南溪書院에서 보내온 通文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이 통문은 1906년 4월 3일 南溪書院에서 發文한 것으로 良川社忠平公 靜軒 洪灌를 追配하면서 書院으로 승격하고자 하는데 玉山書院이 이에 同議해 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의 것이다. 이 통문에 따르면 홍관은 고려의 융성기에 학문과 문장의 실력이 빼어나 淸讌閣에서 侍講을 하여 사리에 밝음으로 大儒에 추대되었다. 그리고 중국에 使臣으로 갔을 때 모든 질문에 잘 응답함으로써 중국인들로부터 老師라고 불려졌다. 이것은 홍관의 문장과 학덕이 한 시대의 사표가 될 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李資謙의 난이 일어났을 때 폭도들이 궁궐을 넘어오자 임금의 곁에서 호위하며 칼날을 마주하다 殉節하였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늠름하기가 추상과 같았으며, 밝기가 해와 별 같았다. 이와 같은 행위는 忠義가 마음에 쌓이고, 그것이 학문의 진정한 실천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면 위급한 순간에 그러한 행동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통문을 말하고 있다. 이어서 고려의 역사와 족보에서 5백 년 동안의 충신으로 홍관을 으뜸으로 삼으며, 重峯 趙憲이 역대의 忠義之士를 열거하면서 고려에서는 홍관圃隱 鄭夢周뿐이라고 말한 것을 인용하면서 포은과 달리 홍관이 수백 년이 지났음에도 받들어 모시는 곳이 없는 것이 斯文의 흠결이며 자신들의 여한이라고 통문은 토로하였다. 그러면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방안으로 자신들의 지역에 있는 양천사홍관을 추배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 제안에 따르면 이 祠宇는 陽坡 洪彦博西潭 洪瑋를 모시던 곳으로 이들과 함께 홍관을 배향함으로써 이곳을 서원으로 승격시키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예절에 맞을 뿐만 아니라 유림의 사례이기 때문에 齊會의 자리에서 發文하여 통고하니 한 마음으로 호응을 해주어 일이 이루어지도록 해주면 고맙겠다는 말로 통문은 끝을 맺는다.
이 통문에서 추배할 인물로 거론하고 있는 홍관은 고려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113년(예종 8) 禮部尙書로서 遼에 正使가 되어 다녀왔다. 본 통문에서 중국인들로부터 노련한 선생으로 불렸다는 것은 이때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이후 學士로 있으면서 청연각에서 임금에게 『書經』「舜典」을 강론하였다. 이는 본 통문에서 사리에 밝음으로 大儒에 추대된 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高麗史』에 따르면 이자겸의 난이 일어났을 때 홍관은 마침 都省에서 숙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변란의 소식을 듣자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법인데 내가 어찌 편안히 있으랴?”하고는 곧장 西華門으로 달려가 안에서 내려주는 밧줄에 매달려 올라가 임금의 곁으로 가 모시게 되었다. 하지만 폭도들이 궁궐에 난입하여 불을 지르자 임금을 廷德宮으로 피신시켰지만 정작 자신은 늙고 병들어 뒤따르지 못하여 拓俊京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본 통문에서 홍관의 충의에서 나온 행동은 늠름하기가 추상같고 밝기가 해와 별 같았다는 것은 이를 인용한 것이다.
이 통문에서 홍관의 업적을 자세하게 서술하는 것은 추배를 위해서는 사회적 公議를 얻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儒學은 혈연을 중심으로 한 윤리체계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조상을 모시는 일은 곧 근본을 잊지 않은 일이자 조상의 은혜에 보답하는 효도의 길이다. 이처럼 조상의 제향을 강조하는 까닭에 영구히 끊이지 않고 향사하는 불천위를 가졌거나 서원의 배향인물을 배출한 가문은 그 자체로 커다란 영광이자 명예이면서, 동시에 향촌에서 행세할 수 있는 권위와 권력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서로 불천위의 선조를 모시려고 하기도 하지만, 함부로 아무나 불천위로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비록 한 집안의 선조라 하더라도 불천위로 모시려고 할 때는 사회로부터 公議의 얻어야 하고, 또 공의를 얻기 위해서는 그 인물이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즉 사우에 제향이 될 수 있는 인물은 적어도 行義忠節이 일향의 모범이 되어야 하고, 서원에 제향이 되는 인물은 도학적 연원, 학문종사, 공적, 충절인 등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의 측면에서 보면 이 통문에서 말하는 것이나 역사적인 기록에 따르면 홍관은 배향되기에 적합한 인물이다. 그래서 본 통문을 작성하는데 주축이 된 사람들, 즉 軍威의 南陽洪氏들은 자신들의 선조인 홍언박홍위를 모시는 사우 양천사홍관을 함께 모시자고 한 것이다. 이 같은 일은 1920년대를 전후로 하여 빈번하게 있었던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많은 서원이나 사우들이 일제강점기에 복원 또는 중건하면서 기존의 제향인 이외에 새로운 인물들을 추가하고자 하는 시도가 자주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통문에서 홍관을 추배하는 하는 것이 인정과 예법에 맞을 뿐만 아니라 유림의 통례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새로운 인물을 추배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서원이나 사우를 새롭게 복원하거나 중건하는 일에는 많은 비용이 들어서 새롭게 배향되는 인물의 후손으로부터 후원을 받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남양홍씨들이 홍관을 추배하면서 의도하는 것은 사우였던 양천사를 그보다 한 단계 격이 높은 서원으로 승격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의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은 자료가 없어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1937년에 간행된 『嶠南誌』에 명칭은 良川書院이며, 제향인물은 홍관, 홍언박, 홍위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로 양천사양천서원으로 기록되고, 또 그렇게 불려졌다.
[자료적 가치]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진 후 일제강점기에 많은 서원과 사우가 복원 또는 중건하려고 돌린 통문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통문은 지금의 양천서원이 사우에서 어떻게 서원으로 승격했는가 하는 그 과정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특별한 자료적 가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향촌의 유교의례와 문화』, 권삼문․김영순, 민속원, 2003
이병훈, 영남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
『慶北書院誌』, 한국국학진흥원, 경상북도, 2009
『嶠南誌』卷之三十四,
하창환,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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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906년 남계서원(南溪書院) 통문(通文)

通文
右文爲通諭事伏以先賢之闡楊有時公議之顯晦無常粤惟我忠平公靜軒洪先生以經學文章當麗朝之隆侍講淸讌睿聖推之以大儒專對
上國華人稱之以老師此其文章德業所以爲一代之師表而及當資謙之亂縋越宮城捍衛王側而直前當刃遞爾殉節八字符訣凛如秋霜一索濡血炳若星日
苟非忠義之積于中者有得於學問之眞踐烏能辨此於危難之際哉此麗史氏錄五百年忠臣而以先生爲首重峯趙先生列敍歷代忠義而必曰麗朝惟
忠平鄭文忠二人而已噫華門之節旣與竹橋而幷美取義之碑亦與成仁而齊輝 則凡有我秉彛之天者又孰無高山景行之思而迄于今累百年之久尙無揭虔之所
此實斯文之欠典吾黨之齎恨竊惟鄙鄕之良川社陽坡西潭兩先生尸祝之所也猗歟坡老潭翁之卓節粹學實有本於先生之家法則躋享一廟尊之以
首位崇奉三賢陞之以院號者寔爲情文之允恊儒林之矜式故玆於齊會之席發文通告吾林慕賢之誠宜無異同伏願 僉尊同心應聲俾敦大事幸甚
右文通
玉山書院
戊午四月初三日南溪書院院長 李仁植
齋任 洪命欽
李慶在
製通 李相謙
李敬在
寫通 李寅郁
李宗極
李華敎
會員 李魯洙
金集一
李相馨
李魯政
金基福
李相贊
李相權
李魯祚
李寅文
南夏錫
金永休
李魯華
李磻敎
李蓂敎
李獻在
李樂在
李相績
李東勳
金凞振
金在應
李仁在
李寅恭
李普淵
李性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