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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임고영당(臨皐影堂)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5+KSM-XF.1923.4777-20130630.Y1350101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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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정진국, 조병소, 임고영당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462
작성시기 1923
형태사항 크기: 71 X 58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918년 임고영당(臨皐影堂) 통문(通文)
이 통문은 1918년 3월 15일 영천의 임고영당에서 수암 정사진을 배향하려 하는데 옥산서원이 동의하고 협조해 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정사진장현광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학덕이 높은 사람들과 교유하여 그의 학문과 행실이 조정에까지 알려져서 1606년(선조 39)에는 왕자의 사부를 제수 받았고, 1611년(광해군 3)에는 세마와 시직을 제수 받았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또한 그의 시는 온화하고 순일한 멋이 있는데다 담백하기까지 하여 송대 성리학자인 주렴계나 정명도 ․ 정이천의 풍모를 엿보게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이 통문에서는 그를 문장과 도덕에 있어서 스승인 장현광의 종통을 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인물에 대해 그의 고향인 영천에서가 아닌 선산원회당에서 먼저 추모하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그 이유는 정사진의 스승인 장현광의 고향이 선산이고, 그를 모시는 사당이 원회당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영천의 후손인 영일정씨들은 서둘러 통문을 돌려 추모 사업을 추진했던 것이다.
조상을 추모하는 것은 근본을 잊지 말라는 유학의 가르침에서 시작된 것으로 그것이 모든 행위의 근본이 되며, 곧 조상의 은혜에 보답하는 효도의 길이 된다. 이렇듯 조상의 제향을 강조하는 까닭에 영구히 끊이지 않고 향사하는 불천위를 가졌다는 것은 그러한 인물을 배출한 가문은 그 자체로 커다란 영광이자 명예이면서, 동시에 향촌에서 행세할 수 있는 권위와 권력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일제강점기에도 지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1920년대를 전후하여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서원이나 사우들이 복원 내지 중건되면서 다투어 새로운 불천위를 세우려 하였다. 영천의 영일정씨들이 정사진을 제향하는 일을 서두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통문을 보면 일제강점기에 일족을 중심으로 서원이나 사우의 복원 또는 중건하려는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향촌의 유교의례와 문화』, 권삼문․김영순, 민속원, 2003
이병훈, 영남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
하창환,이수환

상세정보

1918년 3월 15일, 臨皐影堂에서 鄭四震를 配享하는데 玉山書院가 동의해 줄 것을 당부하는 通文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이 통문은 1918년 3월 15일 영천의 臨皐影堂에서 守庵 鄭四震를 배향하려 하는데 玉山書院가 동의하고 협조해 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의 것이다. 이 통문에 따르면 정사진은 살아있을 당시 文章과 道德에 있어서 스승인 旅軒 張顯光의 宗統을 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사실은 나라에서 기록하는 역사적 문헌에 기록되어 있어 설명을 더할 필요가 없다고 통문은 말한다. 그러나 한번 享祀가 거두어진 뒤로는 그를 추모하는 장소를 다시 갖지 못한 것은 우리 유림에서 다 같이 통탄할 바가 아닌가 하고 반문한다. 그런데 올해 봄에 善山遠懷堂로부터 정사진을 추모하는데 契를 조직하자는 통문이 도착했다. 이 통문을 받고 그의 고향 후생으로서 이러한 논의를 먼저 발의하지 못한 것에 한편으로는 감사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러웠다. 그래서 정사진을 추모하는 사업을 하기 위해 서둘러 사람을 모았다. 현인을 추모하고 도리를 호위하는 일은 한마음 한뜻일 것이니 옥산서원 여러분들은 한목소리로 협력해서 이 일이 성사될 수 있도록 해주면 참으로 고맙겠다는 말로 이 통문은 끝을 맺는다.
이 통문에서 배향하고자 하는 정사진장현광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학덕이 높은 사람들과 교유하여 그의 학문과 행실이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1606년(선조 39)에는 왕자의 師傅를 제수 받았고, 1611년(광해군 3)에는 洗馬와 侍直을 제수 받았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그는 과거공부를 폐하고 일찍이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영천 자양동에 들어가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의 이러한 행적은 조정으로부터 숱하게 내려지는 관직을 뿌리치고 오직 학문에 전념한 스승 장현광에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사진이 비록 내려지는 벼슬은 거절하였지만 나라에 대한 걱정과 임금을 향한 충성스런 마음은 누구보다 크고 깊었다. 仁懿王后宣祖의 상을 당했을 때는 朞年服을 입고 친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와 다름없이 행하고, 나라에 喪이 있을 때면 반드시 채식을 하였다. 또한 향촌의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白鹿洞院規와 藍田鄕約을 준수하며 몸가짐을 독실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많은 글을 남겼지만 그 가운데서도 詩는 온화하고 순일한 멋이 있는데다 담백하기까지 하여 宋代 성리학자인 周濂溪나 程明道 ․ 程伊川의 풍모를 엿보게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본 통문에서 정사진의 문장과 도덕이 스승인 장현광의 종통을 이었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그의 이러한 것들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고 정사진의 고향인 영천에서보다 선산에서 먼저 그에 대한 추모의 사업을 벌인 것 또한 스승인 장현광과 관련된다. 왜냐하면 장현광의 고향이 선산이고, 그의 영정을 모시고 배향하는 곳이 원회당이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장현광을 배향하는 원회당에서는 추배할 인물로 맨 먼저 정사진을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이 통문에 서명한 사람 24명 중에 가장 많은 姓氏가 鄭氏이다. 이것은 정사진을 추모하는 사업에 그의 후손인 迎日鄭氏들이 주도적으로 나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이처럼 조상을 모시고자 하는 것은 근본을 잊지 말라는 儒學의 가르침에서 시작된 것으로 그것이 모든 행위의 근본이 되며, 곧 조상의 은혜에 보답하는 효도의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조상이 다른 사람에 의해 祭享된다는 것은 후손으로서 불효를 저지르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또한 이렇듯 조상의 제향을 강조하는 까닭에 영구히 끊이지 않고 향사하는 불천위를 가졌거나 서원의 배향인물을 배출한 가문은 그 자체로 커다란 영광이자 명예이면서, 동시에 향촌에서 행세할 수 있는 권위와 권력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서로 불천위의 선조를 모시려고 하기도 하지만, 함부로 아무나 불천위로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비록 한 집안의 선조라 하더라도 불천위로 모시려고 할 때는 사회로부터 公議의 얻어야 하고, 또 공의를 얻기 위해서는 그 인물이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즉 사우에 제향이 될 수 있는 인물은 적어도 行義忠節이 일향의 모범이 되어야 하고, 서원에 제향이 되는 인물은 도학적 연원, 학문종사, 공적, 충절인 등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정사진은 제향인물로서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때문에 그를 추모하는 일은 어느 한쪽에서 멋대로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후손들은 서둘러 통문을 돌려 일을 성사시키고 한 것이었다.
[자료적 가치]
자료적 가치
1920년을 전후로 하여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서원들이 속속 복원되거나 중건되었다. 그러면서 일족의 단합과 그 위세를 보이기 위해 새로운 불천위를 세우려는 노력들이 많았다. 이 통문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하지만 이 통문이 가지는 특색은 자신들의 조상을 다른 곳에서 제향하려 하자 그 후손들이 서둘러 선조를 제향하려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향촌의 유교의례와 문화』, 권삼문․김영순, 민속원, 2003
이병훈, 영남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
하창환,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918년 임고영당(臨皐影堂) 통문(通文)

通文
右通諭事伏以守庵鄭先生當日文章道德的承師門宗統播載 國乘文獻則
不必架說而一自撤享之後更無寓慕之所豈非吾林地所共慨歎者乎乃於今春自
善山 遠懷堂修契通文來到鄙等以梓鄕後生未能先發此論尤容感愧遂不日
收名成錄其在慕賢衛道之地無間遠邇則苟非一方所擅夯玆敢仰告伏願 僉
君子齊聲恊力俾爲敦事之地千萬幸甚
右文通
玉山書院
戊午三月十五日 臨皐影堂 堂長幼學曺喜元
有司 鄭鎭穆
會員 進士 鄭鎭國
幼學 安鍾瑞
成熹鎭
金圭采
進士 曺秉韶
幼學 鄭鎭觀
朴鎭壔
孫世璉
金禹熙
鄭淵德
曺秉軾
前議官 金俊熙
李榮杓
盧秀厦
崔翊朝
鄭鎭大
李鎭基
李㳬一
鄭源徹
金樹烈
柳祥淳